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BYTERIAN CHURCH IN THE REPUBLIC OF KOREA (KIJANG) · 1898–2026
한국 기독교장로회 교회사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가 걸어온 길을 네 시기로 나누어 정리했습니다. 캐나다 선교부와 조선신학교라는 뿌리, 1953년의 분립, 민주화 운동의 시대, 그리고 지금입니다. 1947–1953년의 일은 기장 쪽 설명과 당시 총회 쪽 설명을 따로 적었습니다.
정리 2026-10-11 · 한국 안의 역사가 중심 · 기장 총회 누리집, 백과사전, 합동·고신 쪽 글, 언론 보도에서 확인되는 만큼 옮김
조선신학교1953년 분립신앙고백사회 참여
한눈에 보기
한국기독교장로회는 1953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갈라져 나온 장로교단입니다. 줄여서 '기장'이라 부릅니다. 조선신학교(지금의 한신대학교)의 김재준 교수가 가르친 성경관을 총회가 받아들이지 않고 그를 파면하자, 그를 지지한 사람들이 따로 총회를 세웠습니다. 한국의 큰 장로교단 가운데 신학이 가장 진보적이며, 민주화와 인권과 통일 운동에 앞장선 교단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글은 한국 안의 역사를 중심으로 정리했습니다. 기장은 한국 장로교회 공통의 뿌리에 더하여 캐나다 장로회(뒤의 캐나다연합교회) 선교부와 인연이 깊습니다. 캐나다 선교부는 함경도와 북간도를 맡았고, 기장을 이룬 사람들 가운데 그 지역 출신이 많습니다.
고신 교인이 먼저 알아 둘 것. 고신(1952)과 기장(1953)은 한 해 차이로 같은 총회에서 갈라져 나왔지만 방향은 정반대입니다. 고신은 총회가 신사참배의 죄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는다고 보아 더 보수적인 쪽으로 나왔고, 기장은 총회가 성경을 글자대로만 읽기를 강요한다고 보아 더 진보적인 쪽으로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 글에는 고신이 받아들이지 않는 신학이 많이 나옵니다. 이 글은 기장이 걸어온 길을 기장 자신의 설명과 당시 총회 쪽의 설명으로 나누어 옮긴 것이며, 그 신학을 지지하는 글이 아닙니다.
네 시기는 이 글의 탭과 같습니다. 기장은 1953년 뒤의 자기 역사를 '새 역사'라고 부릅니다.
통일, 생태, 평화를 내걸었고, 교세가 18년째 줄고 있으며, 성소수자 문제로 안에서 논쟁함
2007 신사참배 죄책 고백, 2016 통합의 사과, 2021 첫 여성 총회장, 2026 제111회 총회
항목
지금의 모습
근거
이름
한국기독교장로회 (1961년부터. 1954–1961년에는 대한기독교장로회)
총회 누리집
본부
서울 종로구 연지동 한국기독교연합회관 4층 (2014년 12월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 옮김)
총회 누리집
교세
181,982명, 1,562 교회, 목사 3,306명 (2026년 9월 제111회 총회 보고)
아이굿뉴스 2026.09.19
노회
28개
총회 누리집
총회장
김종희 목사 (2026년 9월 제111회 총회, 강원 홍천)
노컷뉴스
신학교
한신대학교 (대학은 경기 오산, 신학대학원은 서울 수유동)
총회 누리집, 나무위키(보조)
교인 수는 자료마다 크게 다릅니다. 총회 누리집의 소개는 '20만여 교인',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2020년 현재 30만여 명', 2026년 총회의 통계 보고는 181,982명입니다. 이 글은 가장 최근의 통계 보고를 따랐습니다.
① 뿌리 (1884–1945)
이 탭의 핵심
한국 장로교회 공통의 뿌리 위에서, 기장에 특별히 중요한 세 가지가 이 시기에 놓였습니다. 캐나다 선교부의 함경도·북간도 선교, 1930년대에 드러난 성경관의 차이, 그리고 평양신학교가 닫힌 뒤 서울에 선 조선신학교입니다.
