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성 과정 (1938–1956)
신사참배 거부→출옥→고려신학교→경남노회 갈등→법통노회→총노회→총회
1938.07
한상동의 사임
마산 문창교회에 부임한 지 반년 만에 신사참배 거부 문제로 사임하고, 부산에서 드러나지 않게 거부운동에 들어감.
1938.09
총회의 결의
제27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함. 거부한 사람들은 이후 총회와 다른 길을 걷게 됨.
1940.07.03
검거
한상동 체포. 거부운동은 1938년부터 1940년 여름까지 주로 전개되었고 그 뒤에는 검거와 옥중 생활이 이어짐.
1945.08–11
출옥과 재건
8월 17일 평양형무소에서 17명이 풀려남. 한상동은 9월에 평양 산정현교회를 재건해 시무함. 주남선은 9월에 거창으로 돌아와 11월 제47회 경남노회장으로 뽑힘. 두 사람은 옥중에서 이미 교회 재건의 방법으로 신학교 설립을 의논했다고 전해짐.
1946.05–08
월남과 진해 신학 강좌
한상동이 1946년 5월 남쪽으로 내려옴. 6월부터 8월까지 경남 진해에서 박윤선을 강사로 석 달 동안 신학 강좌를 엶. 7월 30일 한상동이 부산 초량교회 담임으로 부임.
1946.09.20
고려신학교 개교
부산에서 개교. 신사참배로 문을 닫았던 평양신학교를 다시 세운다는 뜻을 품음.
1946.12
추천 취소
제48회 경남노회에서 김길창이 노회장이 되고, 고려신학교 학생 추천을 취소하기로 가결함. 김길창은 1938년 총회 때 부회장으로서 노회장들을 이끌고 평양신사에 참배한 인물로 기록됨.
1947.10
박형룡의 취임과 사임
만주에서 돌아온 박형룡이 교장으로 취임했으나, 학교 운영 방침을 두고 설립자 한상동과 뜻이 맞지 않아 6개월 만에 사임함. 그는 1948년 서울에 장로회신학교를 세움.
1951
경남법통노회
고려신학교 측이 경남노회를 떠나 따로 노회를 구성함. 10월 한상동은 초량교회를 사임하고 부산에 삼일교회를 세움.
1952.04.29
마지막 거절
제37회 총회(대구 서문교회)가 법통노회의 총대를 다시 받지 않음.
1952.09.11
총노회
진주에서 총노회 조직. 회장 이약신, 부회장 한상동. 경남(법통)노회를 중심으로 대구·경주·전라 지방회를 두었고, 1953년 경북노회, 1954년 경기노회와 전라노회가 조직됨.
1956.09.20
총회
부산남교회에서 총노회를 총회로 개편. 이 무렵 신학교 재정 지원과 소송 문제 등을 두고 교장 박윤선의 불만이 쌓였고, 교단 안에 균열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교단지는 적음.
두 가지 설명 — 이 과정을 보는 눈은 둘로 나뉩니다. 고신 쪽은 신사참배에 대한 온 교회의 회개를 촉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새 교단을 세우려던 것이 아니라 총회에서 밀려났다고 설명합니다. 당시 총회 쪽은 고려신학교 설립자들을 독선적이라고 보아 총대로 받지 않았습니다. 장신대의 이영헌 교수는 두 쪽이 "교인쟁탈전"을 벌였다고 비판적으로 적었습니다. 백과사전은 이 교단을 "신사참배 항거자 중심으로 형성된 장로 교단"이자 "교단 분열의 계기를 제공"한 교단으로 함께 평가합니다.
형성기의 인물들
각 카드의 표시는 이번에 확인한 자료의 수준입니다.
