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BYTERIAN CHURCH OF KOREA (TONGHAP) · 1884–2026
한국 장로교 통합측 교회사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이 걸어온 길을 다섯 시기로 나누어 정리했습니다. 네 선교부가 함께 세운 한국 장로교회에서 출발하여 고신과 기장이 갈라지고, 1959년 합동과 갈라진 뒤 지금에 이르기까지입니다.
정리 2026-10-11 · 한국 안의 역사가 중심 · 통합 총회 누리집과 합동 쪽 글, 언론 보도에서 확인되는 만큼 옮김
선교와 총회세 번의 분열WCC여성 안수
한눈에 보기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은 한국에서 가장 큰 장로교단 둘 가운데 하나입니다. 흔히 '예장 통합' 또는 '통합측'이라 부릅니다. 1885년 언더우드의 입국에서 시작된 한국 장로교회의 한 줄기이며, 1959년 제44회 총회에서 지금의 합동측과 갈라진 뒤 '통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글은 한국 안의 역사를 중심으로 정리했습니다. 한국 장로교회는 미국 북장로교, 미국 남장로교, 호주 장로교, 캐나다 장로교, 이 네 선교부가 들어와 함께 세운 교회입니다. 장로교 자체의 뿌리(칼뱅과 스코틀랜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는 장로교회의 역사와 체계에 정리했습니다.
고신 교인이 먼저 알아 둘 것. 통합, 합동, 고신, 기장은 1952년까지 하나의 총회였습니다. 1952년에 고신이, 1953년에 기장이, 1959년에 통합과 합동이 서로 갈라졌습니다. 그러므로 1952년까지의 역사는 네 교단이 함께 가진 역사이고, 이 글의 앞부분도 그렇습니다. 통합이 다른 장로교단과 뚜렷이 다른 점은 세계교회협의회(WCC)에 참여하는 것, 1994년에 여성 안수를 허락한 것, 스스로 지은 신앙고백서를 가진 것입니다.
다섯 시기는 이 글의 탭과 같습니다. ③은 한 해 남짓의 일이지만 지금의 통합측이 만들어진 때여서 따로 한 탭으로 다루었습니다.
여성 안수를 허락했고, WCC 총회를 부산에 유치했으며, 명성교회 세습 문제로 흔들렸고, 교세가 줄고 있음
1994 여성 안수, 2002 21세기 신앙고백서, 2013 WCC 부산 총회, 2019 명성교회 수습안
항목
지금의 모습
근거
이름
대한예수교장로회 (다른 장로교단과 구별할 때 '통합')
총회 누리집
본부
서울 종로구 연지동 총회창립 100주년 기념관 (2019년 입주)
총회 누리집
교세
2,140,910명, 9,415 교회, 69 노회 (2025년 말 결산)
총회 통계위원회
총회장
권위영 목사 (2026년 9월 제111회 총회, 서울 도림교회)
총회 누리집 「총회임원」
신학교
장로회신학대학교를 비롯한 총회 직영 신학대학교 7곳
총회 누리집
받는 신앙고백
사도신경, 12신조, 요리문답,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986년과 2002년에 스스로 지은 신앙고백서
총회 헌법 제1편
① 뿌리 (1884–1945)
이 탭의 핵심
미국 북장로교, 미국 남장로교, 호주 장로교, 캐나다 장로교의 선교사들이 함께 하나의 한국 장로교회를 세웠고, 그 교회가 일제 말에 신사참배를 결의한 뒤 해산된 시기입니다. 통합, 합동, 고신, 기장이 함께 가진 역사입니다.
때
1884년 알렌의 입국에서 1945년 해방까지
핵심 내용
네 선교부의 지역 분담, 네비우스 방법, 1907년 대부흥과 독노회, 1912년 총회 창립, 1938년 신사참배 결의, 1942년 마지막 총회
사람
알렌, 언더우드, 마포삼열(마펫), 서상륜과 서경조, 길선주, 이기풍, 주기철
통합 자신의 서술
총회 누리집은 1938년 총회에서 총회장이 반대를 묻지 않고 만장일치 가결을 선언했다고 적습니다
선교사가 오기 전과 온 뒤
총회 누리집의 연혁은 1876년 만주에서 백홍준 등 네 사람이 믿고 세례받은 일에서 시작합니다.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만주에서 한국 사람이 먼저 복음을 받아들였고, 1884년에는 황해도 장연의 솔내(소래)에 교회가 섰습니다. 선교사는 그 뒤에 들어왔습니다.