때
1884년에서 1945년까지
핵심 내용
1898년 캐나다 장로회 선교사 내한, 1934–1935년 세 가지 신학 사건, 1938년 평양 장로회신학교 폐쇄, 1940년 조선신학원 개원
사람
맥켄지, 그리어슨, 김재준, 송창근, 김대현 장로, 박형룡
눈여겨볼 것
1953년의 분립은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라 1930년대부터 드러난 성경관의 차이가 해방 뒤 신학교 문제와 만나 터진 것입니다
캐나다 선교부
1879
백홍준, 이응찬 등 네 사람이 만주에서 스코틀랜드 연합장로회 선교사 매킨타이어에게 세례받음. 기장 총회 누리집은 이것을 자기 뿌리의 첫 줄로 적음
1884–1885
알렌과 언더우드가 들어옴
1888.12
캐나다 출신 게일이 개인 자격으로 들어옴
1893.12
캐나다 노바스코샤 출신 맥켄지가 독립 선교사로 들어옴. 1895년 황해도 솔내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이 일에 캐나다 장로교회가 감동을 받아 한국 선교에 힘쓰게 되었다고 누리집은 적음
1898.09.27
캐나다 장로회의 그리어슨, 푸트, 맥래가 들어와 함경도 선교를 시작함
1912.01.29
원산에서 함경노회가 조직됨
1917.11.20
북간도 용정교회에서 함북노회가 조직됨
1925.06
캐나다의 장로회, 감리회, 조합교회가 합쳐 캐나다연합교회가 됨. 한국 선교 협력은 이어짐
한국 장로교회는 네 선교부가 지역을 나누어 맡았습니다. 캐나다 선교부가 맡은 곳은 함경도와 두만강 건너 북간도였습니다. 김재준은 함경북도 경흥 출신이고 북간도 용정에서 지낸 적이 있습니다. 해방 뒤 다른 선교부들이 조선신학교를 돕지 않을 때 캐나다 선교회만 조선신학교를 지지했다고 보수 쪽 학자의 글도 적습니다.
1930년대의 세 사건
사건
내용
결말
창세기 저자 문제 (1934)
서울 남대문교회의 김영주 목사가 모세가 창세기를 썼다는 것을 부인함
총회가 연구위원회(서기 박형룡)를 두었고, 김영주는 보고서를 받아들여 주장을 거둠
여성의 권리 문제 (1934–1935)
함북 성진중앙교회의 김춘배 목사가 '여자는 조용하라'는 말씀이 한 지방 교회의 풍습이지 변하지 않는 진리는 아니라고 신문에 씀
1935년 제24회 총회가 연구 보고를 만장일치로 채택했고, 김춘배는 취소 성명을 냄
아빙돈 단권 주석 사건 (1934–1935)
미국에서 나온 한 권짜리 성경 주석을 감리교가 번역해 펴냈는데, 장로교 목사 여럿이 번역에 참여함. 그 가운데 김재준, 송창근, 한경직이 있었음
1935년 총회가 문제 삼음. 한 사람은 사과했고, 송창근, 김재준, 한경직은 사과를 거부한 뒤 세 사람 이름으로 성명서를 내어 일단락됨
세 사건의 서술은 고신대학교 이상규 교수의 글(코람데오닷컴, 2012)을 따랐습니다. 그는 이 사건들을 성경관이 달라지기 시작한 조짐, 곧 성경이 온전히 영감되었다는 믿음에 대한 의문으로 풀이합니다. 기장 쪽이 이 사건들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는 따로 읽지 못했습니다. 김재준이 평양신학교 교수로 추천되었으나 박형룡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도 같은 글에 나옵니다.
조선신학교
1938.09
제27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평양 장로회신학교가 문을 닫음
1939.03
서울에서 김대현 장로를 중심으로 조선신학교 설립 기성회가 조직됨
1939.09
제28회 총회(신의주)가 조선신학교 설립을 인가함
1940.04.19
서울 승동교회에서 '조선신학원'이 문을 엶. 초대 원장 김대현 장로
1943–1945
장로교회가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으로, 다시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묶임
평양의 신학교가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문을 닫은 뒤, 서울에 새 신학교가 섰습니다. 이 학교에서 김재준과 송창근이 가르쳤습니다. 이 학교를 어떻게 보느냐가 해방 뒤 다툼의 출발점이 됩니다. 기장은 선교사에게 기대지 않고 한국 사람이 세운 신학교로 보고, 보수 쪽은 평양신학교의 신학을 잇지 않은 학교로 봅니다.
