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센병 환자들의 목자였고,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옥에 갇혔으며, 두 아들을 죽이는 데 가담한 청년을 아들로 삼았고, 환자들 곁을 지키다 순교한 손양원 목사의 삶을 정리했습니다. 전해 오는 이야기와 기록으로 확인되는 사실을 가려 적었습니다.
정리 2026-10-11 · 성경 인용은 개역개정 · 『사랑의 원자탄』은 목차와 공개된 발췌까지만 확인
손양원(孫良源, 1902–1950)은 한센병 환자들의 교회인 여수 애양원교회의 목회자였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다섯 해 가까이 옥에 갇혔고, 해방 뒤 두 아들을 잃었으나 아들들을 죽이는 데 가담한 청년을 살려 양아들로 삼았으며, 6·25 때 환자들 곁을 떠나지 않다가 총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삶은 한국 교회에서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삶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만큼 전해 오는 이야기와 기록으로 확인되는 사실이 섞여 있습니다. 이 글은 둘을 가려 적으려 했습니다. 날짜와 숫자가 자료마다 다른 곳이 서른 군데쯤 되어, 본문에 그때그때 밝혔습니다.
| 때 | 일 | 나이 |
|---|---|---|
| 1902 | 경남 함안군 칠원에서 태어남 | |
| 1926 | 부산 감만동 나병원 교회의 전도사가 됨 | 24세 |
| 1938 |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함 | 36세 |
| 1939 | 여수 애양원교회에 부임함 | 37세 |
| 1940.09.25 | 신사참배 거부로 붙잡힘 | 38세 |
| 1945.08.17 | 풀려남 | 43세 |
| 1946.02 | 경남노회에서 목사가 됨 | 43세 |
| 1948.10.21 |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이 순천에서 죽임당함 | 46세 |
| 1950.09.28 | 여수 미평에서 총에 맞아 순교함 | 48세 |
나이는 태어난 해를 뺀 만 나이로 정리자가 셈한 것입니다. 순교 때의 나이를 자료는 47세, 48세, 49세로 다르게 적습니다.
경남 함안의 장로 집안에서 태어나 서울과 도쿄에서 고학했고, 부산의 나병원 교회에서 전도사로 일을 시작했으며,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마치고 여수 애양원으로 갔습니다.
태어난 날은 애양원교회와 함안 쪽 자료가 1902년 6월 3일, 백과사전과 위키백과가 1902년 7월 7일(음력 6월 3일)로 적습니다. 어머니 이름을 한 자료는 김은주로 적습니다. 보통학교에 들어간 해와 졸업한 해, 세례받은 해(1917년과 1919년), 아버지의 형기(8개월과 1년)도 자료마다 다릅니다.
『성서조선』은 김교신이 펴낸 잡지로, 교회 제도 밖의 신앙을 말한 무교회주의의 잡지입니다. 손양원이 이 잡지로 사경회를 인도했다가 교회를 그만두게 된 일은, 그가 교단의 테두리에만 갇힌 사람이 아니었음을 보여 줍니다. 한 연구자는 그의 목사 안수가 늦어진 까닭으로 무교회 사상과 신사참배 거부를 든다고 합니다(서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애양원에 부임한 때를 애양원교회와 나삼진의 글은 1939년 7월 14일, 이상규는 7월 15일, 함안 쪽 자료는 1937년 7월, 백과사전과 위키백과는 1938년으로 적습니다. 이 글은 신학교 졸업(1938년 3월)과 강도사 인허 뒤 열넉 달의 순회 전도와 맞아떨어지는 1939년 7월을 따랐습니다.
애양원에 부임한 뒤의 일은 다음 탭들에 나누어 적었습니다. 애양원과 옥중, 두 아들과 안재선, 순교의 차례입니다.
한센병 환자들의 교회에 부임한 지 한 해 남짓 만에 신사참배 거부로 붙잡혀, 해방될 때까지 다섯 해 가까이 갇혀 있었습니다. 형기를 다 채운 뒤에도 뜻을 굽히지 않아 풀려나지 못했습니다.
