PRESBYTERIAN CHURCH IN KOREA (HAPDONG) · 1884–2026
한국 장로교 합동측 교회사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이 걸어온 길을 다섯 시기로 나누어 정리했습니다. 1959년 통합과 갈라지고, 고신과 합했다가 다시 나뉘고, 1979년에 또 한 번 갈라진 뒤 지금에 이르기까지입니다.
정리 2026-10-11 · 한국 안의 역사가 중심 · 합동 교단 신문과 합동·고신·합신·통합 쪽 글, 언론 보도에서 확인되는 만큼 옮김
1959년고신과의 합동총신여성 강도권
한눈에 보기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은 한국에서 가장 큰 장로교단 둘 가운데 하나입니다. 흔히 '예장 합동' 또는 '합동측'이라 부릅니다. 1959년 제44회 총회에서 지금의 통합측과 갈라졌고, 이듬해 고신과 합하면서 '합동'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고신은 3년 뒤 다시 나왔지만 이름은 남았습니다.
이 글은 한국 안의 역사를 중심으로 정리했습니다. 1952년까지의 역사는 통합, 합동, 고신, 기장이 함께 가진 것이어서 여기서는 짧게 적고, 자세한 것은 한국 장로교 통합측 교회사의 '① 뿌리'와 '② 해방과 분열' 탭에 두었습니다. 장로교 자체의 뿌리는 장로교회의 역사와 체계에 있습니다.
고신 교인이 먼저 알아 둘 것. 합동은 고신과 가장 가까운 교단입니다. 같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교리 표준으로 삼고, WCC에 참여하지 않으며, 여성에게 안수하지 않습니다. 두 교단은 1960년부터 1963년까지 한 교단이었습니다. 고신의 스승 박윤선은 뒤에 합동의 총신에서 가르쳤고, 다시 거기서 나와 합신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합동의 역사는 고신의 역사와 여러 번 만납니다.
다섯 시기는 이 글의 탭과 같습니다. ②와 ③은 짧은 기간이지만 지금의 합동측이 만들어지고 이름을 얻은 때여서 따로 다루었습니다.
2,116,250명, 11,689 교회, 목사 25,840명 (2025년 말, 제111회 총회 보고)
기독신문 2026.09
노회
165곳 (2026년 9월 보도)
노컷뉴스 2026.09.16
총회장
정영교 목사 (2026년 9월 제111회 총회, 서울 사랑의교회)
노컷뉴스 2026.09.14
신학교
총신대학교 (대학은 서울 사당동, 신학대학원은 경기 용인 양지)
기독신문 2026.06
이 글은 다른 세 교단의 글보다 자료가 얇습니다. 합동 총회 누리집의 연혁은 화면이 열리지 않아 읽지 못했고, 교단 신문의 검색도 되지 않아 기사 스무 건 남짓과 합동 쪽 필자의 글에 기대어 썼습니다. 확인하지 못한 것은 '자료와 한계' 탭에 적었습니다.
① 뿌리 (1884–1959)
이 탭의 핵심
한국 장로교회가 세워지고, 일제 말에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해방 뒤 다시 서는 과정에서 고신과 기장이 갈라져 나간 시기입니다. 통합과 합동이 함께 가진 역사입니다.