1876
백홍준 등 네 사람이 만주에서 믿고 세례받음
1884
황해도 장연에 솔내(소래)교회가 섬. 세운 사람을 총회 연혁은 서상륜으로, 같은 누리집의 역사 서술은 1883년 소래로 옮겨 온 서경조로 적음
1884.09.20
미국 북장로교 의료 선교사 알렌이 제물포에 도착함
1885.04.05
언더우드 목사가 제물포에 도착함. 제중원의 화학 교사로 일을 시작함
1886.07.11
언더우드가 노춘경에게 국내에서 첫 세례를 줌
1887.09.27
새문안교회(정동교회)가 섬. 세례교인 14명, 장로 2명(서상륜, 백홍준)
1889–1891
호주 장로교 선교사 데이비스가 들어왔으나 곧 세상을 떠남. 1891년 부산에서 호주 선교가 본격화됨
1892.10.18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레이놀즈, 전킨, 테이트 등)이 들어와 전라도를 맡음
1893.01.28
장로회선교공의회 조직. 네비우스 방법(스스로 전도하고, 스스로 운영하고, 스스로 다스림)을 받아들임
1893–1894
곤당골교회(승동교회)와 연못골교회(연동교회)가 섬. 1959년에 갈라진 두 총회가 모인 곳이 이 두 교회임
1898.09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가 정식으로 들어와 함경도를 맡음
1901.05.15
평양에 장로회신학교가 섬
1907.01.14
평양 장대현교회 남자 사경회에서 대부흥이 시작됨
1907.09.17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독노회 조직. 회장 마포삼열. 첫 한국인 목사 일곱 사람(서경조, 한석진, 송인서, 양전백, 방기창, 길선주, 이기풍)이 안수받고, 이기풍을 제주에 선교사로 보냄. 12신조를 채택함
1909
장로교와 감리교가 선교 지역을 나누는 협정을 맺음
1911–1912
일곱 노회가 조직됨(전라, 경기충청, 황해, 경상, 함경, 남평안, 북평안)
1912.09.01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창립. 총대는 목사 96명(선교사 44, 한국인 52)과 장로 125명. 초대 총회장 언더우드. 중국 산동에 선교사 세 사람을 보내기로 함
장로교와 감리교의 선교 지역 분할을 통합 총회 누리집은 1909년으로, 감리회 누리집은 1893년으로 적습니다. 처음 협의한 때와 협정이 마무리된 때를 각각 적은 것일 수 있으나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1912년 창립 총회의 장소도 총회 누리집 안에서 '평양 여자성경학원', '평양 장로회신학교'로 다르게 적혀 있습니다.
일제 아래에서
1933.09
제22회 총회가 이용도 등의 단체에 '미혹되지 말라'는 통첩을 보냄. 같은 총회에서 여성 안수의 필요성이 처음 제기됨
1934–1935
창세기의 저자 문제, 여성의 치리권 청원, 아빙돈 주석 사건으로 신학 논쟁이 일어남
1938.02.09
평북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함. 9월 총회까지 23개 노회 가운데 17개 노회가 결의함
1938.09.10
제27회 총회(평양 서문밖교회, 총회장 홍택기)가 신사참배를 결의함. 총대 206명. 총회장이 반대 의견을 묻지 않고 만장일치 가결을 선언했고, 총대들이 평양 신사에 참배함
1938.09.20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평양 장로회신학교가 문을 닫음
1940.09.12
제29회 총회가 서울의 조선신학교를 인준함
1942.10.16
일제 강점기의 마지막 총회(제31회). 한 해 사이에 교회 750곳, 교인 76,747명이 줄었다고 보고됨
1943.05.07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으로 개편됨
1945.07.19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합됨
총회 누리집은 이 시기에 저항한 사람으로 주기철, 최봉석, 이기선, 한상동, 이원영, 손양원을 들고, 50여 명이 옥에서 숨졌다고 적습니다. 이 가운데 한상동은 해방 뒤 고려신학교를 세우고 고신 교단의 중심이 됩니다. 평양 장대현교회와 대부흥, 그 뒤의 일은 평양 대부흥운동의 시작과 끝에 자세히 정리했습니다.
② 해방과 분열 (1945–1959)
이 탭의 핵심
해방 뒤 총회를 다시 세웠으나, 신사참배의 청산 문제로 고신이, 성경관과 신학교 문제로 기장이 갈라져 나간 시기입니다.
때
1945년 해방에서 1958년까지
핵심 내용
1946년 남부총회, 1947년 총회 재건, 신학교 셋(고려신학교, 조선신학교, 장로회신학교)의 갈등, 1952년 고신 분립, 1953년 기장 분립, 1954년 신사참배 결의 취소 성명
사람
한상동, 박형룡, 김재준, 이원영, 한경직
통합 자신의 서술
총회 누리집은 "신사참배에 동참했던 목회자들이 다수인데다 해방 후 이들이 교권을 확보하면서 신앙정화운동은 좌절됐다"고 스스로 적습니다
1945.09.08
남쪽 교회들이 '조선교단' 남부대회로 새문안교회에 모임
1945.09.20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출옥 성도들이 교회 재건의 기본 원칙을 발표함. 신사참배한 교역자의 통회와 자숙을 요구하는 내용
제33회 총회(대구제일교회, 총회장 이자익)로 총회를 다시 세움. 이 총회에 조선신학교 학생 51명이 김재준 교수의 신학을 문제 삼는 진정서를 냄. 같은 총회가 WCC 창립 대회에 대표를 보내기로 함
1948.04.20
제34회 총회가 고려신학교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을 밝힘. 박형룡이 고려신학교 교장을 그만두고 서울 남산에서 '장로회신학교'를 시작함
1949.04.22
교단의 이름을 '대한예수교장로회'로 바꿈
1951.05.27
제36회 총회가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의 직영을 모두 취소하고 총회 직영 신학교를 새로 세우기로 함
1952.04
제37회 총회(대구 서문교회). 월남한 이북 10개 노회를 인정하는 비상조치법을 정함. 이북 노회가 총회의 약 40퍼센트가 됨. '고려신학교 및 그 관련 단체와 관계없다'고 다시 밝힘
1952.09.11
경남법통노회가 총노회를 조직함(목사 50, 장로 37). 고신 교단의 시작
1953.04.29
제38회 총회가 김재준 목사를 파면함
1953.06.10
조선신학교 쪽이 서울에서 따로 총회를 엶.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의 시작
1954.04.26
제39회 총회(안동, 총회장 이원영)가 신사참배 결의 취소 성명을 내고 참회 기도를 드림
고신이 갈라진 일을 통합은 어떻게 적는가
통합 총회 누리집의 서술을 따르면 이렇습니다. 출옥 성도들이 세운 고려신학교를 경남노회가 승인했다가 취소했고(1946), 총회가 인정하지 않는다고 밝혔으며(1948), 경남노회가 셋으로 갈라지자 총회는 새로 조직된 경남노회 쪽을 인정했고, 1952년 총회가 고려신학교 쪽과 관계가 없다고 다시 밝히자 그해 9월 경남법통노회가 따로 총노회를 조직했습니다.