김대현 장로가 내놓은 돈을 총회 누리집은 '미화 30만 달러'로 적는데, 그때의 돈 단위로는 의심스러워 숫자를 본문에 싣지 않았습니다. 학교가 세워진 해를 1939년으로 적은 자료와 문을 연 1940년으로 적은 자료가 있습니다.
② 분립 (1945–1953)
이 탭의 핵심
총회가 직접 운영하게 된 조선신학교의 김재준 교수를 학생들이 고발한 1947년부터, 총회가 그를 파면하고 그를 지지한 사람들이 따로 총회를 세운 1953년까지 6년의 일입니다.
쟁점
성경에 오류가 있을 수 있는가. 성경을 역사와 문헌의 방법으로 연구하는 고등비평을 신학교에서 가르쳐도 되는가
결정적인 해
1952년 제37회 총회가 조선신학교 졸업생에게 목사 자격을 주지 않기로 하고 김재준의 제명을 지시함. 1953년 제38회 총회가 직접 파면함
갈라선 날
1953년 6월 10일 서울 한국신학대학 강당의 '호헌총회'
밝혀 둘 것
기장은 이 일을 근본주의 교권에 맞선 일로, 당시 총회 쪽은 자유주의 신학에 맞서 성경의 권위를 지킨 일로 설명합니다. 두 설명을 따로 적었습니다
제35회 총회(서울 새문안교회). 장로회신학교도 직영으로 받고 두 신학교를 합치려 했으나 이루지 못함
1951.04
조선신학대학의 이름을 한국신학대학으로 바꿈
1951.05
제36회 총회 속회(부산중앙교회)가 두 신학교의 직영을 모두 취소하고 새 총회 직영 신학교를 세우기로 함
1952.04.29–05.02
제37회 총회(대구 서문교회). 한국신학대학 졸업생에게 목사 자격을 주지 않기로 함. 김재준 목사를 제명하도록 경기노회에 지시함. 캐나다 선교사 서고도(윌리엄 스콧)를 심사하여 처벌하도록 함. 두 사람의 사상을 지지하는 사람은 노회가 처벌하도록 함
1952.05, 09
대구에서 호헌대회가 열리고 성명서가 나옴
1953.04
제38회 총회(대구 서문교회). 경기노회가 '제명할 이유가 없다'고 보고하자 총회가 직접 김재준의 파면을 선언함. 전북노회와 충남노회 총대의 회원권을 빼앗음
1953.06.10
서울 동자동 한국신학대학 강당에서 '제38회 호헌총회'가 열림. 총회장 김세열. 제36회와 제37회 총회의 결의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선언서를 냄
1954.06
제39회 총회(한국신학대학)가 이름을 '대한기독교장로회'로 정함
1961.05
제46회 총회(서울 초동교회)가 이름을 '한국기독교장로회'로 바꿈
1953년 김재준에 대한 처분을 자료에 따라 제명, 파직, 면직, 파면으로 다르게 적습니다. 제33회 총회의 날짜(4월 16일, 18일), 장로회신학교가 문을 연 날(5월 25일, 6월 9일), 새 총회신학교가 대구에 문을 연 때(1951년 9월, 1952년 9월 18일)도 자료마다 다릅니다. 기장 자료는 1953년 6월의 총회를 '호헌총회'라고 부릅니다.