때
1884년에서 1958년까지
핵심 내용
1907년 독노회, 1912년 총회 창립, 1938년 신사참배 결의, 1942년 총회 해산, 1946년 남부총회, 1952년 고신 분립, 1953년 기장 분립
합동에 특히 중요한 사람
박형룡.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교수였고, 해방 뒤 고려신학교 교장을 거쳐 서울에 장로회신학교를 세웠으며, 합동 신학의 중심이 됨
밝혀 둘 것
이 시기는 통합측 교회사에 자세히 적었고 여기는 줄였습니다
1907.09.17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독노회가 창립됨. 선교사 33명과 한국인 장로 36명
1911.11.04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경충노회(지금의 경기노회의 뿌리)가 창립됨
1912.09
평양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창립됨. 일곱 노회, 목사 96명(외국인 44, 한국인 52)과 장로 125명
1913
제2회 총회가 첫 선교사를 중국에 보내기로 함
1938.09
제27회 총회(평양 서문밖교회, 총회장 홍택기)가 신사참배를 받아들이기로 결의함
1942.10
제31회 총회 뒤 총회가 해산되고 노회도 해체됨. 1943–1945년에는 총회가 없음
1946.06
해방 뒤 남쪽의 첫 총회(제32회, 서울 승동교회). 제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회개하고 취소하기로 함
1946.09
출옥 성도 주남선, 한상동이 중심이 되어 부산에 고려신학교를 세움
1947.04
제33회 총회(대구제일교회)가 WCC 창립 대회에 대표를 보내기로 함. 조선신학교 학생 51명이 김재준 교수의 신학을 문제 삼는 진정서를 냄
1948
박형룡이 서울 남산에 장로회신학교를 세움
1952
고신이 갈라져 나감
1953
제38회 총회가 김재준 목사를 파면하고, 6월에 한국기독교장로회가 갈라져 나감
1953.07
박형룡이 이끈 신앙동지회가 한국복음주의협회(NAE)를 조직함
1954.04
제39회 총회(안동)가 제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함
박형룡과 51인
1947년 조선신학교 학생 51명이 김재준 교수의 성경관을 문제 삼아 총회에 진정서를 냈습니다. 합동 쪽 글은 이들을 '51인 신앙동지회'라 부르며, 총회가 직접 운영하는 신학교가 총회의 신학과 다른 것을 가르친다고 호소한 사람들로 적습니다. 이 가운데서 뒤에 합동의 지도자들이 나왔습니다. 박형룡은 총회의 요청으로 김재준의 진술서를 살핀 뒤, 그가 성경을 무너뜨리는 고등비평과 자유주의 신학을 옹호함이 분명하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조선신학교가 달라지지 않자 박형룡은 1948년 서울에 장로회신학교를 세웠고, 이 학교가 총회신학교를 거쳐 지금의 총신대학교로 이어집니다(통합의 장로회신학대학교도 같은 뿌리에서 나왔습니다).
이 일을 기장 쪽에서는 전혀 다르게 봅니다. 양쪽 설명은 한국 기독교장로회 교회사에 따로 적었습니다.
1912년 창립 총회의 날짜와 사회자는 자료에 따라 다릅니다. 위키백과는 9월 1–4일에 총회장 언더우드라 하고, 합동 교단 신문은 총회록을 인용해 9월 2일 오전 9시에 열렸다고 적습니다. 고신이 갈라진 때도 1952년, 1952년 10월, 1953년으로 다르게 적은 자료가 있습니다.
② 1959년: 통합과 갈라지다
이 탭의 핵심
1959년 9월 대전의 제44회 총회가 경기노회 총대 문제로 멈추었고, 11월 서울 승동교회에서 따로 이어 간 쪽이 지금의 합동입니다. 승동측은 WCC를 영구히 탈퇴하고 에큐메니칼 운동에 반대하기로 결의했습니다.
합동이 보는 원인
WCC와 에큐메니칼 운동이라는 신학 문제. 지지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의 대립은 1954년부터 있었다
통합이 보는 원인
1958년 신학교 교장 박형룡이 물러나게 된 '3천만 환 사건'이 결정적이었고 WCC는 부차적이었다
승동 속회의 결의
WCC 영구 탈퇴와 에큐메니칼 운동 반대, NAE 탈퇴, 신학교 교수진 교체
밝혀 둘 것
날짜 순의 자세한 경위와 양쪽 설명을 맞댄 표는 통합측 교회사의 '③ 1959년' 탭에 있습니다. 여기는 합동 쪽에서 본 줄거리를 적었습니다
합동 쪽에서 본 줄거리
합동 쪽 필자들이 적는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총회는 1947년에 WCC 창립 대회에 대표를 보내기로 했고 1948년 대표가 참석했습니다. 1954년 에번스턴 대회에 다녀온 두 대표의 보고가 엇갈린 뒤로, WCC를 지지하는 쪽과 복음주의협회(NAE)에 속한 쪽이 맞섰습니다. 1956년 총회가 세운 연구위원 여덟 사람 가운데 박형룡, 박병훈, 황은균, 정규오가 반대하는 쪽이었습니다. 1958년 총회에 'WCC 탈퇴 건의서'가 들어왔으나 회의에 올려지지 않았습니다.