눈여겨볼 것은 통합이 이 일을 스스로 어떻게 평가하느냐입니다. 누리집은 신사참배에 동참한 목회자가 다수였고 해방 뒤 이들이 교권을 쥐면서 신앙을 바로잡으려는 운동이 좌절되었다고 적습니다. 그리고 1954년 총회가 출옥 성도인 이원영 목사를 총회장으로 세우고 신사참배 결의 취소 성명을 낸 것을, 떠난 고신을 다시 맞으려는 노력으로 설명합니다.
신사참배 결의 취소는 총회 연혁에 두 번 나옵니다. 1946년 남부총회와 1954년 제39회 총회입니다. 고신이 갈라진 때는 자료에 따라 1951년, 1952년 9월, 1952년 10월로 다르게 적히며, 이 글은 통합 총회 누리집의 1952년 9월 11일을 적었습니다. 고신 쪽의 서술은 한국 고신교회사에 있습니다.
기장이 갈라진 일
조선신학교의 김재준 교수가 성경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1947년 학생 51명이 진정서를 냈고, 총회는 여러 해의 조사와 논쟁 끝에 1953년 그를 파면했습니다. 조선신학교 쪽은 이에 따르지 않고 같은 해 6월 따로 총회를 열어 한국기독교장로회가 되었습니다. 총회 누리집은 한 곳에서는 1952년 제37회 총회가 목사직을 박탈하고 1953년에 다시 확인했다고 적고, 다른 곳에서는 1953년 제38회 총회가 파면했다고 적습니다.
③ 1959년: 통합과 합동이 갈라지다
이 탭의 핵심
1959년 9월 대전에서 열린 제44회 총회가 경기노회 총대 문제로 멈추었고, 한쪽은 서울 연동교회에서, 다른 쪽은 서울 승동교회에서 따로 총회를 이어 갔습니다. 연동 쪽이 지금의 통합, 승동 쪽이 지금의 합동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쟁점
경기노회가 보낸 총대 명단이 둘이었고, 어느 쪽을 받을지를 두고 총회가 멈춤
밑에 깔린 쟁점
세계교회협의회(WCC)에 계속 참여할 것인가. 그리고 1958년 신학교 교장 박형룡이 물러나게 된 '3천만 환 사건'
이름의 유래
'연동측', '승동측'은 따로 모인 교회의 이름. '통합'은 1960년 2월 총회가 다시 합치려고 낸 '통합안'에서, '합동'은 승동측이 고신과 합한 데서 나옴
밝혀 둘 것
무엇이 주된 원인이었는지를 두 교단이 다르게 설명합니다. 이 글은 양쪽 설명을 따로 적었습니다
배경 두 가지
WCC 문제. 총회는 1947년에 WCC 창립 대회에 대표를 보내기로 했고 1948년 암스테르담 대회에 대표가 참석했습니다. 1954년 미국 에번스턴 대회에 다녀온 두 대표의 보고가 서로 달랐습니다. 1956년 총회는 에큐메니칼 연구위원 여덟 사람을 세웠는데, 한경직, 전필순, 유호준, 안광국은 참여를 지지하는 쪽이었고 박형룡, 박병훈, 황은균, 정규오는 반대하는 쪽이었습니다. 1957년 총회는 "친선과 협조를 위한 운동에는 계속 참가하고, 하나의 교회를 만들려는 운동에는 반대한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1958년 총회에는 WCC 탈퇴 건의서가 들어왔으나 회의에 올려지지 않았습니다.
3천만 환 사건. 총회신학교가 서울 남산에 터를 마련하려던 과정에서 생긴 일입니다. 합동 쪽 학자의 글에 따르면, 학교의 총무과장이 박형룡 교장의 결재를 받아 이사회의 승낙 없이 한 사람에게 30,162,172환을 건넸는데 사기로 드러났습니다. 1958년 3월 이사회가 박형룡 교장의 사표를 받았습니다.