두 쪽의 설명
쟁점
기장 쪽 설명
당시 총회 쪽(지금의 합동, 고신 쪽 글) 설명
진정한 학생 51명
대부분 평양신학교에 다니다 월남한 학생들이다. 학우회의 결의를 얻지 못하자 따로 글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돌렸다
총회가 직접 운영하는 신학교가 총회의 신학과 다른 것을 가르친다고 호소한 '51인 신앙동지회'다. 어려서부터 믿어 온 신앙과 성경관이 뿌리째 뒤집히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진정의 내용
모세오경이 여러 문서를 엮은 것이라는 학설, 고등비평, 예정론의 풀이를 문제 삼고 서울에 정통 장로교 신학교를 세우라고 요구했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성경에 오류가 많다고 가르친다는 것을 비롯하여 성경관, 교리, 신관의 문제를 들었다
김재준의 답
"성경은 하나님께서 구속의 경륜을 수행하신 역사적 계시"이며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과 본분에 정확무오한 유일한 법칙임을 믿으며 사도신경과 장로교 신조를 그대로 믿는다"고 밝혔고, 총회는 이단이 아님을 확인하고 일단락했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한다 하면서도 오류를 인정하므로, 성경이 절대로 오류가 없다고 믿어 온 교회를 욕보이는 것이다
박형룡의 검토
근본주의, 성경 문자주의의 판단이다
그가 "성경의 파괴적 고등비평의 옹호자와 자유주의 신학의 옹호자"임이 분명하다
1951–1953년 총회의 결의
노회에 묻지도 않고 새 신학교를 세운 것은 법에 어긋나고, 1952–1953년의 결의는 불법이다. 수가 많아진 평양신학교 계열이 조선신학교 쪽을 몰아내려 한 것이다
조선신학교가 고치기를 거부했으므로 새 신학교를 세웠다. 1952년 총회는 비상 조치로 월남한 이북 열 노회를 받아들였고, 그 총대들은 대부분 보수의 편이었다
갈라선 까닭
교리주의와 문자주의, 근본주의의 교권에 맞서 새로운 신앙 운동의 깃발을 든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에 맞서 성경의 권위와 교회의 신앙을 지킨 것이다
기장 쪽 설명은 총회 누리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장공기념사업회에 실린 김재준 평전의 한 부분을 따랐습니다(백과사전의 서술도 '법에 어긋나게', '불법적인 결의' 같은 말을 써서 기장 쪽에 가깝습니다). 당시 총회 쪽 설명은 합동 쪽 글 두 편과 보수 쪽 학자의 글, 고신 쪽 글 두 편을 따랐습니다.
호헌총회가 내건 네 가지
바리새주의를 물리치고 복음의 자유를 지킨다.
세계 장로교회의 테두리 안에서 건전한 교리를 세우고 신앙 양심의 자유를 지킨다.
남에게 기대는 생각을 버리고 스스로 선다.
고립주의를 경계하고 세계 교회와 함께한다.
63년 뒤의 사과
기장 총회 누리집의 연혁에 따르면, 2016년 9월 기장 제101회 총회에 예장 통합의 총회장과 임원들이 찾아와 '김재준 목사에 대한 제38회 총회의 제명'을 공식으로 사과하고 그 결의를 철회한다고 알렸습니다. 1953년에 그를 파면한 총회를 이은 교단 가운데 하나가 그 결의를 거둔 것입니다. 합동과 고신이 같은 일을 했다는 자료는 보지 못했습니다.
제58회 총회(서울 초동교회). 새 역사 20주년 기념대회. 「선교정책」을 채택하고 선교활동자유수호위원회를 둠
1974.09
제59회 총회(수원)가 여성 목사 제도를 받아들임. 1968년, 1971년, 1972년에 세 번 부결된 뒤의 통과
1975
안병무와 서남동이 '민중'을 신학의 말로 쓰기 시작함
1976.03.01
명동성당에서 3·1 민주구국선언. 문익환, 안병무 등 기장의 인물들이 함께함
1977.11.08
경기노회에서 양정신 목사가 안수받음. 기장의 첫 여성 목사
1980.03
한국신학대학이 종합대학인 한신대학교가 됨
1983.09
제68회 총회(서울 경동교회)가 신앙고백서를 채택함
1987.01.27
김재준 별세
1987
6·10 국민대회 성명서(6월). 제72회 총회가 「1987년 신앙선언」을 채택하고 3,000 교회 운동을 시작함(9월)
스스로 지은 신앙고백
기장은 1972년에 「신앙고백선언서」를 채택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한국 교회가 스스로 신앙고백을 지은 것은 이것이 처음이라고 적습니다. 통합이 1986년에 신앙고백서를 지은 것보다 14년 앞섭니다. 1983년에 신앙고백서를, 1987년에 「신앙선언」을 다시 채택했고, 2008년에는 교리 헌법(신앙요리문답)을 고쳤습니다.