1959년 8월 전북 부안 격포에서 호남 지역 열 노회의 목사들이 'WCC 탈퇴 성명서'를 냈습니다. 9월 24일 대전중앙교회에서 제44회 총회가 열렸으나 경기노회가 낸 총대 명단 둘 때문에 멈추었습니다. 투표로 임시노회 쪽 총대를 받기로 했지만, 합동 쪽은 중립이어야 할 선교사 23명이 그쪽에 표를 던졌다고 봅니다. 전 총회장들이 낸 안에 따라 총회장 노진현이 11월 24일까지 정회를 선포했는데, 반대쪽이 임원 불신임안을 읽고 서울 연동교회로 가서 총회를 이어 갔습니다. 합동 쪽은 이 정회가 합법이었고, 먼저 따로 모인 쪽은 연동측이라고 말합니다.
11월 24일 정회했던 쪽이 서울 승동교회에 모여 총회를 이어 갔습니다. 총회장은 대전노회의 양화석 목사였고, 합동 쪽 글로는 27개 노회의 목사 105명과 장로 104명이 모였습니다. 본래 다시 모이기로 한 곳은 새문안교회였으나 그 교회가 연동 쪽이 되어 승동교회로 바꾸었습니다.
1959.08.07
부안 격포의 호남 지구 목사 수양회가 'WCC 탈퇴 성명서'를 냄
1959.09.24
대전중앙교회에서 제44회 총회가 열림. 경기노회 총대 문제로 정회
1959.09.25
투표로 임시노회 쪽 총대를 받기로 함
1959.09.27 또는 28
총회장 노진현이 11월 24일까지 정회를 선포함
1959.09.29
서울 연동교회에서 다른 쪽이 총회를 이어 감(연동측, 지금의 통합)
1959.11.24
서울 승동교회에서 총회를 이어 감(승동측, 지금의 합동). 총회장 양화석
1960.01
양쪽이 만났으나 합치지 못함
1960.02
연동측이 새문안교회에서 '통합' 총회를 엶
1960.09
승동측 제45회 총회(서울 승동교회)
3천만 환 사건을 합동은 어떻게 말하는가
통합은 이 사건을 분열의 결정적인 원인으로 듭니다. 합동 쪽 필자는 이렇게 답합니다. 이 일은 1958년에 돈이 마지막으로 나갔고 그해 3월 이사회에서 교장의 사표로 일단락된 일이다. WCC를 둘러싼 대립은 그보다 앞선 1954년부터 있었다. 교권의 대립이 배경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교권은 WCC라는 신학 문제로 짜인 것이다. 통합이 책임을 피하려고 이 사건을 앞세운다.
박형룡 자신은 1971년 교단 신문에 쓴 글에서 "총회가 WCC에 가입한 것이나 교직자들이 NAE를 조직한 것이나 다 경솔히 한 일"이라고 돌아보았다고 합니다.
합동 안에서 나온 다른 설명
합동의 교단 신문에 실린 한 글(2011)은 출신 지역을 듭니다. 합동 쪽은 황해도 출신이, 통합 쪽은 평안도 출신이 주류였고, 박형룡 둘레의 황해도 출신 목회자와 평안도 출신 목회자 사이의 반목이 심했다는 것입니다. 신학만이 아니라 사람과 지역의 문제도 있었다는 것을 합동의 신문이 스스로 적은 셈입니다.
사건의 자세한 내용(누구에게 왜 얼마를 건넸는지)은 통합 쪽 글과 합동 쪽 학자의 글을 따라 통합측 교회사에 적었습니다. 승동 속회의 결의 원문은 읽지 못했습니다. 위키백과의 표는 1960년 3월에 '대한예수교장로회(보수)'가 갈라졌다고 적는데 그 경위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③ 고신과의 합동과 환원 (1960–1963)
이 탭의 핵심
통합과 갈라진 승동측이 1960년 12월 고신과 합해 한 교단이 되었고, 여기서 '합동'이라는 이름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고려신학교를 닫기로 한 결정 때문에 3년이 못 되어 고신이 다시 나갔습니다.