애양원은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가 세운 한센병 환자 요양 시설입니다. 1909년 광주 양림에서 시작했고, 이웃 주민의 반발로 1925년 여수 신풍으로 옮겼습니다. 환자가 천 명을 넘었고 많을 때는 1,200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애양원교회는 그 환자들의 교회입니다.
손양원이 장갑을 끼지 않고 환자들과 악수하고 함께 밥을 먹었다는 것은 여러 자료가 한결같이 전합니다. 병이 깊은 환자들의 방에 스스럼없이 드나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오는데, 누가 본 대로 전한 것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이상규 교수는 그가 이런 목회를 하게 된 데에 일본에서 만난 나카다 주지와 부산에서 한센병 환자를 돌본 호주 선교사 매켄지의 영향이 있었다고 봅니다.
'예방 구금'은 형기를 마친 사상범이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재판 없이 계속 가두어 둘 수 있게 한 일제의 제도입니다. 손양원은 형기를 다 채우고도 신사참배를 받아들이지 않아 풀려나지 못했습니다. 한 해 반의 형이 다섯 해 가까운 옥살이가 된 까닭입니다. 일부 자료가 그의 형을 '종신형'이나 '무기 구금'이라 적는 것은 이 예방 구금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갇힌 뒤 가족은 사택에서 쫓겨나 부산 범일동의 판자촌으로 갔습니다. 큰아들 동인과 둘째 동신은 부산의 통 공장에서 일했고, 딸 동희와 아들 동장은 1944년 초부터 해방까지 구포의 고아원에서 지냈다고 이상규와 나삼진의 글이 전합니다.
판결문과 심문 조서의 원문은 읽지 못했습니다. 선고한 법원과 날짜, 죄목은 연구자들의 글과 기사에서 가져왔습니다. 조서에는 그가 '목사'가 아니라 '전도사'로 적혀 있다고 합니다. 그는 해방 뒤인 1946년에야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가 옥에서 쓴 편지는 안용준이 엮은 『손양원 목사님의 옥중서신집』(1952)과 2017년에 나온 『손양원 목사의 옥중서신』에 실려 있다고 하나, 편지의 문장은 이번에 읽지 못했습니다.
1948년 10월 여수·순천 10·19 사건 때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이 순천에서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손양원은 장례에서 아홉 가지 감사를 말했고, 아들들을 죽이는 데 가담한 청년 안재선을 살려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교회 쪽의 서술. 『사랑의 원자탄』과 애양원의 묘비는 두 형제가 좌익 학생들에게 붙잡혀 인민재판에 넘겨졌고, 끝까지 예수를 믿으라고 전하다가 죽은 순교로 그립니다. 형과 아우가 서로 대신 죽겠다고 했다고 전합니다.
역사 연구자의 서술. 국사편찬위원회의 김득중은 두 형제가 우익 학생 단체에서 활동한 반공 의식이 강한 청년이었고, 다른 우익 청년들과 함께 봉기군에 맞서다 붙잡혀 총살되었다고 적습니다. 그래서 이 죽음에는 종교적인 까닭만이 아니라 좌익과 우익의 정치적 싸움이라는 성격도 있었다고 봅니다.
두 서술은 서로를 다 지우지 않습니다. 믿음 때문에 미움을 산 것과 좌우의 싸움 한가운데 있었던 것은 그때 함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다만 이 일을 전할 때 좌우 대립이라는 그때의 형편을 빼고 말하면 일어난 일의 절반만 말하게 됩니다.
이 사건의 이름도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여순 반란 사건'이라 불렀으나 지금 법률이 쓰는 이름은 '여수·순천 10·19 사건'입니다. 봉기와 그 진압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고, 진압 과정의 희생이 봉기군이 점령한 동안의 희생보다 몇 배 많았다는 조사 결과가 지역 언론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손양원의 두 아들은 그 많은 죽음 가운데 둘입니다.