세 문서(1972, 1983, 1987)가 서로 어떤 관계인지, 기장의 헌법이 사도신경, 12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어떤 자리에 두는지는 헌법 본문을 읽지 못해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여성 장로와 여성 목사
기장은 1956년에 여성 장로 제도를, 1974년에 여성 목사 제도를 받아들였습니다. 장로교단으로는 처음입니다. 여성 목사 제도는 세 번 부결된 뒤 네 번째에 통과되어 '3전 4기'라 불립니다. 첫 여성 목사는 1977년에 나왔고, 2021년에는 장로교단에서 처음으로 여성 총회장이 뽑혔습니다. 통합은 1994년에 여성 안수를 허락했고, 합동과 고신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민주화 운동과 민중신학
백과사전은 기장이 김재준, 장준하, 안병무, 서남동, 문익환처럼 사회 개혁과 민주화, 인권, 통일 운동에 앞장선 인물들을 냈다고 적습니다. 1970년대에 안병무와 서남동이 다듬은 민중신학은 기장의 신학자들에게서 나왔습니다. 기장 총회는 1973년 선교활동자유수호위원회를 두었고, 1984년에는 선교의 자유를 지키려는 전국 교역자 대회를 열었으며, 1987년 6월에는 국민대회에 성명을 냈습니다. 2002년 정부는 김재준, 문익환, 서남동, 안병무에게 국민훈장을 추서했습니다.
1973년의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 박형규와 강원용의 구체적인 활동, 기장이 '하나님의 선교'라는 신학을 받아들인 경위는 직접 읽은 자료에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민중신학과 3·1 민주구국선언의 날짜와 사람은 위키백과로만 보았습니다. 한국신학대학이 수유리로 옮긴 날짜, 오산 캠퍼스로 옮긴 해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④ 지금까지 (1987–현재)
이 탭의 핵심
민주화 뒤 통일, 평화, 생태를 교단의 과제로 내걸었고, 2007년을 정점으로 교세가 18년째 줄고 있으며, 성소수자 문제를 두고 교단 안에서 뜻이 갈리는 시기입니다.
때
1987년에서 지금까지
핵심 내용
통일과 평화에 대한 입장(1986–1987), 창조 질서 보전 결의(1991), 신사참배와 부일 협력에 대한 죄책 고백(2007), WCC 부산 총회(2013), 통합의 사과(2016), 첫 여성 총회장(2021)
교세
2007년 337,570명에서 2026년 보고 181,982명으로. 정점에서 46퍼센트가 줄었다고 보도됨
가장 최근 총회
2026년 9월 제111회(강원 홍천, 총회장 김종희)
1986–1987
제71회, 제72회 총회가 '평화·통일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냄
1988.02.29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회가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88선언)을 채택함
1991.09
제76회 총회가 '창조 질서 보전에 관한 우리의 결의'를 냄
2002.12.27
정부가 김재준, 문익환, 서남동, 안병무에게 국민훈장을 추서함
2003
새 역사 희년(50주년). 제주에서 희년을 선포하고 천안에서 희년 대회를 엶(1만 2천여 명)
2005.06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 총회 회관을 봉헌함
2007.09
제92회 총회가 '신사참배와 부일 협력에 대한 죄책 고백 선언문'을 냄
2013
새 역사 60주년 기념예배(6월). WCC 부산 총회(10–11월)
2014.12
총회 본부를 종로5가 한국기독교연합회관으로 옮김
2016.09
제101회 총회에 예장 통합 총회장단이 와서 김재준 제명 건을 사과하고 철회를 알림
2021.09
제106회 총회. 탄소 중립 선언문, '북녘에 두고 온 재산 권리 포기 선언문'. 김은경 목사가 총회장으로 뽑힘(장로교단의 첫 여성 총회장)
2026년 총회의 통계 보고는 교인이 한 해 사이 6,177명(3.3퍼센트) 줄었고, 18년 연속 감소이며, 정점에서 46퍼센트가 줄었다고 전합니다. 세례교인은 143,435명, 다음 세대는 26,961명(15퍼센트)이고 70세 이상이 30퍼센트입니다. 총무는 지금 18만여 명인 교인 수 보고가 14–15만 명 수준으로 줄어들 것을 걱정했다고 보도되었습니다. 2026년 총회는 총회 선교 주일에 세례교인 한 사람이 5천 원을 의무로 헌금하도록 정했습니다.