합한 날
1960년 12월 13일 서울 승동교회 합동총회
갈라진 날
1963년 9월 17일 고신 환원총회
쟁점
신학교를 하나로 한다는 약속이 고려신학교를 닫는 것으로 바뀐 일
남은 것
고신 쪽 교회의 일부가 합동에 남았고, 교단의 이름 '합동'이 남았습니다. 얼마가 남았는지는 4분의 1과 3분의 1로 자료가 갈립니다
고신측 제10회 총회 속회가 합동을 결의함. 이어 승동교회에서 합동총회가 열려 '취지 및 선서문'을 채택함. 설교 박형룡, 축도 송상석(고신측 총회장)
1960.12.14
한상동 목사가 합동총회의 총회장으로 뽑힘
1961.09.21
제46회 총회(부산남교회)가 고려신학교를 차츰 닫기로 결의함
1961.11
경남(법통)노회가 '합동의 원칙이 깨진 상태'라고 선언함
1962.10.17
한상동 목사가 고려신학교를 다시 연다고 선언함
1963.07.29
부산노회의 고신 출신 교역자들이 환원발기회를 조직함
1963.08
부산, 전라, 경부, 경기, 경남, 진주, 경동노회가 잇달아 환원함
1963.09.17
고신 제13회 환원총회가 조직됨
합동총회가 한 일
합동총회는 고신측 경남(법통)노회를 단죄했던 제36회 총회의 결의를 취소했습니다. 고신이 엮던 '새찬송가'를 합동 기념으로 펴냈고, 1962년에 『총회 설립 50년 약사』를 엮었습니다. 고신의 교단 신문은, 고신이 가장 무겁게 여긴 신사참배에 대한 고백과 회개 운동에 대해서는 합동총회가 말이 없었다고 평가합니다.
환원을 보는 두 설명
고신 쪽. "신학교는 총회 직영으로 하나로 한다"는 합의가 고려신학교를 닫는 것으로 바뀌었고, 일차적인 책임은 약속을 어긴 총회 쪽에 있다. 고신 안에서도 "궁지에 몰려 성급히 합한 것은 큰 실책"이었다는 돌아봄이 있다.
합동 쪽과 다른 학자. 한 교단에 신학교가 둘 있으면 분열의 씨앗이 되므로 하나로 하자는 것이었다. 고신측 600여 교회의 4분의 1은 돌아가지 않고 합동에 남았다. 한국 교회사에 하나 됨의 본보기를 남길 큰 기회였는데 3년이 못 되어 갈라섰다.
2006년 합동의 교단 신문은 이 문제를 다룬 학회를 「1963년 고신 환원 '과연 정당했나'」라는 제목으로 보도했고, 거기서 고신 쪽 주장에 명분이 약하다는 반론이 나왔다고 전했습니다.
고신 쪽에서 본 이 일의 서술은 한국 고신교회사에 있습니다. 주일 성수 문제로 박윤선이 고려신학교를 떠난 일은 정암 박윤선에 적었습니다. 박윤선은 1963년부터 1974년까지 총신에서 가르쳤습니다.
'합동'이라는 교단 이름이 1960년의 합동에서 왔다는 것은 통합 총회 누리집에 적혀 있습니다(다만 그 누리집은 합한 날을 1960년 2월 13일로 적어 다른 자료와 다릅니다). 한상동이 총회장이 된 때를 합동 교단 신문은 1960년 12월 14일로, 위키백과는 1961년 제46회 총회로 적습니다. 승동측 제45회 총회장의 이름은 고성모와 고승모로 다르게 적힌 자료가 있습니다.
④ 총신과 1979년의 분열 (1963–1981)
이 탭의 핵심
신학교(총신)의 운영과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이 쌓여, 1979년 제64회 총회에서 비주류가 나가고(합동보수, 뒤의 개혁), 이듬해 교수들이 나와 합동신학원(합신)을 세운 시기입니다.