장례에서 손양원이 한 답사는 '아홉 가지 감사'로 전해집니다. 애양원교회 누리집과 한 목사의 설교문에 같은 글귀로 실려 있습니다.
| 감사 (전해 오는 글귀) | |
|---|---|
| 1 |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을 나오게 하셨으니 감사 |
| 2 |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주셨는지 감사 |
| 3 | 삼남 삼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맏아들과 둘째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감사 |
| 4 |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요 감사 |
| 5 |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감사 |
| 6 |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감사 |
| 7 |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것을 감사 |
| 8 |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감사 |
| 9 | 이 같은 역경 중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을 주신 것을 감사 |
이 글귀가 처음 적힌 곳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사랑의 원자탄』에 어떤 글귀로 실렸는지도 책 본문을 구하지 못해 대조하지 못했습니다. 이상규 교수가 옮긴 글귀는 첫째가 "나 같은 죄인의 가정에서"로 조금 다르고, 한 잡지는 '열 가지 감사'라고 적습니다. 장례를 집례한 이인재가 고려신학교의 잡지 〈파수군〉 창간호에 이 장례에 관한 글을 실었다고 하니, 그 글이 가장 이른 기록일 수 있습니다(추정). 그러므로 위 글귀는 '손양원이 이런 뜻으로 감사했다고 전해진다'는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이 안전합니다.
손양원이 아들들을 죽이는 데 가담한 청년을 살렸다는 것은 모든 자료가 전합니다. 어떤 길로 살렸는지는 세 갈래로 전합니다.
| 전하는 형태 | 누가 그렇게 적는가 |
|---|---|
| 손양원이 계엄 사령관을 찾아가 간청했다 | 애양원교회 누리집, 여수 지역 향토 자료 |
| 딸을 시켜 계엄 사령관에게 탄원서를 보냈다 | 한 기독교 잡지(2026) |
| 나덕환 목사를 통해 구명했다. 딸 동희가 아버지의 뜻을 나 목사에게 전했고, 나 목사가 군 쪽을 설득했다 | 이상규, 나삼진, 오병학의 전기를 인용한 기사 |
세 갈래는 한 가지 일의 다른 대목일 수 있습니다. 손양원이 뜻을 정했고, 딸이 그 뜻을 전했으며, 나덕환 목사가 군의 재판부를 설득했다고 보면 서로 어긋나지 않습니다. 다만 이것은 정리자의 맞춤이고, 군법회의나 계엄 쪽의 기록은 찾지 못했습니다. 지금 근거는 전기와 딸의 회고, 연구자들의 글입니다.
직접 쏘았는가. 책 계통의 서술은 그를 죽인 사람으로 그립니다. 백과사전은 '살해에 가담했던'이라고 적습니다. 여수의 한 목사는 그가 총살 현장에 있었지만 직접 쏘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나무위키는 딸 손동희의 책을 근거로 그가 '자신은 죽이지 않았고 확인 사살만 했다'고 말했다고 옮기는데, 그 책의 원문은 읽지 못했습니다.
그 뒤의 삶. 성경학교를 마치고 잠시 전도사로 일했다는 자료와 성경학교를 마치지 못했다는 자료가 있습니다. 세상을 떠난 때는 1978년 12월과 1979년 12월로 갈립니다. 믿음을 지녔는지에 대해서도, 회심했다고 적는 글과 끝내 믿지 않았다고 유족이 말했다는 글이 있습니다.
지역의 다른 눈. 여수 지역의 한 향토 자료는 두 아들의 죽음을 안재선 한 사람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지나치며 그도 이념 대립의 희생자라고 봅니다.
안재선의 아들 안경선은 고등학교 3학년 겨울에 아버지를 여읜 뒤 『사랑의 원자탄』을 읽고서야 사정을 알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목사가 되어 함안 손양원기념관의 첫 관장을 지냈습니다. 죽인 쪽의 아들이 죽임당한 쪽을 기리는 집의 관장이 된 것입니다.