날짜 순으로
1959.04.09–11
총회장과 임원, 전 총회장들이 승동교회에 모여 네 가지에 합의하고 해명서를 냄. 칼뱅주의 신조를 지킨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친선과 사업에 한한다, 공산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을 배격한다, WCC가 신앙에 해가 되면 관계를 끊는다는 내용
1959.05
경기노회 정기노회가 총회에 보낼 총대 28명을 뽑음. 경기노회는 총대를 가장 많이 보내는 노회였음. 한 사람이 빠진 문제로 다시 뽑자는 요구가 나옴
1959.06–07
경기노회 임시노회(승동교회)가 총대 28명을 다시 뽑음. 먼저 뽑힌 쪽은 참석하지 않음. 그래서 총대 명단이 둘이 됨
1959.08.03–09
전북 부안 격포에서 호남 지역 열 노회의 목사 수양회가 열리고, 8월 7일 'WCC 탈퇴 성명서'가 나옴
1959.09.24
저녁 7시 대전중앙교회에서 제44회 총회가 열림. 경기노회가 낸 총대 명단 둘 때문에 회원을 부르는 단계에서 막힘
1959.09.25
양쪽의 설명을 듣고 투표하여 임시노회 쪽 총대를 받기로 함(124 대 119, 기권 5)
1959.09.26–27
정기노회 쪽이 낸 소원이 살아 있다는 선언으로 회의가 다시 멈춤
1959.09.28
전 총회장들의 안(11월 24일 저녁 7시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다시 모이고, 그때까지 경기노회 총대를 다시 뽑아 온다)을 총회장 노진현이 가결되었다고 선포함. 안광국 목사가 단에 올라 임원 불신임안을 읽음. 총회장이 11월 24일까지 정회를 선포하고 내려옴
1959.09.29
오전 10시 서울 연동교회에서 한쪽이 총회를 이어 감(연동측). 임시 회장 전필순, 총회장 이창규. 통합 쪽 기록으로 총대 284명 가운데 154명. 결의: 복음주의협회(NAE) 탈퇴, WCC에 대표 보내기를 멈춤
1959.09.30
대전 총회의 임원회와 노진현 총회장이 연동의 모임을 불법이라고 성명함
1959.11.06
미국 연합장로교, 미국 남장로교, 호주 장로교의 세 선교회가 '3년 동안 WCC 관계를 멈추고 양쪽이 화합하라'고 촉구함
1959.11.24
서울 승동교회에서 다른 쪽이 총회를 이어 감(승동측). 본래 정한 새문안교회가 연동 쪽이 되어 장소를 바꿈. 선교사들은 참석하지 않음. 총회장 양화석. 합동 쪽 글로는 27개 노회 209명. 결의: WCC 영구 탈퇴와 에큐메니칼 운동 반대, NAE 탈퇴
1960.01.14
남장로교 선교부가 주선하여 양쪽이 만남. 연동측은 WCC 탈퇴는 받아들이되 에큐메니칼 운동을 모두 그만두는 것은 거부함. 다음 날 승동측이 '최종안은 변함없다'고 알림
1960.02.17–19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통합' 총회. 사회 한경직, 총회장 이창규. 'WCC는 공산주의를 받아들이는 것도 새 신학도 하나의 교회를 만들려는 운동도 아니지만 화합을 위하여 탈퇴한다'는 것을 비롯한 여덟 조항의 '통합안'을 결의함
1960.07.30
승동측이 낸 소송을 서울지방법원이 받아들이지 않음
1960.09
제45회 총회(영락교회)가 승동측과 화합하려고 개회를 미루고 위원 일곱 사람을 보냈으나 거절당함
1962.09
제47회 총회가 'WCC 탈퇴를 다시 확인'하며 합동측과 세 차례 만났으나 결렬됨
1969.09
제54회 총회(영락교회)가 WCC에 다시 가입하기로 결의함. 그 뒤 합동과의 공식 교류가 끊김
날짜와 숫자가 자료마다 다릅니다. 경기노회 정기노회는 통합 쪽 5월 29일, 합동 쪽 5월 14일. 임시노회는 통합 쪽 7월 9일, 합동 쪽 6월 29일. 정회를 선포한 날은 통합 쪽과 합동 쪽 학자 한 사람은 9월 28일, 합동 쪽 다른 필자는 넷째 날(9월 27일). 대전 총회의 총대 수는 284명, 254명, 286명으로 적은 자료가 각각 있습니다. 1960년 2월 총회의 기간도 총회 누리집 안에서 17–19일과 17–20일로 다릅니다.
무엇 때문에 갈라졌는가: 두 교단의 설명
쟁점
통합 쪽 설명
합동 쪽 설명
주된 원인
박형룡 교장이 학교 재정을 사기당한 3천만 환 사건이 결정적이었고, WCC에 대한 신학적 인식의 차이는 부차적이었다. 박형룡을 지지하는 이들이 사표를 받은 쪽을 '에큐메니칼을 지지하는 새 신학, 용공주의자'로 비난하면서 번졌다
첫째 원인은 WCC와 에큐메니칼 문제다. 지지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의 대립은 1954년부터 있었고 3천만 환 사건보다 앞선다
3천만 환 사건
분열의 발단
1958년에 사표로 이미 끝난 일이며 대립을 빠르게 했을 뿐이다
9월 28일의 정회
총회장이 고쳐 낸 안을 먼저 묻지 않고 본래 안만 물어 가결을 선포한 절차의 잘못이 있었다
전 총회장들에게 맡긴 안을 총회장이 물어 가결한 합법적인 정회였다. 소란할 때 총회장은 직권으로 정회할 수 있다
불신임안
전 총회장 전필순 목사가 물으니 회중이 '예'라고 답했다(통합 총회록)
안광국 목사가 스스로 물어 몇 사람의 호응을 받은 것으로 불법이다
누가 먼저 갈라섰나
정회에 항의한 총대들이 회의장에서 밀려난 뒤 서울에서 총회를 이어 갔다
먼저 따로 모인 쪽은 연동측이므로 분열의 주도는 연동측에 있다
선교사
(통합 쪽의 반론은 확인하지 못함)
선교사 23명이 임시노회 쪽에 표를 던졌다. 미국 선교부가 뒤에서 움직였다는 주장도 있다
제3의 설명들
합동의 교단 신문에 실린 한 글은 출신 지역을 듭니다. 합동 쪽은 황해도 출신이, 통합 쪽은 평안도 출신이 주류였고 두 쪽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학술 논문의 초록 가운데는 교권 다툼과 WCC를 둘러싼 신학 논쟁이 함께 작용했다고 정리한 것이 있습니다(본문은 읽지 못하고 초록을 검색 요약으로 보았습니다).