때
1963년에서 1981년까지
핵심 내용
1969년 총회신학대학 출범, 1970–1971년 사당동 터 매각 파동, 1978년 박형룡 별세, 1979년 비주류 이탈, 1980년 합동신학원 개교
사람
박형룡, 정규오, 이영수, 박윤선
무엇 때문이었나
합동의 교단 신문은 신학 갈등은 부수적이었고 신학교 주도권에서 밀려난 쪽이 나간 것이 대부분의 견해라고 적습니다. 합신 쪽은 교권주의의 횡포와 지역주의를 듭니다
1965
제50회 총회장 정규오
1969.12.24
총회신학교가 정부의 인가를 받아 총회신학대학이 됨. 초대 학장 박형룡
1970.12.07
서울 사당동의 학교 터를 1억 4,500만 원에 파는 계약이 맺어짐. 이듬해 재단 이사장의 위임장이 위조된 것이 드러남
1971.06.23
신학생 300명이 이전에 반대하여 동맹 휴학함
1971.09
제56회 총회(대전중앙교회)가 이사장과 부이사장을 뺀 이사 전원의 사퇴를 결의함. 터 매각은 손해를 보고 없던 일이 됨
1972.02
박형룡이 학장에서 물러남
1975.12
학교 이름을 '총신대학'으로 바꿈
1978.10.25
박형룡 별세. 그 뒤 정규오 목사를 중심으로 총신의 교수와 학장의 신학을 문제 삼는 '총회신학교 복구 운동'이 일어남
1979.02
박윤선이 총신의 초청으로 돌아와 대학원장이 됨
1979.09.20–24
제64회 총회(대구동부교회, 총회장 한석지). 호남을 중심으로 한 비주류가 나가 합동보수 교단을 세움
1979 가을 이후
총신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함. 이사회가 학생 수를 늘리려 했고 교수들이 반대함
1980.04
박윤선이 학장 서리를 맡았다가 물러남
1980.09
제65회 총회(부산부전교회)가 이영수 목사를 총회장으로 뽑음
1980.10.23
총신 교수 네 사람이 사직함
1980.11.11
서울 남서울교회에서 합동신학원 개교 예배. 교장 박윤선
1981.09.22
합신 쪽 교회들이 따로 총회를 열어 교단을 세움
세 가지 설명
누구의 설명
내용
합동의 교단 신문 (2011)
새 복음주의를 둘러싼 총신의 신학 갈등은 부수적인 원인이다. 신학교의 주도권에서 밀려난 정규오 목사 쪽이 이영수 목사 쪽에 더 맞설 수 없어 나갔다는 것이 대부분의 견해다. 비주류는 임원 선출과 신학교 이사 선출이 공평하지 않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다른 목사의 글
박형룡이 물러난 뒤 황해도와 호남 쪽의 힘이 약해지고 평안도와 영남 쪽이 힘을 얻었다. 밀려난 쪽이 총신의 신학이 변질되었다고 규탄하며 교권을 되찾으려 싸웠다
합신 쪽 (20년사)
세운 까닭은 교권주의의 횡포를 고치는 것, 지역주의가 빚은 총회의 분열, 가르치는 사람의 양심이다. 박윤선은 갈라설 뜻이 없었고 다시 합칠 것을 생각하여 '합동신학교'라 이름 지었다
이영수 목사에 대한 평가도 합동 안에서 갈립니다. 교단 신문의 한 칼럼은 그가 선교국을 새로 두어 총회세계선교회의 터를 닦고, 대치동 땅을 사서 총회회관을 짓고, 일만 교회 운동과 총신 양지 캠퍼스를 이룬 일을 들면서도 "평가는 극과 극"이라고 적습니다.
나간 쪽의 뒷이야기는 이렇습니다. 합동보수는 1985년 '개혁'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서울 방배동의 신학교 주도권을 두고 여러 갈래로 갈라졌습니다. 그 가운데 정규오 목사 계열의 교회들이 2005년 합동으로 돌아옵니다.
제64회 총회 당일에 누가 언제 어디서 따로 모였는지, 합동보수가 세워진 날짜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나간 쪽(합동보수, 개혁)이 스스로 쓴 글은 읽지 못했습니다. 1980년에 사직한 교수의 이름 가운데 한 사람은 자료에 잘못 적힌 것으로 보여 싣지 않았습니다. 합신의 출발을 '1981년 9월 따로 창립'으로 적은 자료와 '교단이 없어 개혁 쪽과 손잡았다'고 적은 자료가 있습니다.
⑤ 지금까지 (1981–현재)
이 탭의 핵심
한국에서 가장 큰 교단으로 자랐고(2012년 299만 명), 갈라졌던 개혁측과 2005년에 다시 합했으며, 지금은 여성 강도권과 정년 문제로 논쟁하면서 줄어드는 교세를 마주한 시기입니다.