딸 동희가 원수를 아들로 삼겠다는 아버지를 받아들이지 못하자 손양원이 이렇게 말했다고 전합니다. 첫째와 둘째 계명을 지키려고 옥에 갇혔는데,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도 똑같은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 말은 딸의 책에서 온 것으로 보이나 원문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고 말씀하셨습니다.
6·25 전쟁이 나자 교인들이 피난을 권했으나 환자들을 두고 떠나지 않았습니다. 1950년 9월 붙잡혀 9월 28일 밤 여수 미평의 과수원에서 총에 맞아 숨졌습니다. 그날 막내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전쟁이 나자 교인들이 그를 배에 태워 피난시키려 했으나 혼자 내렸다고 애양원교회 누리집은 전합니다. "만일 내가 피신한다면 일천 명이나 되는 양떼들은 어떻게 합니까"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상규 교수는 "우리의 피난처는 오직 주님 품"이라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두 말 모두 누가 듣고 적은 것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떠나지 않았고 붙잡혀 죽임당했다는 사실은 모든 자료가 한결같습니다.
그가 붙잡히던 주에 전하려고 준비한 설교의 제목은 「한국에 미친 화벌의 원인」이었다고 합니다. 전쟁을 하나님 앞에서 교회가 돌이켜야 할 일로 보았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라고 말씀하셨고, 한 연구자는 손양원의 죽음을 이 말씀에 비추어 평가합니다.
장례는 1950년 10월 13일 고려신학교의 주관으로 치러졌습니다. 고려고등성경학교 교장 오종덕이 사회를 보았고 박윤선이 「순교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박형룡은 그에게 성자의 칭호를 붙여도 무방하다고 말했다고 이상규 교수가 전합니다. 1977년의 영화와 한 서평은 양아들 안재선이 장례에서 "죽을 자 살려 놓고 아버지 먼저 가시다니" 하며 통곡하는 장면을 전하는데, 책 본문으로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순교한 날을 위키백과의 한 곳은 9월 29일로 적습니다. 9월 28일 밤 11시쯤이었다고 애양원교회 누리집이 적으니 날이 바뀌는 무렵이어서 생긴 차이일 수 있습니다(추정). 아홉 가지 감사에는 '삼남 삼녀'라고 나오는데, 1948년에는 막내 동길이 태어나기 전이어서 4남 3녀와 어긋나지 않습니다.
안용준 목사가 쓴 손양원의 전기입니다. 손양원이 살아 있을 때 처음 나왔고, 그의 이름을 온 나라에 알렸으며,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이름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지금까지도 이 책을 넘어서는 기록이 없다고 역사학자가 말할 만큼 기본이 되는 책입니다.
| 항목 | 내용 |
|---|---|
| 지은이 | 안용준. 나삼진의 글은 그를 '안용준 교수'라 부르며, 그가 손양원의 설교와 편지를 찾아 알리는 데 앞장섰고 손양원이 순교한 뒤 순교자 유가족을 돕는 모임을 꾸리는 데 중심이 되었다고 적습니다 |
| 바탕이 된 자료 | 안용준이 모은 손양원의 재판 기록, 일기, 편지. 옥중 편지와 심문 조서는 〈파수군〉에 먼저 실렸습니다 |
| 초판 | 흔히 1949년이라 합니다. 이만열 교수는 '1950년 발간'이라고 말했습니다. 초판의 판권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
| 판본 | 1972년 성광문화사판(219쪽, 13장), 1977년 제11판, 1999년판(230쪽), 2009년 개정판(556쪽, 본편과 속편 합본), 2024년 전자책 |
| 번역 | 영어판 The Atomic Bomb of Love(2009)가 있고, 독일어, 네덜란드어 등 여러 말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
| 영화 | 1977년 강대진 감독의 영화 「사랑의 원자탄」. 이야기를 꾸민 대목이 있어 책과 같지 않습니다 |
'씨앗은 죽어서'가 따로 나온 속편의 제목이라는 말이 있으나, 확인된 것은 1972년판의 제4장 제목이 '씨앗은 죽어서'라는 것과 2009년 개정판에 '속편'이 함께 묶여 있다는 것입니다.