한상동 韓尙東백과사전 확인 · 1901–1976
목사 · 신사참배 거부운동 지도자 · 고려신학교 설립자
배경
- 1901 7월 30일 경남 김해 출생. 부산 다대포에서 자람
- 1924 전도를 받아 기독교인이 됨. 이 일로 문중에서 내쳐짐
- 1933 평양 장로회신학교 입학, 1937년 졸업과 목사 안수
거부운동과 옥고
- 1938 마산 문창교회 부임, 7월 사임. 부산·마산·밀양 일대에서 거부운동
- 1940 7월 3일 체포. 해방까지 평양에서 5년간 수감
해방 이후
- 1945 9월 평양 산정현교회 재건
- 1946 월남, 초량교회 담임, 9월 20일 고려신학교 개교
- 1951 삼일교회 설립. 1973년 원로목사가 될 때까지 담임
- 1960 합동 총회에서 총회장. 1963 고려신학교 재건과 환원 운동을 이끎
- 1970 고려신학대학 초대 학장. 1976 1월 6일 부산에서 별세
박윤선 朴允善백과사전 확인 · 1905–1988
신학자 · 고려신학교 교장 (1946–1960)
- 평양신학교와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만주에서 가르침
- 1946년 진해 신학 강좌의 강사. 고려신학교 설립 취지문을 쓰고 개교 때부터 교장으로 가르침
- 1960년 9월 주일성수 문제로 고려신학교를 떠남
- 고신에서의 자리는 박윤선과 고신 탭, 생애 전체는 별도 글 「정암 박윤선」에 정리함
주남선 朱南善백과사전 확인 · 1888–1951
목사 · 출옥성도 · 고려신학교 공동 설립자
- 1909 경남 거창에서 친구들과 함께 기독교인이 되어 거창읍교회를 세움. 본래 이름은 주남고
- 1919 3월 거창에서 만세시위를 이끌고 옥고를 치름
- 1930 평양 장로회신학교 졸업, 목사 안수. 평생 거창읍교회에서 목회
- 1940 7월 신사참배 거부운동으로 검속. 옥중에서 이름을 남선으로 바꿈
- 1945 8월 17일 석방. 11월 제47회 경남노회장
- 1946 고려신학교 설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목사 · 총노회 초대 회장
- 평안도 정주 출신. 오산학교에서 주기철을 만나 평생의 친구가 됨
- 주기철의 추천으로 교사로 부임했다가 마산 문창교회 장로의 사위가 되어 경남에 자리 잡음
- 제1·2·3·6회 총회의 회장. 백과사전은 교단의 설립자를 이약신으로 적음
- 생몰 연도는 확인하지 못함
신학자 · 고려신학교 교장 (1947.10부터 약 6개월)
- 1947년 7월까지 만주 봉천 동북신학교에서 일하다가, 고려신학교 측이 보낸 송상석의 요청으로 귀국
- 운영 방침을 두고 한상동과 마찰을 빚어 사임
- 1948년 서울 남산에 장로회신학교를 세우고 초대 교장이 됨
장기려 張起呂백과사전 확인 · 1911–1995
의사 · 복음병원 초대 원장
- 평안북도 용천 출생. 1932년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
-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의사가 되겠다는 약속을 지키려 1940년 평양 기휼병원으로 옮김
- 1951 전쟁으로 남하한 뒤 경남 구제위원회의 전영창과 한상동의 요청으로 부산 영도에서 무료 진료를 시작함
- 1968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세움. 1979년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
선교사와 동역자
- 한부선 선교사: 초기 고려신학교에서 박윤선과 함께 가르침
- 송상석: 박형룡의 귀국을 주선하고 1955년 『기독교보』 창간을 이끎
- 한명동: 1955년 칼빈학원을 시작해 기독교 대학의 길을 엶
- 이인재: 출옥성도. 신학교 설립 기성회에 참여
형성 연표
| 연도 | 사건 | 관여 인물 |
| 1938.09 |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 총회장 홍택기, 부회장 김길창 |
| 1940.07.03 | 체포 | 한상동 |
| 1945.08.17 | 평양형무소에서 17명 출옥 | 한상동, 주남선, 이기선, 이인재 등 |
| 1945.11 | 제47회 경남노회장 피선 | 주남선 |
| 1946.06–08 | 진해 신학 강좌 | 박윤선 (강사) |
| 1946.09.20 | 고려신학교 개교 | 주남선, 한상동, 박윤선 |
| 1946.12 | 경남노회, 학생 추천 취소 | 노회장 김길창 |
| 1947.10 | 교장 취임, 6개월 뒤 사임 | 박형룡 |
| 1951 | 경남법통노회 조직, 복음진료소 개설 | 한상동, 장기려 |
| 1952.04.29 | 제37회 총회, 총대를 받지 않음 | |
| 1952.09.11 | 총노회 조직 | 이약신 (회장), 한상동 (부회장) |
| 1956.09.20 | 총회로 개편 | 이약신 (회장) |
| 1960.09 | 고려신학교 사임 | 박윤선 |
신사참배 거부 · 뿌리옥에 갇히면서도 절하지 않은 사람들이 교단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고려신학교 · 중심교단보다 신학교가 먼저 있었습니다. '고신'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나왔습니다.