2012년 2,994,873명에서 2025년 말 2,116,250명으로. 13년 사이 약 88만 명이 줄었습니다(정리자의 셈)
가장 최근 총회
2026년 9월 제111회(서울 사랑의교회, 총회장 정영교)
1981–1984
경기 용인 양지에 22만여 평의 터를 마련하고 1984년 5월 첫 건물을 준공함. 2004년 신학대학원이 양지로 옮김
1995
『총신대학교 신앙고백서』를 정함
1998–1999
제83회 총회 때 총회세계선교회(GMS)를 독립 기관으로 세움
2005.09
제90회 총회(대전중앙교회). 갈라졌던 예장 개혁과 26년 만에 다시 합함
2012
교인 2,994,873명으로 가장 많았던 해
2013
한국기독교총연합회에서 탈퇴함
2017–2019
총신대 사태. 총장 문제로 학생들이 건물을 점거하고 교육부가 실태를 조사함. 2019년 5월 새 총장이 취임함
2020.09
제105회 총회(용인 새에덴교회). 코로나19로 기간을 줄임
2023.09
제108회 총회(대전 새로남교회). 여성 강도권이 통과되었다가 하루 만에 뒤집힘
2024.09.23–27
제109회 총회(울산 우정교회, 총회장 김종혁). 166개 노회, 총대 1,493명
2025.09.22–25
제110회 총회(총회장 장봉생). 여성에게 강도권을 주되 목사의 자격에 '남자'를 적는 헌법 개정안을 가결하여 노회에 물음
2026 봄
노회 수의에서 개정안이 3분의 2를 얻지 못해 부결됨
2026.09.14–17
제111회 총회(서울 사랑의교회, 총회장 정영교). 부결을 확인함. 정년 연장안 부결
여성 강도권 논쟁 (2023–2026)
합동은 여성에게 목사와 장로의 안수를 하지 않습니다. 최근의 논쟁은 안수가 아니라 '강도권', 곧 강단에서 설교할 자격을 여성 사역자에게 줄 것인가였습니다. 2023년 총회가 통과시켰다가 하루 만에 뒤집었고, 2025년 총회는 강도권을 주되 목사의 자격에 '남자'라는 말을 넣는 헌법 개정안을 가결했습니다. 그러나 2026년 봄 노회들에 물은 결과 3분의 2를 얻지 못해 부결되었습니다.
양쪽에서 나온 비판
여성 안수를 바라는 쪽. 목사의 자격을 '남자'로 못 박아 안수의 길을 헌법으로 막는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총회장 밖에서 여성안수추진공동행동과 총신 신학대학원 여동문회가 안수를 촉구했습니다.
교단 안의 보수 쪽. 강도권을 주면 여성 목사 안수로 이어진다고 우려했습니다. 2026년 총회에는 개정안을 무효로 하고 여성사역자위원회를 없애자는 헌의도 올라왔습니다.
2024년 제109회 총회가 이 문제를 어떻게 결의했는지는 본문으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고신에서 이 문제가 놓인 자리는 고신은 왜 여성 목사 안수를 부정하는가에 있습니다.
정년과 그 밖의 결의
정년. 목사와 장로의 정년은 만 70세입니다. 이를 늘리자는 안이 제108회부터 제111회까지 해마다 올라왔으나 모두 부결되었습니다. 2026년에는 조건을 달아 만 75세까지 늘리는 안이 찬성 425, 반대 477로 부결되었습니다.
제110회 (2025). 표어 '함께하는 정책 총회'. 정책총괄본부 설립, 발달장애인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정이 보도되었습니다. 임원 선거와 총대 자격 문제로 첫날 선거를 하지 못해 둘째 날 저녁에야 총회장이 취임했습니다.
제111회 (2026). 목사 부총회장 송기섭, 장로 부총회장 손원재. 'AI 윤리 및 신앙 활용 지침'을 채택했고, 킹제임스 성경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한 목사를 이단으로 다시 확인했습니다.
교세
기준
교인 수
덧붙임
2012년
2,994,873명
가장 많았던 해
2019년
2,556,182명
2020년 말
2,382,804명
2022년
2,351,896명
교단 신문의 다른 기사는 같은 수를 2021년 말 기준으로 적음
2024년 말
2,242,844명
2025년 말
2,116,250명
한 해 사이 126,594명(5.6퍼센트) 감소
2025년 말 기준으로 교회는 11,689곳, 목사는 25,840명, 장로는 26,572명입니다. 같은 때 통합이 2,140,910명으로 합동보다 조금 많아졌다고 교단 신문이 보도했습니다. 2013–2018년의 해마다 숫자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조직, 신학교, 신학
이 탭의 핵심
합동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을 교리 표준으로 삼고, 박형룡의 신학을 뿌리로 여기며, 에큐메니칼 운동에 반대해 온 교단입니다. 신학교는 총신대학교입니다.