| 묶음 | 장 |
|---|---|
| 본편 (18장) | 1 바람 불기 전 · 2 아내의 권고 · 3 지옥이 된 낙원 · 4 옥중서한 · 5 어린 전도자 · 6 제2해산 · 7 한센환자의 종 · 8 추모의 밤 · 9 늙은 중학생들 · 10 추수할 일꾼 · 11 총맞은 중학생들 · 12 눈물의 바다 · 13 사랑의 원자탄 · 14 부자상봉 · 15 청춘일기 · 16 복수 · 17 제2바울은 아라비아로 · 18 산 순교자의 기도 |
| 속편 (13장) | 1 애양원 손양원 · 2 산돌이 이야기 · 3 옥중 6년간 · 4 전도일지 · 5 신앙수필 · 6 한국의 겟세마네 · 7 이십세기 심판정 · 8 대신 온 생명 · 9 말 없는 세 무덤 · 10 노천 추모의 날 · 11 되어진 배신 · 12 흘러간 옛 꿈 · 13 그가 만일 오늘날 살아 있었다면! |
장의 제목으로 짐작하면 본편은 두 아들의 죽음과 안재선의 일이 한가운데 있습니다. '총맞은 중학생들', '눈물의 바다', '사랑의 원자탄', '복수'가 그 대목으로 보입니다. 본편이 손양원이 살아 있을 때 쓰인 까닭입니다. 속편은 그가 순교한 뒤에 쓰인 것으로, '한국의 겟세마네'에서 '말 없는 세 무덤'까지가 6·25와 순교를 다루는 것으로 보이고, '대신 온 생명'은 순교하던 날 태어난 막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대응은 제목만 보고 정리자가 짐작한 것입니다. '산돌'은 손양원의 호입니다.
공개된 발췌에서 확인되는, 책이 전하는 장면은 이렇습니다.
책의 제목에 대해 한 서평은 이렇게 풀이합니다. 지은이는 손양원이 아들을 죽인 사람을 아들로 삼은 일을 20세기의 두 가지 놀라운 일 가운데 하나로 보았습니다. 부수는 쪽에서는 원자탄이 나온 것이고, 세우는 쪽에서는 인류애가 다시 나타난 것이라는 뜻입니다. 책의 그 문장은 직접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값어치. 지은이가 재판 기록과 일기와 편지를 직접 모았고, 손양원과 같은 때를 산 사람이 썼습니다. 이만열 교수는 이 책을 넘어서는 손양원의 역사 기록이 없다며 뒤에 온 연구자로서 부끄럽다고 말했습니다.
한계. 이상규 교수는 논문에서 손양원에 관한 글들이 성인의 전기를 쓰는 방식의 한계를 넘지 못했고 사실을 따져 밝히는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평가합니다(이 책의 이름을 직접 든 것은 아닙니다). 위에 옮긴 형제의 마지막 말은 지은이가 그 자리에 없었던 장면을 직접 한 말처럼 그린 것입니다. 누구의 증언에 기대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자료와 어긋나는 곳. 책은 두 아들의 죽음을 전도하다 당한 순교로 그리고, 역사 연구자는 좌우 대립의 성격도 있었다고 봅니다. 책 계통의 서술은 안재선을 죽인 사람으로 그리고, 다른 자료는 직접 쏘았는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나무위키에는 책에 따라 가담한 학생의 이름이 다르게(가명으로) 적힌다는 말이 있으나 어느 책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손양원을 아는 데 첫째로 읽을 책이면서, 장면과 대화를 글자 그대로 사실의 기록으로 받기보다 '그를 가까이에서 본 사람들이 그를 이렇게 기억하고 전했다'는 증언으로 읽는 것이 알맞습니다. 이것은 정리자의 판단입니다.