총노회 · 제도화총회에 받아들여지지 않자 1952년에 따로 조직했습니다.
고신은 교단을 세우고 신학교를 만든 것이 아니라, 신학교가 먼저 서고 그 신학교를 둘러싼 갈등 끝에 교단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1960년 합동 때도, 1963년 환원 때도 쟁점의 중심에 고려신학교가 있었습니다.
박윤선과 고신 (1946–1960)
박윤선은 고려신학교가 문을 연 날부터 14년 동안 교장으로 가르쳤고, 1960년에 고신을 떠났습니다. 여기서는 고신 교단의 역사에서 그가 맡은 자리만 적습니다. 생애 전체와 성경주석, 평가, 관련 자료는 정암 박윤선에 따로 정리했습니다.
가장 단단한 사실고신은 교단보다 신학교가 먼저 있었고, 그 신학교에서 처음부터 가르친 사람이 박윤선입니다. 1946년 9월 개교 때 교장 서리였고 1960년 9월까지 교장이었습니다. 백과사전과 교단지가 같게 적습니다.
왜 박윤선이었나
- 가르칠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한상동과 주남선은 옥중에서 이미 신학교를 세우기로 뜻을 모았으나, 두 사람은 목회자였지 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증언
- 정통 신학을 갖춘 드문 사람이었습니다. 박윤선은 평양신학교에서 가르쳤고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두 번 유학했으며 이미 주석을 낸 사람이었습니다. 한상동은 남쪽으로 내려오자마자 서울에 있던 그를 찾아갔습니다. 증언
- 설립 취지문을 썼습니다. 취지문은 "정부(正否)와 시비(是非)를 단(斷)하는 칼빈주의의 신학을 수립하고자 한다"고 밝혔습니다. 설립자를 주남선과 한상동으로 하자고 제의한 사람도 그였습니다. 증언
- 진해 강좌를 혼자 맡았습니다. 개교에 앞선 신학 강좌에서 성경신학, 조직신학, 창세기, 시편, 로마서, 히브리서, 계시록을 강의했습니다. 증언
고려신학대학원장을 지낸 허순길은 "고신교회는 고려신학교를 떠나 생각할 수 없고 고려신학교는 박윤선을 떠나 생각할 수 없다"고 적었습니다. 그는 1958년부터 3년 동안 박윤선의 조교였습니다.