총회
165개 노회. 총회장은 해마다 바뀌고 부총회장이 이어받는 것이 관례로 보도됩니다
신학교
총신대학교. 대학은 서울 사당동, 신학대학원은 경기 용인 양지
헌법 개정
전국 노회 3분의 1 이상이 헌의해야 다루고, 노회 수의에서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합니다
밝혀 둘 것
합동의 헌법 본문과 총회 누리집을 읽지 못해 이 탭은 보도에서 확인되는 것만 적었습니다
총회
총회장. 임기는 한 해입니다. 2024년 제109회 총회장은 부총회장이던 사람이 박수로 추대되었고, 2026년 제111회 총회장은 혼자 출마했다고 보도되었습니다. 목사 부총회장, 장로 부총회장, 총무는 총대의 투표로 뽑습니다.
부서. 보도에 정치부, 신학부, 재판국, 규칙부, 이단대책 위원회, 여성사역자위원회, 선거관리위원회가 나옵니다. 전체 목록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선교. 총회세계선교회(GMS)가 맡습니다. 2020년에 선교사 2,500여 명이라는 숫자가 있으나 최신 숫자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교단 신문. 기독신문.
총신대학교
1948년 박형룡이 서울 남산에 세운 장로회신학교에서 출발하여 총회신학교, 총회신학대학(1969), 총신대학(1975)을 거쳤습니다. 대학은 서울 사당동에, 신학대학원은 2004년부터 경기 용인 양지에 있습니다. 학술지 『신학지남』은 1918년에 창간되었습니다. 그 밖에 칼빈대학교, 대신대학교, 광신대학교와 여러 지방 신학교가 합동과 관계된 학교로 꼽히지만, 총회가 지금 인준한 학교의 목록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신학
교리 표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
박형룡. 합동 신학의 뿌리로 여겨지는 사람입니다.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교수였고, 총회신학대학의 초대 학장을 지냈으며, 1978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교회 연합. 1959년부터 WCC와 에큐메니칼 운동에 반대해 왔습니다. 2013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에서 탈퇴했습니다. 미국의 PCA, OPC 같은 보수 장로교회와 교류합니다.
여성 안수. 허락하지 않습니다.
총회가 열린 교회들
역대 총회가 열린 곳을 보면 합동의 큰 교회들이 드러납니다. 승동교회(1959년 속회와 1960년 합동총회), 대전중앙교회(제44, 56, 66, 90회), 대구동부교회(제64회), 충현교회(여러 차례), 새에덴교회(제105회), 새로남교회(제108회), 울산 우정교회(제109회), 사랑의교회(제111회)입니다.
고신, 통합과 견주면
이 탭의 핵심
합동은 고신과 교리 표준, WCC에 대한 태도, 여성 안수에 대한 입장이 같습니다. 두 교단을 가르는 것은 교리가 아니라 역사, 곧 신사참배의 청산과 1960–1963년의 일입니다.
고신과 같은 것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 WCC 불참, 여성 안수 불허
고신과 다른 것
규모(교인이 고신의 다섯 배가 넘음), 신학교, 그리고 걸어온 길
통합과 다른 것
WCC, 여성 안수, 스스로 지은 신앙고백서의 유무
밝혀 둘 것
이 표는 각 글에서 따로 확인한 사실을 정리자가 나란히 놓은 것입니다
항목
합동
고신
통합
교인 (가장 최근 보고)
2,116,250명
379,621명
2,140,910명
교회
11,689곳
2,101곳
9,415곳
노회
165
35
69
갈라진 때
1959년 통합과
1952년
1959년 합동과
WCC
1959년부터 반대
참여하지 않음
회원
여성 안수
허락하지 않음. 강도권 개정안도 2026년 부결
허락하지 않음
1994년 허락
교리 표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
여기에 스스로 지은 신앙고백서 둘을 더함
신학교
총신대학교
고려신학대학원
장로회신학대학교 등 7곳
정년
만 70세
70세
70세
교인과 교회의 수는 합동 교단 신문이 2026년 9월에 실은 숫자입니다(합동과 통합은 2025년 말, 고신은 2026년 1월 기준). 합신은 132,341명에 993곳, 기장은 181,982명에 1,562곳으로 함께 실렸습니다. 고신 칸은 고신교단의 총회와 노회의 내용입니다.