합동 쪽 학자의 글은 통합 쪽 학자들과 고신의 교회사 책도 3천만 환 사건을 발단으로 본다고 전합니다.
통합 쪽 설명은 총회 누리집의 역사 서술을, 합동 쪽 설명은 총신대학교 교수의 글(코람데오닷컴, 2009)과 합동 쪽 목사의 글(리폼드뉴스, 2011)을 따랐습니다. 합동 쪽에서 본 이 일의 서술은 한국 장로교 합동측 교회사에도 적었습니다.
④ 성장기 (1960–1980년대)
이 탭의 핵심
갈라진 뒤 따로 선 교단이 교회 개척 운동으로 크게 자랐고, WCC에 다시 들어갔으며, 사회 문제에 목소리를 내고, 처음으로 스스로 신앙고백서를 지은 시기입니다.
때
1960년 통합총회에서 1980년대 말까지
핵심 내용
1969년 WCC 재가입, 1974년 '교회 개척의 해'와 5천 교회 150만 신도 운동, 1984년 선교 100주년, 1986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
사회와 만난 자리
1972년 한국교회선언문, 1978년 도시산업선교 원리와 지침, 1987년 호헌 조치 철폐를 촉구한 목회 서신과 기도회
스스로 밝힌 신학
1985년 장로회신학대학 교수들의 신학 성명: '복음적이며 성경적', '개혁주의적이며 에큐메니칼'
1960.02
장로회신학대학이 정부의 인가를 받음. 서울 광장동에 터를 사서 9월에 옮김
1961.01.05
총회은급금운용위원회(지금의 총회연금재단)가 세워짐
1961.09
제46회 총회에 여전도회가 여성 안수를 청원함
1964–1965
'3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 민족 복음화 운동
1969.09
WCC에 다시 가입함. 주일학교를 '교회학교'로 고쳐 부름
1971
제56회 총회가 여성 장로 제도를 표결했으나 부결됨. 그 뒤로도 네 번 더 부결됨
1972.09.25
제57회 총회(서울 동신교회)가 '한국교회선언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함
1973
한국, 미국, 호주 장로교회가 상호 협정을 맺음. 선교받는 교회에서 동등한 동역자가 됨. 총회유지재단이 세워짐
1974.09
제59회 총회가 '교회 개척의 해'를 정하고 300 교회 개척을 결의함. 뒤에 5천 교회 150만 신도 운동으로 넓어짐
1977
제62회 총회가 북한전도주일(6월 넷째 주일)을 정함
1978–1980
제63회 총회가 '도시산업선교 원리 및 지침'을 확정하고, 제65회 총회가 산업선교에 대한 입장을 밝힘
1984
8월 31일 서울 연지동에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이 문을 엶. 9월 선교 100주년 기념대회, 선교사 384명 파송 운동 결의
1985.09.10
장로회신학대학 교수들이 일곱 명제의 '신학 성명'을 냄
1986.09.29
제71회 총회(영락교회)가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를 선포함
1987.05–06
4·13 호헌 조치의 철폐를 요구하는 목회 서신. 6월 7일 전국 '나라를 위한 기도회', 6월 22–23일 새문안교회 기도회
WCC를 떠났다가 돌아가다
통합은 1960년 2월 총회에서 WCC를 탈퇴했습니다. WCC가 잘못되었다고 보아서가 아니라 갈라진 형제와 다시 합치기 위해서라고 밝혔고, 1962년에도 탈퇴를 다시 확인하며 합동과 세 번 만났습니다. 그러나 합치지 못했고, 1969년에 WCC에 다시 가입했습니다. 총회 누리집은 이때부터 합동과의 공식 교류가 끊겼다고 적습니다. 두 교단이 다시 공식으로 만난 것은 26년 뒤인 1995년입니다.
스스로 지은 신앙고백서
한국 장로교회는 1907년에 12신조를 받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을 써 왔습니다. 통합은 여기에 더해 1986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를 스스로 지어 선포했습니다. 외국에서 받은 고백에 머물지 않고 한국 교회의 자리에서 자기 말로 신앙을 고백하겠다는 뜻입니다. 2002년에는 '21세기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를 더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요리문답만을 교리 표준으로 삼는 고신, 합동과 다른 점입니다.
⑤ 지금까지 (1990년대–현재)
이 탭의 핵심
여성 안수를 허락하고 WCC 총회를 한국에 유치하며 넓어진 교단이, 큰 교회의 세습 문제로 신뢰를 잃고 교세가 줄어드는 가운데 길을 찾는 시기입니다.