고려신학교에서의 14년
1946.09.20
개교와 교장 서리
부산에서 고려신학교 개교. 한부선 선교사와 함께 초기의 가르침을 맡음. 백과 교단지
1947.10–1948
박형룡의 여섯 달
박형룡이 교장으로 왔다가 여섯 달 만에 떠남. 박윤선이 다시 학교를 이끎. 백과
1949
첫 주석
『요한계시록 주석』 출간. 고려신학교 시절에 성경주석 작업이 본격화됨. 언론
1952.09
총노회
고려신학교 측이 총노회를 조직해 교단이 됨. 백과사전은 박윤선도 이때 기존 총회를 떠나 고려파에 섰다고 적음. 백과
1953–54
네덜란드
자유대학에서 신약학 연구. 미국과 네덜란드 두 갈래의 개혁신학이 고신에 들어오는 통로가 됨. 백과
1956
첫 번째 틈
총회 개편 때 신학교 재정 지원과 소송 문제 등을 두고 교단에 공개적으로 과제 해결을 요구함. 교단이 신문, 대학, 병원 등 여러 일을 벌이면서 신학교 지원이 뒤로 밀린 것이 배경. 교단지
1957
소송 논쟁
기존 총회 측과 예배당을 두고 법정에서 다투는 일을 놓고 송상석과 맞섬. 박윤선은 한때 학교를 떠났다가 그해 가을 돌아옴. 이 쟁점은 20년 뒤 고려측 분립(1976)으로 다시 터짐. 교단지
1960.07–09
주일성수 문제와 이탈
아래 참조. 교단지
1960년, 주일 아침의 일
박윤선이 고신을 떠나게 된 일입니다. 고신뉴스가 2023년에 이상규 교수의 글로 여러 차례에 걸쳐 당시 문서를 소개했습니다. 아래 경과는 그 연재에 따른 것입니다. 교단지
| 날짜 | 일어난 일 |
| 1960.07.17 (주일) | 안식년으로 귀국하는 미국 정통장로교회 서아도(Spooner) 선교사를 전송하러 택시를 타고 부산 부두로 감. 전송한 뒤 가까운 교회에서 예배할 생각이었으나, 승선이 늦어져 선교사 가족과 배 위에서 예배하고 나오니 공적 예배 시간이 지나 있었음 |
| 1960.08 | 고려신학교 이사회(이사장 한상동)가 이 일이 문제가 되고 있음을 통보함. 박윤선은 구두로 교장직 사면을 말하고 자리를 떠남 |
| 1960.09.06–09 | 부산노회(범천교회). 박윤선은 부득이한 일이었고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고 답함. 노회는 "부득이한 일"의 한계를 총회에 묻기로 함 |
| 1960.09.20 | 총회(부산남교회). "본인이 자기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고 하여도 남에게 부덕이 되어 건덕상 문제화할 때는 도의적 책임을 지도록" 가결 |
| 1960.09.23 | 이사회가 도의적 책임과 사과를 요구함. 박윤선이 거부함 |
| 1960.09.24 | 이사회가 교장제를 없애고 교수회 회장 윤번제로 바꾸기로 결의. 교장직은 자연 해임되고, 책임을 지는 표시가 있을 때까지 교수 시무를 중지함 |
여기는 갈립니다
박윤선의 주장: 선교사 전송은 성경이 권하는 선한 일이고, 예배를 드리지 못한 것은 부득이한 사정 때문이었다. 주일을 범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 그는 이 입장을 『파수군』에 「주일 지키는 법에 대하여」라는 글로 밝혔습니다.
이사회의 견해: 전송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공적 예배 시간을 거기에 쓴 것이 잘못이다. 예배모범이 말하는 "위급한 일"은 생명에 관계되거나 천재지변 같은 일이며 전송은 여기에 들지 않는다. 교장직 처리는 치리가 아니라 행정 조치다.
뒤의 평가: 교단지 스스로 "단순히 주일성수 문제만이 아닌 복합적인 문제가 내재되어 있었다"고 적습니다. 1956년부터 쌓인 신학교 재정과 운영을 둘러싼 갈등이 배경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백과사전은 이 일을 설명하지 않고 "1960년 9월 고려신학교를 사임하고 고려파를 떠나"라고만 적습니다.
떠난 뒤 고신에 남은 것
- 합동으로 이어졌습니다. 교단지는 박윤선의 이탈이 고려신학교의 변화를 불러 그해 12월 13일 승동측과의 합동으로 이어졌다고 보고, 1960년을 "전환의 해"라 부릅니다. 교단지
- 신학의 방향이 남았습니다. 개교 때부터 14년 동안 배출된 졸업생들이 교단의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총회 개편 무렵까지 졸업생이 178명이었습니다. 교단지
- 소송 문제가 남았습니다. 그가 1957년에 제기한 물음은 풀리지 않은 채 남아 1976년 교단을 갈랐고, 2015년 통합 때에야 "신자 간 법정 소송은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는다"는 합의에 이르렀습니다. 언론
- 지금도 함께 기억합니다. 합신이 여는 정암신학강좌에 고신 쪽 교수가 강사로 서고, 교단지는 2023년에 그의 이탈 과정을 당시 문서와 함께 여러 차례에 걸쳐 다시 살폈습니다. 언론 교단지
여기는 갈립니다
고신 쪽의 설명: 주일을 지키는 문제에서 신학교 교장이 본이 되어야 했고, 이사회의 조치는 치리가 아니라 행정이었다.