합동과 고신이 만난 자리
1946–1948년. 박형룡이 고려신학교의 교장으로 왔다가 떠나 서울에 장로회신학교를 세웠습니다. 박형룡은 1960년에 이때 한상동과 헤어진 일을 "크게 잘못 생각한 것"이라 말하며 합동을 제의했다고 고신 쪽 글이 전합니다.
1960–1963년. 한 교단이었습니다. 고신의 한상동이 합동총회의 총회장을 지냈습니다.
박윤선. 고려신학교의 교장이었고, 1963–1974년 총신의 교수였으며, 1980년 총신을 나와 합동신학원을 세웠습니다. 고신, 합동, 합신 세 교단의 신학교에 모두 그의 자리가 있습니다.
최근. 2025년 제110회 총회가 끝난 날 '세계 개혁교회 지도자 대회'가 열렸고, 총회장이 보수적인 교단들과의 협력과 개혁주의 연결망을 말했다고 보도되었습니다. 합동, 고신, 합신 사이의 강단 교류나 연합 논의에 관한 보도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함께 생각할 물음. 합동과 고신은 교리가 같은데 왜 한 교단으로 남지 못했습니까. 1960년의 합동이 실패한 까닭을 고신은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라 하고 합동은 '신학교가 둘이면 안 되기 때문'이라 합니다. 두 말은 서로 반박하는 말입니까, 같은 일의 두 면입니까. 합동의 교단 신문은 1959년과 1979년의 분열에 신학만이 아니라 지역과 주도권의 문제가 있었다고 스스로 적었습니다. 교회가 갈라질 때 내세우는 까닭과 실제 까닭을 가려 보는 눈은 어떻게 기를 수 있습니까. 이 물음은 정리자가 붙인 것입니다.
자료와 한계
무엇으로 확인했나. 합동의 교단 신문인 기독신문의 기사 열한 건(노회의 역사, 한국 장로교 자화상, 1963년 고신 환원, 총신대 역사 기획, 교세 통계, 제110회 총회 결산 등), 합동 쪽 필자 소재열 목사의 글 두 편(리폼드뉴스, 2010·2011), 총신대학교 박용규 교수의 글(코람데오닷컴, 2009), 고신뉴스 KNC의 「고신교회 70년 역사 산책」, 합신의 역사를 다룬 코람데오닷컴의 글, 통합 총회 누리집의 역대 총회 표, 노컷뉴스의 2024–2026년 총회 보도를 2026년 10월 11일에 읽었습니다. 위키백과의 역대 총회 표는 보조로 썼습니다.
읽지 못한 것. 합동 총회 누리집의 연혁(화면이 열리지 않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항목, 합동의 헌법 본문, 1979년에 나간 쪽이 스스로 쓴 글, 통합 쪽 학자가 1959년을 다룬 글의 원문.
확인하지 못한 것. 1884–1901년 선교 초기의 일(읽은 자료에 없음). 1959년 11월 승동 속회의 결의 원문. 1965년 총신의 사당동 교사. 1979년 제64회 총회 당일의 일. 2005년 개혁측과 합한 날짜와 합류한 교회의 수. 2012년 제97회 총회에서 있었던 일. 총신대 사태의 뒷부분. 2024년 제109회 총회의 여성 강도권 결의. 제110회 총회의 장소와 목사 부총회장. 선거 방식의 변천(제비뽑기 등). 12신조와 헌법의 짜임. 한국교회총연합과의 관계.
자료끼리 어긋나는 곳. 1912년 창립 총회의 날짜. 제44회 대전 총회의 기간. 고신이 갈라진 때. 한상동이 총회장이 된 때. 환원 때 합동에 남은 고신 교회의 몫(4분의 1과 3분의 1). 교인 수의 기준 연도. 노회의 수(161, 166, 165). 본문의 해당 자리에 적었습니다.
검색 요약으로만 본 것. 총신대 사태의 날짜들, 3천만 환의 정확한 금액을 적은 글, '합동' 이름이 환원 뒤에도 유지되었다는 것.
해석이 들어간 곳. 13년 사이 약 88만 명이 줄었다는 셈, 박윤선의 자리를 세 교단에 걸쳐 말한 문장, 두 교단을 가르는 것이 교리가 아니라 역사라는 문장, 견준 표, 마지막의 물음입니다.
사람 이름에 관해. 총회장과 역사에 남은 인물은 자료에 적힌 대로 썼습니다. 최근 분쟁의 당사자와 이단으로 결의된 사람의 이름은 적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