성소수자 문제를 둘러싼 논쟁
기장 안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뜻은 하나가 아닙니다. 2025년 제110회 총회에는 서로 반대 방향의 안건이 함께 올라왔습니다.
교단 안의 두 흐름
한쪽. '성소수자 목회 연구 특별위원회'를 새로 두자는 헌의가 올라왔습니다. 이 안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쪽. 목포노회가 '퀴어 신학의 이단성을 검증하고 총회의 공식 입장을 밝히라'고 헌의했으나, 정치부의 기각 의견대로 기각되었습니다(기각 찬성 220, 반대 89). 총회에 앞서 2025년 8월에는 교단 안의 '동성애·동성혼 반대 대책위원회'가 목회자 200여 명이 모인 선교대회를 열었습니다. 헌의한 쪽은 기장의 헌법인 신앙고백서가 사람이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고 고백한다는 점을 들었습니다.
이 대목은 국민일보와 크리스천투데이의 보도를 따랐습니다. 고신을 비롯한 보수 교단들이 이 문제에서 기장과 다른 입장에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으나, 고신 총회가 기장에 대해 낸 공식 결의는 이번에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 밖의 최근 일
죄책 고백 (2007). 제92회 총회가 '신사참배와 부일 협력에 대한 죄책 고백 선언문'을 냈습니다. 기장도 1938년 신사참배를 결의한 총회를 이은 교단이기 때문입니다.
제111회 총회 (2026). 목사 부총회장을 12년 만에 경선으로 뽑았습니다(311표 대 210표). '제111회 총회 선언서'를 냈고, 한 보도는 그 내용을 "교회의 탐욕을 참회하고 생명 사랑을 다짐"한 것으로 전했습니다.
2025년 총회의 다른 안건. 장로 세 사람 이상을 세울 때 여성 장로 한 사람을 포함하도록 하자는 안이 올라왔습니다. 결과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조직, 신학교, 신학
이 탭의 핵심
28개 노회, 1,562 교회의 작은 교단이지만 세계 교회와의 연합에 가장 넓게 참여하고, 한신대학교라는 신학교와 여러 사회 선교 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총회
총회장은 해마다 바뀌고 앞선 부총회장이 추대되는 관행. 총무가 본부의 살림을 맡음
신학교
한신대학교와 그 신학대학원
신학의 특징
성경을 역사적 계시로 읽는 성경관, 스스로 지은 신앙고백, '하나님의 선교'와 사회 참여, 교회 연합
밝혀 둘 것
기장의 헌법 본문을 읽지 못해 교리 표준의 짜임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총회와 기관
임원. 총회장, 목사 부총회장, 장로 부총회장, 서기 등이 있고 총무가 따로 있습니다. 임기를 정한 규정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1940년 서울 승동교회에서 문을 연 조선신학원이 뿌리입니다. 조선신학교, 조선신학대학을 거쳐 1951년 한국신학대학이 되었고, 1980년에 종합대학인 한신대학교가 되었습니다. 대학 과정은 경기 오산에, 신학대학원은 서울 수유동에 있습니다. 2025년 총회가 새 총장을 인준했다고 보도되었습니다.