다른 쪽의 물음: 한 번의 주일 일로 개교 때부터의 교장을 물러나게 한 것이 온당했는가. 교단지도 재정과 운영을 둘러싼 묵은 갈등이 배경에 있었다고 적습니다.
이 글은 어느 쪽이 옳은지 판단하지 않습니다. "떠난 뒤 고신에 남은 것"의 첫째와 셋째 항목은 교단지와 보도를 이어 읽은 정리자의 해석입니다.
박윤선의 생애 연표, 신학의 뿌리, 성경주석의 평가, 딸의 책을 둘러싼 논의, 관련 도서와 논문, 예전에 정리해 둔 자료와의 대조는 정암 박윤선으로 옮겼습니다.
한국 장로교 주요 교단 비교
같은 뿌리, 다른 갈림길 — 네 교단은 모두 1912년에 세워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나왔고, 같은 장로회 정치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물려받았습니다. 갈라진 까닭이 서로 다릅니다. 고신은 신사참배 문제, 기장은 신학 교육과 성경관 문제, 통합과 합동은 세계교회협의회 가입 문제였습니다. 아래 표는 전통적 경향을 단순화한 것입니다.
| 구분 | 고신 | 합동 | 통합 | 기장 |
| 갈라진 해 | 1952 | 1959 | 1959 | 1953 |
| 갈라진 까닭 |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 고려신학교 | WCC 가입 반대 | WCC 참여 | 신학 교육과 성경관 |
| 신학 성향 | 보수, 개혁주의 | 보수, 개혁주의 | 온건 보수 | 진보, 사회참여 강조 |
| 성경관 |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 | 무오 강조 | 영감과 권위 인정, 해석 폭이 넓음 | 역사비평 수용 |
| 교회연합 | WCC 반대 | WCC 반대 | WCC·NCCK 참여 | WCC·NCCK 참여 |
| 여성 목사 안수 | 하지 않음 | 하지 않음 | 1994년 총회에서 허용 | 1974년 총회에서 허용 |
| 신학교 | 고려신학대학원, 고신대학교 | 총신대학교 | 장로회신학대학교 | 한신대학교 |
| 교회 정치 | 당회 → 노회 → 총회 | 당회 → 노회 → 총회 | 당회 → 노회 → 총회 | 당회 → 노회 → 총회 |
| 내세우는 것 | 신앙의 정통, 생활의 순결 | 개혁주의 신학의 보수 | 교회 일치와 연합 | 사회 정의와 참여 |
핵심 차이 세 가지
출발점다른 교단은 신학 노선이나 연합 문제로 갈라졌습니다. 고신은 일제 때의 신사참배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에서 출발했습니다.
교회의 순결고신은 교리의 바름과 함께 생활의 순결을 내세웁니다. 신자 간 법정 소송 문제로 교단이 갈라졌다가 다시 합친 일이 이를 보여 줍니다.
변화에 대한 태도타협하지 않음으로써 정체성을 얻은 교단이어서 제도의 변경에 신중합니다. 여성 안수 논의가 그 예입니다.
같은 교단 안에서도 지역과 개교회마다 차이가 큽니다. "변화에 대한 태도"는 사실이 아니라 정리자의 해석입니다. 여성 안수 문제는 고신은 왜 여성 목사 안수를 부정하는가, 장로교 전체의 역사와 제도는 장로교회의 역사와 체계, 다른 교파와의 비교는 한국 성결교회사를 보시기 바랍니다.
용어 설명
이 글에 나온 용어를 주제별로 묶었습니다.
형성기의 말
- 신사참배
- 일제가 신사에 절하도록 강요한 일. 일제는 종교가 아니라 국민의례라고 했으나, 거부한 사람들은 우상 숭배로 보았습니다.