책을 가지고 계신 분은 '아홉 가지 감사'와 옥중 편지가 실린 쪽을 직접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글이 '확인하지 못했다'고 적은 대목 여럿이 책에서 풀릴 수 있습니다.
손양원은 교단이 갈라지기 전에 순교했습니다. 그는 고려신학교를 세우는 데 함께했고 장례도 고려신학교가 치렀지만, 지금은 통합에 속한 애양원교회와 고신 쪽의 기념사업회가 함께 그를 기립니다.
이상규. 총무라는 직함은 받았으나 그 이름에 걸맞은 일을 한 것은 없고, 많은 봉사를 했다는 말은 꾸밈말일 뿐이라고 봅니다.
나삼진. 헌금 기록과 선서문 참여를 들어 이를 반박합니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1952년 고신에 함께했을 것이 분명하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짐작입니다.
사실로 남는 것. 1950년 3월 경남노회 목사 명부에서 그의 이름이 빠져 있습니다. 순교 직전 순천노회로 옮긴 것으로 보이나 옮긴 기록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신이 따로 총노회를 세운 1952년보다 두 해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손양원은 한상동, 주남선과 같은 '출옥 성도', 곧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갇혔다가 해방으로 풀려난 사람입니다. 고신은 이 출옥 성도들의 신앙에서 출발한 교단입니다. 그래서 고신 교인에게 손양원은 남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를 '고신의 사람'이라고만 부르면, 교단이 갈라지기 전에 순교한 그를 한쪽으로 끌어오는 일이 됩니다. 고신의 출발은 한국 고신교회사에, 박윤선은 정암 박윤선에 정리했습니다.
| 무엇 | 내용 |
|---|---|
| 여수 손양원목사순교기념관 | 애양원에 있음. 1993년 건립(4월 27일 개관이라는 자료가 있음) |
| 삼부자의 묘 | 애양원에 있음. 손양원, 두 아들, 아내 정양순 |
| 순교지 | 여수 둔덕동(옛 미평 과수원)에 유적 공원이 있음 |
| 함안 손양원기념관 | 생가 터. 칠원교회가 2008년 터를 사들였고 2015년 10월 20일 문을 엶 |
| 한국기독교 사적 제6호 | 예장 통합 제95회 총회(2010)가 애양원교회와 삼부자의 묘를 지정함 |
| 산돌손양원기념사업회 | 2010년 창립. 고신 쪽 인사들과 칠원교회가 생가 복원과 함안 기념관을 추진함 |
| 건국훈장 | 1995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 훈장증의 이름은 '고 손연준'이라고 함 |
| 중동고등학교 명예 졸업장 | 2014년 2월 6일 |
| 영화와 다큐멘터리 | 영화 「사랑의 원자탄」(1977), 다큐멘터리 「죽음보다 강한 사랑」, 영화 「그 사람 그 사랑 그 세상」 |
훈장의 등급은 나무위키가 옮긴 훈장증 글귀로만 확인했습니다. 국가보훈부의 공훈 기록에서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다큐멘터리가 처음 방송된 해, 합동 교단의 기념 사업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유족 가운데는 기념관이 특정 교단의 성지처럼 다루어지는 것을 불편해하는 분이 있다고 나삼진의 글이 각주에서 전합니다.
1949년 3월 26일 김구가 손양원을 만나 옛 시 한 수(눈 덮인 들판을 걸을 때 함부로 걷지 말라는 시)를 써 주었다고 함안 쪽 자료가 전합니다. 김구가 그를 자기가 세운 학교의 교장으로 모시려 했다는 것, 그의 용서를 두고 "이 사랑과 용서가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는 힘"이라고 썼다는 것도 전합니다. 뒤의 말이 실렸다는 신문 글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성경 구절은 개역개정을 정리자가 기억으로 옮긴 것입니다. 쓰시기 전에 성경과 맞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위 구절들이 손양원의 삶과 닿는다는 것은 연구자들과 책의 제목, 그리고 정리자의 연결이며, 손양원 자신이 이 구절들을 인용했다는 기록을 확인한 것은 출애굽기의 계명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