때
1990년대에서 지금까지
핵심 내용
1994년 여성 안수 가결과 1996년 첫 여성 장로·목사, 1995년 합동과의 교류 재개, 2002년 21세기 신앙고백서, 2013년 WCC 부산 총회, 2014년 세습 금지 조항, 2017–2019년 명성교회 문제
교세
2010년 300만 명을 넘었다고 보고했으나 2025년 말 2,140,910명. 2016년부터 10년 사이 약 59만 명이 줄어듦
가장 최근 총회
2026년 9월 제111회(서울 도림교회, 총회장 권위영)
1992.09
제77회 총회(명성교회)가 '1만 교회 400만 신도' 운동을 채택함
1994.02.21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당시 KNCC)의 개혁을 요구하며 관계를 미루겠다고 알림. 뒤에 대화를 거쳐 돌아옴
1994.09
제79회 총회(소망교회)가 여성 안수를 가결함. 투표 1,321명 가운데 찬성 701, 반대 612, 기권 8
1995.01–02
첫 신년 하례회에서 통합과 합동의 총회장이 서로 축사함. 갈라진 뒤 첫 공식 교류. 2월 28일 두 교단 임원이 처음 공식으로 만남
1995.03–05
여성 안수 헌법 개정안을 51개 노회에 물어 통과됨
1996.04.28
첫 여성 장로 박숙란(서울노회 안동교회)
1996.10.08
첫 여성 목사 박진숙(울산노회). 그해 9월 여성 77명이 목사 고시에 합격함
1999
합동과 '장로교 화합과 일치 포럼'(3월), 강단 교류 구국 기도회(7월)
2002.09.12
제87회 총회가 '21세기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를 교리편에 더하여 공포함. '생명 살리기 운동 10년'을 선포함
2008.09
제93회 총회(제주). 300만 성도 운동을 시작하고 장로 부총회장 제도를 새로 둠. 통합, 합동, 합신, 기장이 '제주 선교 100주년 장로교 연합 감사예배'를 드림
통합 총회 누리집은 여성 안수의 필요성이 처음 제기된 때를 1933년 제22회 총회로 적습니다. 1961년 여전도회가 청원했고, 1971년부터 여성 장로 제도가 다섯 번 부결되었습니다. 1994년 제79회 총회가 찬성 701 대 반대 612로 가결했고, 이듬해 노회들에 물어 통과되었으며, 1996년에 첫 여성 장로와 첫 여성 목사가 나왔습니다. 처음 말이 나온 때부터 63년이 걸렸습니다.
그 뒤의 과제도 남아 있습니다. 노회마다 여성 총대를 한 사람 이상 보내도록 하는 안이 2025년 제110회 총회에서 494 대 496으로, 2026년 제111회 총회에서는 찬성이 많았으나 필요한 3분의 2에 못 미쳐 부결되었습니다. 제111회 총회의 여성 총대는 1,400여 명 가운데 54명이었다고 보도되었습니다.
노회 수의의 찬성 비율을 총회 누리집은 목사 자격 73.8퍼센트, 장로 자격 74.4퍼센트로 적는데, 함께 적힌 표수(8,060표 가운데 5,546표)로 셈하면 목사 자격은 68.8퍼센트입니다. 어느 숫자가 틀렸는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고신에서 이 문제가 놓인 자리는 고신은 왜 여성 목사 안수를 부정하는가에 있습니다.
명성교회 세습 문제 (2017–2019)
통합은 헌법에 목회 세습을 막는 조항을 두고 있습니다. 정치 제28조 6항은 그 교회에서 사임하거나 은퇴하는 위임목사나 담임목사의 배우자, 직계비속, 그 직계비속의 배우자를 위임목사나 담임목사로 청빙할 수 없다고 정합니다. 그런데 교단에서 가장 큰 교회 가운데 하나인 명성교회가 은퇴한 목사의 아들을 담임으로 세웠습니다.
그 뒤의 일은 이렇게 보도되었습니다. 총회 재판국이 청빙이 유효하다고 판결했고, 2018년 제103회 총회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재판국원 열다섯 사람을 모두 바꾸었습니다. 2019년 8월 새 재판국은 청빙이 무효라고 판결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 뒤인 2019년 9월 26일 제104회 총회가 '수습안'을 가결했습니다. 총대 1,204명 가운데 920명이 찬성했습니다. 아들 목사가 2021년 1월 1일 뒤에는 위임목사직을 맡을 수 있게 하고, 노회와 교회가 공개 사과하며, 재판국의 판결과 세습 금지 조항은 그대로 두되, 이 수습안에 대해서는 교회법으로도 나라의 법으로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고 전해집니다.
평가가 갈리는 곳
비판하는 쪽. 교회개혁 단체는 이 수습안이 법을 그대로 둔 채 법을 어긴 결과를 받아들인 것으로, "정의도 없고 상식도 없다"고 비판했습니다.
수습안을 낸 쪽. 총회가 이 결정을 어떻게 설명했는지를 총회 쪽 자료로 읽지 못했습니다. 위의 수습안 내용도 비판하는 쪽의 대담 기사를 거쳐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대목은 한쪽 자료에 기대고 있습니다.
2017년 청빙과 위임식의 날짜, 2018년 재판국의 표결, 수습안의 전문, 나라 법원의 마지막 판결 날짜는 직접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세습 금지 조항은 지금도 헌법에 있습니다.
최근의 총회
제110회 (2025년 9월, 영락교회). 재판국원 교체, 판결문에 소수 의견을 적도록 한 것, 일곱 신학대학교를 합치는 문제를 한 해 더 연구하기로 한 것, 여성 총대 파송안 부결이 보도되었습니다.
제111회 (2026년 9월, 도림교회). 목사 부총회장에 김한호 목사, 장로 부총회장에 박기상 장로가 뽑혔습니다. 한 정치 목사에게 '이단성이 있다'는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의 보고서를 채택했습니다(찬성 642, 반대 364). 2027년 평양 대부흥 120주년을 맞아 회개와 말씀과 기도의 운동을 벌이기로 했습니다. 다음 총회는 2027년 9월 소망교회에서 열립니다.
지금의 모습: 교세, 조직, 신학교
이 탭의 핵심
69개 노회, 9,415 교회, 2,140,910명의 교단입니다(2025년 말). 총회장은 해마다 바뀌고 부총회장이 이어받습니다. 총회가 직접 운영하는 신학대학교가 일곱 곳입니다.