대표적인 교회와 사람
이름
설명
경동교회
김재준이 서울 장충동에 세운 성야고보교회가 앞선 이름. 강원용 목사가 목회함. 1983년 총회 장소
서울성남교회
송창근이 조선신학교 교정에 세운 성바울교회가 앞선 이름. 1956년 여성 장로 제도를 받아들인 총회 장소
초동교회
1961년 '한국기독교장로회'로 이름을 바꾼 총회 장소
향린교회
2024년 여성 목사 안수 50주년 예배가 열린 곳
김재준 (1901–1987, 호 장공)
함북 경흥 출신. 조선신학교 교수. 기장의 정신적 지주로 여겨짐
송창근 (호 만우)
조선신학교를 함께 이끎
김세열
1953년 호헌총회의 첫 총회장
문익환, 안병무, 서남동
민주화와 통일 운동, 민중신학
신학
성경관. 김재준은 성경을 "하나님께서 구속의 경륜을 수행하신 역사적 계시"이며 "신앙과 본분에 정확무오한 유일한 법칙"이라고 했습니다. 신앙과 삶의 법칙으로서는 오류가 없다고 하면서, 성경을 역사와 문헌의 방법으로 연구하는 것을 받아들인 입장입니다. 백과사전은 조선신학교의 입장을 '자유주의 신학을 극복한 신정통주의 신학'이라 적고, 고신의 이상규 교수는 김재준을 '진보 신학의 중심 인물'로 적습니다. 보수 쪽은 이것이 성경의 오류를 인정하는 것이어서 성경의 낱말 하나하나가 영감되었고 오류가 없다는 믿음과 함께 설 수 없다고 봅니다.
교회 연합.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1957), 아시아교회협의회(1959), 세계장로회연맹(1959), WCC(1960)에 가입했습니다. 캐나다연합교회(1955), 독일의 선교 협의회(1974), 스코틀랜드와 뉴질랜드와 호주의 교회, 미국연합교회와 협약을 맺었습니다.
여성. 여성 장로 1956년, 여성 목사 1974년. 2024년 보도는 여성 목사의 비율이 15.4퍼센트로 국내 교단 가운데 가장 높다고 전했습니다(기사 제목으로 확인).
고신, 통합, 합동과 견주면
이 탭의 핵심
네 교단은 1952년까지 하나의 총회였습니다. 기장은 그 가운데 성경관, 교회 연합, 여성 안수, 사회 참여에서 가장 멀리 간 교단이고, 고신은 그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고신과 기장
한 해 차이로 갈라져 나왔으나 방향이 반대입니다. 고신은 신사참배의 청산을, 기장은 신앙 양심의 자유를 내걸었습니다
공통점 하나
둘 다 다수였던 총회로부터 밀려나 따로 선 교단이라는 점은 같습니다
밝혀 둘 것
이 표는 각 글에서 따로 확인한 사실을 정리자가 나란히 놓은 것입니다
항목
기장
통합
합동
고신
갈라진 때
1953년
1959년
1959년
1952년
교인 (가장 최근 보고)
181,982명
2,140,910명
2,116,250명
379,621명
교회
1,562곳
9,415곳
11,689곳
2,101곳
WCC
1960년 가입
회원 (1969년 재가입)
반대
참여하지 않음
여성 목사
1974년 허락
1994년 허락
허락하지 않음
허락하지 않음
스스로 지은 신앙고백
1972년
1986년, 2002년
없음
없음
성경관
역사적 계시. 고등비평을 받아들임
(이 글에서 다루지 않음)
축자영감과 무오
축자영감과 무오
신학교
한신대학교
장로회신학대학교 등 7곳
총신대학교
고려신학대학원
교인과 교회의 수는 2026년 9월 보도에 함께 실린 숫자입니다. 통합, 합동, 고신 칸은 한국 장로교 통합측 교회사, 한국 장로교 합동측 교회사, 한국 고신교회사의 내용입니다. 합동과 고신의 성경관은 두 교단이 받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두 교단 쪽 글의 표현을 따라 적었습니다.
고신 쪽이 기장을 보는 눈
고신대학교 이상규 교수는 1930년대의 세 사건을 성경관이 달라지기 시작한 조짐으로 보고, 박형룡을 보수주의 신학의 대변자로, 김재준을 진보 신학의 중심 인물로 정리합니다.
고신 쪽의 다른 글은 조선신학교를 '자유주의 조선신학교'라 부르며, 박형룡이 신사참배에 대한 권징보다 그에 맞설 정통 보수 신학교를 세우는 일을 앞세웠다는 풀이를 소개합니다. 고신이 박형룡과 갈라선 까닭을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거꾸로 기장 쪽의 김재준 평전은 '고려신학교파에서 활동하는 메첸파 목사들과 선교사들'을 한국 교회를 고립시킬 우려로 적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한국 교회의 위험으로 본 셈입니다.