- 출옥성도
-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옥에 갇혔다가 해방과 함께 풀려난 사람들. 평양형무소에서 나온 17명을 주로 가리킵니다.
- 고려신학교
- 1946년 9월 부산에 세워진 신학교. '고신'은 고려신학교를 줄인 말이며, 지금의 고려신학대학원과 고신대학교의 뿌리입니다.
- 고려파
- 고려신학교를 지지한 사람들을 당시 총회 쪽에서 부르던 이름. 뒤에 고신 계열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였습니다.
- 법통노회
- 1951년 고려신학교 측이 기존 경남노회를 떠나 따로 세운 노회. 자신들이 경남노회의 바른 계통을 잇는다는 뜻으로 '법통'이라 했습니다.
- 총노회
- 1952년 9월 11일 진주에서 조직된 회의체. 총회를 이루기 전의 단계로, 1956년에 총회로 개편되었습니다. 고신은 이 총노회를 제1회로 셉니다.
합동과 분열의 말
- 승동측
- 1959년 장로교가 갈라질 때 서울 승동교회에 모인 쪽. 뒤의 예장 합동입니다. 다른 쪽은 연동교회에 모여 연동측이라 했고 뒤의 예장 통합입니다.
- 환원
- 1960년 승동측과 합쳤던 고신이 1963년에 본래의 교단으로 돌아간 일.
- 복교
- 합동으로 총회신학교의 부산 분교가 되었던 고려신학교를 다시 독립된 학교로 되돌린 일. 1962년 10월 한상동이 선언했습니다.
- 자숙
- 1963년 환원총회에서 합동을 이끌었던 지도자들이 사과하고 1년 동안 삼가기로 한 결의.
- 반고소
- 신자가 신자를 사회 법정에 고소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 1976년 이 입장에 선 사람들이 고려 총회를 세웠고, 그래서 고려측을 '반고소 고려'라고도 불렀습니다.
신학과 제도
- 개혁주의
- 칼뱅의 신학을 잇는 전통. 한국에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엄격히 지키려는 장로교 교단들이 자기 정체성으로 내세웁니다.
-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 17세기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만든 신앙고백, 대·소요리문답, 예배모범 등. 고신은 여기에 권징조례를 더해 교단의 표준으로 삼습니다.
- 당회 · 노회 · 총회
- 장로교의 세 단계 회의. 당회는 한 교회의 목사와 장로, 노회는 한 지역의 목사와 장로 대표, 총회는 전국의 대표로 이루어집니다.
- WCC (세계교회협의회)
- 1948년에 세워진 국제 교회 연합 기구. 고신은 총회의 WCC 가입을 처음부터 비판했습니다.
- 학생신앙운동 (SFC)
- 1947년 부산에서 시작된 고신 교단의 학생 운동. 지금도 교단의 청소년·대학생 사역을 맡습니다.
이 글을 읽는 법
교회사는 자주 갈립니다. 같은 일을 두고 날짜가 다르고 설명이 다릅니다. 이 글은 그럴 때 한쪽을 고르지 않고 양쪽을 나란히 적었습니다. 확인하지 못한 것은 채우지 않고 확인하지 못했다고 적었습니다. 평양 장대현교회 통사를 정리할 때 쓴 방식을 따랐습니다.
자료 표시
- 백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항목. 집필자와 참고문헌이 밝혀져 있습니다.
- 교단지
- 고신뉴스 KNC의 역사 연재. 총회록과 당시 문서를 인용하지만 교단 안의 시각입니다.
- 언론
- 교계 신문과 인터넷 매체의 보도.
- 학술
- 논문과 연구서. 이번에는 서지와 초록, 이를 인용한 기사로만 확인했습니다.
- 증언
- 가까이에서 본 사람의 회고. 귀하지만 한 사람의 기억입니다.
여기는 갈립니다자료끼리 어긋나는 자리입니다. 양쪽을 다 적고 어느 쪽도 확정하지 않습니다.
가장 단단한 사실여러 종류의 자료가 같게 적어, 이 글에서 가장 흔들리지 않는 대목입니다.
여기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자료를 찾지 못한 자리입니다. 짐작으로 채우지 않았습니다.