교세의 흐름
2016년 273만 명에서 2025년 214만 명으로, 10년 사이 약 59만 명(21.6퍼센트)이 줄었습니다. 교회와 목사의 수는 2022–2023년까지 늘다가 꺾였습니다
총회 통계위원회의 표를 옮겼습니다. 그해 말의 결산을 이듬해 총회에 보고한 숫자입니다. 통계를 넣지 않은 교회 39곳은 빠져 있습니다. 통계위원회는 교인이 주는 까닭으로 사회의 신뢰를 되찾지 못한 것과 다음 세대 전도의 어려움을 들었다고 보도되었습니다. 2025년 말 기준으로 통합의 교인 수(2,140,910명)가 합동(2,116,250명)을 조금 앞선 것으로 보도되었습니다.
총회의 짜임
총회장. 해마다 바뀝니다. 부총회장이 다음 해 총회장을 이어받는 것으로 보도됩니다(이를 정한 조문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2008년부터 장로 부총회장을 따로 둡니다.
총대. 정원 1,500명으로 목사와 장로가 같은 수입니다. 노회마다 기본 8명을 보내고 세례교인 수에 따라 더 보냅니다.
숭실대, 연세대, 서울여대, 한남대, 계명대 등과 광주기독병원, 동산의료원, 일신기독병원 등이 누리집에 올라 있음
'유관'이 이사를 보내는 관계인지 역사적 인연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세계선교부가 보낸 선교사의 수, 연금재단의 규모, 여성 목사와 여성 장로의 최신 수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일곱 신학대학교를 합치는 문제가 총회에서 논의되고 있습니다.
신학과 헌법
이 탭의 핵심
통합은 스스로를 '복음적이며 성경적', '개혁주의적이며 에큐메니칼'이라고 밝힙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더해 스스로 지은 신앙고백서 둘을 가지고 있고, 세계 교회와의 연합 운동에 참여합니다.
교리편의 일곱 부분
사도신경, 12신조, 요리문답, 21세기 교리문답,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986년 신앙고백서, 2002년 21세기 신앙고백서
직분
항존직은 목사, 장로, 안수집사, 권사. 임시직은 전도사와 집사. 정년은 70세가 되는 해의 연말
고신과 다른 곳
WCC 참여, 여성 안수, 스스로 지은 신앙고백서, 권사를 항존직에 넣는 것
헌법에 넣은 최근 조항
목회 세습 금지(2014), 동성애에 관한 조항(2017)
헌법 제1편 교리
부
내용
제1부
사도신경
제2부
신조 (12신조, 1907년)
제3부
요리문답
제4부
21세기 대한예수교장로회 교리문답
제5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6부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 (1986년)
제7부
21세기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 (2002년 추가)
제3부의 요리문답이 소요리문답만인지 대요리문답도 포함하는지는 본문을 끝까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직분
헌법 정치 제21–23조는 직원을 항존직과 임시직으로 나눕니다. 항존직은 장로(목사와 장로 두 가지), 안수집사, 권사이며 70세가 되는 해의 연말까지 시무합니다. 임시직은 전도사와 집사이며 임기 1년에 다시 맡을 수 있습니다. 고신 헌법이 권사를 '항존직에 준하는 직원'으로 따로 두는 것과 달리 통합은 권사를 항존직에 넣습니다. 장로교의 직분 전반은 한국교회 4직분론에 정리했습니다.
헌법에 넣은 최근 조항
목회 세습 금지 (정치 제28조 6항, 2014년 12월 8일 신설). 위임목사나 담임목사를 청빙할 때, 그 교회에서 사임하거나 은퇴하는 위임(담임)목사의 배우자와 직계비속과 그 직계비속의 배우자, 그 교회 시무장로의 배우자와 직계비속과 그 직계비속의 배우자는 청빙할 수 없습니다. 다만 자립 대상 교회에는 적용하지 않습니다.
동성애 (헌법시행규정 제26조 12항, 2017년 9월 21일 신설). "동성애자 및 동성애를 지지하고 옹호하는 자는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며 … 교회의 직원 및 신학대학교 교수, 교직원이 될 수 없다."
교회 연합
통합은 세계교회협의회(WCC)의 회원입니다. 1960년에 탈퇴했다가 1969년에 다시 가입했고, 2013년 부산 총회를 유치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에는 1994년에 관계를 미루었다가 돌아왔고, 2025년 11월에는 통합의 총회장이 NCCK의 회장을 맡았다고 보도되었습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에는 2011년에 행정 보류를 알렸습니다. 그 밖에 세계개혁교회연맹, 아시아교회협의회, 세계선교협의회에 참여해 왔습니다.
같은 교단을 다르게 부르는 말
통합은 스스로를 "복음적이며 성경적", "개혁주의적이며 에큐메니칼"이라고 부릅니다(1985년 장로회신학대학 신학 성명).
합동 쪽 글은 통합을 'WCC를 중심으로 교류하는 노선'으로 정리합니다. 고신과 합동이 WCC 참여를 신앙의 순수성을 해치는 일로 보아 온 것과 통합이 그것을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한 일로 보아 온 것, 이 차이가 1959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합동, 고신과 견주면
이 탭의 핵심
통합, 합동, 고신은 같은 뿌리에서 나와 같은 12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가진 장로교회입니다. 갈라진 곳은 신사참배의 청산(고신), 그리고 세계 교회 연합 운동과 여성 안수(통합과 합동·고신)입니다.