함께 생각할 물음. 1952년과 1953년, 총회는 신사참배를 회개하라는 사람들과도, 성경을 달리 읽자는 사람들과도 함께 가지 못했습니다. 두 갈라섬은 같은 종류의 일입니까, 전혀 다른 일입니까. 기장은 '신앙 양심의 자유'를 내걸었고 고신은 '신앙의 순결'을 내걸었습니다. 교회가 지켜야 할 자유의 테두리는 어디까지이며 그 테두리는 누가 무엇으로 정합니까. 통합은 63년 뒤 김재준의 제명을 사과했습니다. 교회가 지난 결정을 거두는 일은 어떤 때에 옳고 어떤 때에 옳지 않습니까. 이 물음은 정리자가 붙인 것입니다.
자료와 한계
무엇으로 확인했나. 기장 총회 누리집의 「총회연혁」(2025년 8월까지 실림)과 「총회소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한국기독교장로회' 항목, 장공기념사업회 누리집에 실린 김재준 평전(천사무엘, 2003)의 한 부분, 국민일보의 회고 연재와 여성 목사 안수 50주년 기사를 2026년 10월 11일에 읽었습니다. 당시 총회 쪽의 설명은 리폼드뉴스의 글 두 편(합동 쪽), 뉴스파워의 글(보수 쪽 학자), 코람데오닷컴의 글 두 편(고신 쪽)에서 가져왔습니다. 최근의 일은 아이굿뉴스, 노컷뉴스, 국민일보, 크리스천투데이의 기사로 보탰습니다.
자료의 기울기. 연표의 뼈대는 기장 총회 누리집에서 왔습니다. 백과사전의 서술도 기장 쪽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1947–1953년의 일은 반대쪽 글을 일부러 찾아 나란히 놓았습니다. 통합의 교단 신문과 합동의 교단 신문이 이 일을 어떻게 적는지는 직접 읽지 못했습니다.
읽지 못한 것. 기장의 헌법 본문. 1972년, 1983년, 1987년의 신앙고백 문서 본문. 1947년 김재준의 진술서와 51명의 진정서 원문. 1953년 6월 호헌총회의 선언서 전문과 참석한 총대의 수.
확인하지 못한 것.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1973), 박형규와 강원용의 활동, '하나님의 선교' 신학을 받아들인 경위, 88선언에서 기장 인사의 역할. 한신대학교가 수유리와 오산으로 옮긴 때. 2025년 총회에 올라온 성소수자 목회 연구 특별위원회 안과 여성 장로 안의 결과. 총회장과 총무의 임기. 고신 총회가 기장에 대해 낸 공식 결의.
자료끼리 어긋나는 곳. 교인 수(누리집 20만여, 백과 30만여, 통계 보고 18만 2천). 1953년 김재준에 대한 처분의 이름. 여러 날짜(제33회 총회, 장로회신학교 개교, 총회신학교 개교). 1952년 총회에 새로 들어온 이북 총대의 수(69명과 78명). 조선신학교의 대학 인가 연도. 본문의 해당 자리에 적었습니다.
보조 자료로만 본 것. 민중신학과 3·1 민주구국선언의 날짜와 사람, 지역별 교세, 한신대학교 캠퍼스의 위치는 위키백과와 나무위키에서 보았습니다. 한 통계 기사는 특정 종교 단체 계열로 알려진 매체의 것이어서 숫자가 다른 보도와 같음을 확인한 뒤에만 썼고 출처 목록에는 넣지 않았습니다.
해석이 들어간 곳. 고신과 기장이 반대 방향으로 갈라져 나왔다는 문장, 1953년의 분립이 1930년대부터의 차이가 터진 것이라는 문장, 조선신학교를 보는 두 눈을 견준 문장, 네 교단을 견준 표, 마지막의 물음입니다.
이 글의 자리. 이 사이트는 고신 교인이 정리하는 공부 노트입니다. 이 글은 기장의 신학을 권하려는 것이 아니라, 같은 뿌리에서 나온 이웃 교단이 어떤 길을 걸었는지를 그 교단 자신의 말과 반대쪽의 말로 알아보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