박윤선과 고신 탭에는 문장마다 자료 표시를 붙였습니다. 교단사와 형성 과정 탭은 문장마다 붙이지 않았고, 근거는 아래 출처 목록에 있습니다.
갈리는 곳 한눈에
| 무엇이 | 한쪽 | 다른 쪽 |
| 1938년 총회 개회일 | 9월 9일 | 9월 10일 |
| 한상동의 월남 | 1946년 5월 (백과사전) | 1946년 4월 (허순길의 회고) |
| 진해 신학 강좌 기간 | 6월부터 8월까지 석 달 (백과사전) | 6월 23일부터 8월 10일까지 약 두 달 (허순길의 회고) |
| 총노회 조직일 | 1952년 9월 11일 (백과사전) | 1952년 9월 16일 (허순길의 회고) |
| 고려신학교가 1956년에 옮긴 곳 | 송도 교정 (교단지) | 지금의 자리 (백과사전 고신대학교 항목) |
| 박윤선이 떠난 까닭 | 주일성수 문제 (교단지, 허순길) | 설명 없이 사임했다고만 적음 (백과사전) |
| 1960년 합동 총회 장소 | 승동교회 | 흥천교회 (교단지) |
| 고려신학대학이 된 해 | 1970년 승격 | 1971년 인가 |
| 고려측 분립 | 1975년, 제24회 총회 | 1976년, 제26회 총회 |
| 교세 | 2023년 교인 38만여 명 (백과사전) | 2019년 약 46만 명, 2015년 통합 직후 55만 명 (다른 자료) |
| 경남노회장의 이름 | 김길창 | 김길장 (백과사전 주남선 항목) |
| 형성 과정에 대한 평가 | 신사참배 항거자들이 세운 교단 | 교단 분열의 계기. "교인쟁탈전"이라는 비판 |
확인하지 못한 것
여기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 총노회가 모인 교회의 이름. 백과사전은 "진주"까지만 적습니다.
- 출옥성도 17명 전원의 이름.
- 이약신의 생몰 연도.
- 1947–48년 박형룡이 사임한 정확한 날짜.
- 1956년 박윤선이 내놓았다는 네 가지 과제의 내용.
- 합동, 통합, 기장에 관한 비교표의 칸. 이번에 따로 조사하지 않았습니다.
더 정확히 하려면
- 가장 먼저 볼 책
-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 70년사』(총회출판국, 2022). 교단이 스스로 정리한 통사입니다.
- 교단 밖의 시각
- 양낙흥 『한국장로교회사』(생명의말씀사, 2008), 이상규 『해방 전후 한국장로교회의 역사와 신학』(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5), 김양선 『한국기독교해방십년사』(1956).
- 집에서 읽을 수 있는 것
- 고신뉴스 KNC의 "고신교회 70년 역사 산책"과 "고신총회의 역사문서" 연재. 총회록과 당시 문서를 길게 인용합니다.
- 1차 자료
- 총회 회의록, 『파수군』과 『기독교보』의 당시 호. 이번에는 보지 못했습니다.
- 인물
- 주남선은 심군식 『해와 같이 빛나리』(1976), 박윤선은 별도 글 「정암 박윤선」의 자료 목록.
이 글의 한계
- 1차 자료를 보지 않았습니다. 총회 회의록과 당시 간행물은 교단지 기사가 인용한 것을 다시 옮긴 것입니다.
- 교단 안의 자료가 많습니다. 경과를 가장 자세히 전하는 것이 고신뉴스의 연재여서, 고신 쪽의 설명이 더 자세하게 실렸습니다. 당시 총회 쪽과 승동측의 설명은 짧습니다.
- 책과 논문은 읽지 못했습니다. 자료 목록의 책과 논문은 서지로만 확인했습니다.
- 해석이 들어간 곳이 있습니다. 교단 비교 탭의 "변화에 대한 태도", 박윤선과 고신 탭의 "떠난 뒤 고신에 남은 것" 같은 대목은 정리자의 해석입니다.
- 살아 있는 사람이 관련된 대목이 있습니다. 『목사의 딸』을 둘러싼 일은 보도된 범위에서만 적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