갈라진 때
고신 1952년, 기장 1953년, 통합과 합동 1959년
가장 큰 차이
통합은 WCC에 참여하고 여성에게 안수합니다. 합동과 고신은 둘 다 하지 않습니다
밝혀 둘 것
이 표는 각 글에서 따로 확인한 사실을 정리자가 나란히 놓은 것입니다
항목
통합
합동
고신
교인 (가장 최근 보고)
2,140,910명
2,116,250명
379,621명
교회
9,415곳
11,689곳
2,101곳
노회
69
165
35
WCC
회원 (1969년 재가입)
1959년부터 반대
참여하지 않음
여성 안수
1994년 허락, 1996년 첫 여성 장로와 목사
허락하지 않음
허락하지 않음
교리 표준
12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요리문답에 스스로 지은 신앙고백서 둘을 더함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
권사
항존직
(이 글에서 확인하지 않음)
항존직에 준하는 직원
신학교
장로회신학대학교 등 직영 7곳
총신대학교
고려신학대학원
교인과 교회의 수는 합동의 교단 신문이 2026년 9월에 여러 장로교단의 총회 보고를 모아 실은 숫자입니다(통합과 합동은 2025년 말, 고신은 2026년 1월 기준). 노회의 수는 각 교단 자료를 따랐습니다. 고신 칸은 고신교단의 총회와 노회와 고신은 왜 여성 목사 안수를 부정하는가의 내용입니다.
통합과 고신 사이
1952년 고신이 갈라질 때 총회의 다수였던 쪽이 지금의 통합과 합동입니다. 통합 총회 누리집은 그때 신앙을 바로잡으려는 운동이 좌절되었다고 스스로 적습니다.
1954년 총회는 출옥 성도 이원영 목사를 총회장으로 세우고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하는 성명을 냈습니다.
1960년에 고신과 합한 쪽은 통합이 아니라 승동측(합동)입니다. 고신은 1963년에 다시 나왔습니다.
2008년 제주의 장로교 연합 감사예배에는 통합, 합동, 합신, 기장이 함께했고 고신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통합과 고신 사이의 최근 교류에 관한 보도는 찾지 못했습니다.
함께 생각할 물음. 통합은 1960년에 형제와 다시 합치려고 WCC를 떠났다가, 합치지 못하자 1969년에 돌아갔습니다.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 무엇을 내려놓을 수 있고 무엇은 내려놓을 수 없습니까. 통합은 세습을 막는 법을 헌법에 두고도 큰 교회의 세습을 받아들였습니다. 법이 있는 것과 법이 지켜지는 것 사이의 거리는 어느 교단에나 있는 문제가 아닙니까. 통합이 1952년의 일을 두고 "신앙정화운동은 좌절됐다"고 스스로 적은 것을 고신 교인은 어떻게 읽어야 합니까. 이 물음은 정리자가 붙인 것입니다.
자료와 한계
무엇으로 확인했나.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 누리집의 총회 연혁, 역대 총회 표, 설립 배경(제1장–제10장), 통계위원회의 교세 통계표, 총회 임원, 헌법 제1편과 제2편과 시행규정을 2026년 10월 11일에 읽었습니다. 1959년의 일은 합동 쪽 학자인 총신대학교 박용규 교수의 글(코람데오닷컴, 2009)과 소재열 목사의 글(리폼드뉴스, 2011)을 함께 읽어 양쪽 설명을 맞대었습니다. 최근의 일은 노컷뉴스, 가스펠투데이의 기사로 보탰습니다.
통합 자신의 서술이라는 점. 연표의 대부분은 통합 총회 누리집에서 왔습니다. 고신과 기장이 갈라진 일, 1959년의 일은 통합의 눈으로 적힌 것을 옮겼고, 합동 쪽 설명을 따로 달았습니다. 고신 쪽과 기장 쪽의 설명은 각 교단의 글을 보아야 합니다.
읽지 못한 것. 교단 신문인 한국기독공보의 기사는 하나도 열지 못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항목도 읽지 못했습니다. 1959년에 관한 학술 논문은 초록만 검색 요약으로 보았습니다.
확인하지 못한 것. 부총회장이 총회장을 이어받도록 정한 조문. 세습 금지 조항이 총회에서 결의된 해와 표결. 명성교회 문제의 자세한 날짜와 수습안 전문, 총회 쪽의 해명. 여성 목사와 여성 장로의 최신 수. 선교사 수. 한국교회총연합과의 관계. 통합과 고신 사이의 최근 교류.
자료끼리 어긋나는 곳. 1959년 경기노회 정기노회와 임시노회의 날짜, 정회를 선포한 날, 총대의 수. 1960년 2월 통합총회의 기간과 인원. 소래교회를 세운 사람. 1912년 창립 총회의 장소. 김재준 목사를 처분한 총회. 여성 안수 노회 수의의 찬성 비율. 본문의 해당 자리에 적었습니다.
검색 요약으로만 본 것. 2018년 재판국과 총회의 일, 2019년 8월 재판국의 재심 판결, 나라 법원의 판결 흐름, 제110회 총회장의 소속 교회.
해석이 들어간 곳. 처음 말이 나온 때부터 여성 안수까지 63년이 걸렸다는 셈, WCC를 떠났다 돌아간 일의 풀이, 스스로 지은 신앙고백서의 뜻, 세 교단을 견준 표, 마지막의 물음입니다.
사람 이름에 관해. 총회장과 역사에 남은 인물은 자료에 적힌 대로 썼습니다. 최근 분쟁의 당사자는 꼭 필요한 곳이 아니면 이름을 적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