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아펜젤러의 입국에서 지금까지, 한국 감리교회가 걸어온 길을 네 시기로 나누어 정리했습니다. 감독과 연회와 파송이라는 제도, 웨슬리를 따르는 신학, 장로교와 다른 점을 함께 적었습니다.
정리 2026-10-11 · 범위는 한국 · 교단 누리집과 언론 보도에서 확인되는 만큼 옮김
한국 감리교회는 1885년 부활주일에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들어오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장로교의 언더우드와 같은 날 같은 배로 들어왔습니다. 미국의 북쪽 감리교회와 남쪽 감리교회가 따로 선교하다가 1930년에 하나로 합쳐 스스로 서는 한국 교회가 되었고, 지금의 이름은 기독교대한감리회입니다. 줄여서 '기감' 또는 '감리회'라고 부릅니다.
이 글은 한국 안의 역사에 한해 정리했습니다. 감리교는 18세기 영국에서 존 웨슬리의 신앙 운동으로 시작되었고(첫 연회 1744년), 미국 감리교회는 1784년에 따로 섰습니다. 한국에 온 것은 이 미국 감리교회입니다.
| 시기 | 한 줄로 | 기억할 해 |
|---|---|---|
| ① 선교의 시작 (1884–1910) | 미국 북감리회와 남감리회가 따로 들어와 학교와 병원으로 시작함 | 1884 고종의 윤허, 1885 아펜젤러 입국, 1887 벧엘예배당, 1903 원산 부흥, 1907 협성신학교 |
| ② 일제기 (1910–1945) | 3·1운동에 앞장섰고, 두 감리회가 합쳐 자치 교회가 되었으나, 일제 말에 일본 교단에 흡수됨 | 1919 3·1운동, 1930 기독교조선감리회, 1941 교단 개편, 1945 일본기독교조선교단 |
| ③ 분열과 통합 (1945–1978) | 해방 뒤 세 번 갈라졌다가 세 번 다시 합침 | 1946 분열, 1949 통합과 새 이름, 1955 호헌총회, 1959 합동, 1974 분리, 1978 합동총회 |
| ④ 지금까지 (1978–현재) | 크게 자랐고, 신학 재판과 감독회장 선거 분쟁을 겪었으며, 지금은 줄어드는 교세와 씨름함 | 1992 변선환 교수 출교, 2004 첫 4년 전임 감독회장, 2008 선거 분쟁, 2012 세습 금지법, 2025 본부 이전 |
| 항목 | 지금의 모습 | 근거 |
|---|---|---|
| 이름 | 기독교대한감리회 (1949년부터) | 교단 누리집 |
| 본부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연수원. 2025년 5월 12일 서울 광화문 감리회관에서 옮김 | 노컷뉴스 2025.05.13 |
| 교세 | 약 6,700개 교회, 113만 7천여 명 (2025년 5월 보도가 전한 '지난해 통계') | 노컷뉴스 2025.05.15 |
| 연회 | 13개 (국내 11개, 미주자치연회, 서부선교연회) | 교단 누리집 「감리회 조직」 |
| 감독회장 | 김정석 (2024년 10월 31일 제36회 총회에서 취임, 임기 4년) | 교단 누리집 약사 |
| 신학교 | 감리교신학대학교, 목원대학교, 협성대학교 | 교단 누리집 「교육활동」 |
교세는 보도에 따라 숫자가 다릅니다. 2016년 보도는 '150만', 2019년 통계는 1,304,856명, 2025년 보도는 113만 7천여 명이며, 한때 160만 명이었다는 보도도 있습니다. 공식 통계표는 직접 읽지 못했습니다.
미국의 두 감리교회(북감리회와 남감리회)가 따로 선교사를 보내, 학교와 병원을 앞세워 한국에 뿌리를 내린 시기입니다.
1883년 9월, 미국 감리교회 볼티모어 연회의 가우처 목사가 미국에 와 있던 민영익을 만나 조선 선교에 뜻을 두었습니다. 그는 그해 11월 해외선교부에 선교를 요청하고 2천 달러를 내놓았습니다. 이듬해 일본에 있던 선교사 매클레이가 조선에 와서 학교와 병원 일을 해도 좋다는 고종의 허락을 받았습니다. 선교가 교회가 아니라 학교와 병원으로 시작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한국에는 미국 감리교회 둘이 들어왔습니다. 미국 감리교회가 19세기에 노예 문제로 남과 북으로 갈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온 쪽이 북감리회(흔히 미감리회)이고, 10년 뒤에 온 쪽이 남감리회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처음에 북감리회를 '미이미교회', 남감리회를 '감리회'라고 불렀다고 하며, 1906년에 두 연회가 '감리교회'라는 이름을 함께 쓰기로 했습니다. 두 선교부는 신학교를 함께 세웠고(1907), 뒤에 하나의 교회로 합칩니다(1930).
교단 누리집은 1903년 원산에서 하디 선교사의 회개로 시작된 부흥이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을 거쳐 1909년 백만명구령운동으로 연결되었다"고 적습니다. 평양 대부흥은 장로교의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난 일로 기억되지만, 그 앞에 감리교 선교사의 회개에서 시작된 흐름이 있었다는 것이 감리교 쪽의 서술입니다. 평양 대부흥은 평양 대부흥운동의 시작과 끝에 따로 정리했습니다.
1893년 선교 구역 협정에서 어느 지역이 어느 선교부의 몫이 되었는지, 원산 부흥의 날짜와 집회의 자세한 모습, 보구여관(여성 병원)이 세워진 해는 이번에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배재학당이 문을 연 달도 교단 누리집 안에서 6월과 8월 3일로 다르게 적혀 있습니다.
감리교인들이 3·1운동에 앞장섰고, 1930년에 남북 감리회가 합쳐 한국인이 이끄는 '기독교조선감리회'가 되었으나, 일제 말에는 교단이 일본 교단의 일부로 바뀌어 사라진 시기입니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감리교인은 이필주, 신홍식, 정춘수, 최성모, 오화영, 신석구 목사와 박동완, 박희도, 김창준 전도사, 이렇게 아홉 사람입니다. 이 가운데 정춘수는 뒤에 일제 말 교단 개편의 책임자가 됩니다. 한 사람의 이름이 민족대표 명단과 일제 말의 통리자 명단에 함께 나온다는 사실이 이 시기 교회가 지난 길의 굴곡을 보여 줍니다.
1930년 12월 남북 감리회가 합쳐 '기독교조선감리회'가 되었습니다. 선교부의 교회가 아니라 한국인이 대표가 되는 자치 교회가 된 것입니다. 창립 총회가 세운 세 원칙은 '진정한 기독교회, 진정한 감리교회, 조선적 교회'였습니다. 이때 여덟 조항의 '교리적 선언'과 '사회신경'을 채택했고, 모든 의회를 성직자와 평신도 같은 수로 꾸리기로 했습니다. 대표의 이름은 '감독'이 아니라 '총리사'였습니다.
이듬해인 1931년에는 여선교사 14명이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한국 땅에서 있은 첫 여성 목사 안수이지만, 안수받은 이는 모두 외국인 선교사였습니다. 한국인 여성이 처음 목사가 된 것은 1955년입니다(전밀라, 명화용).
이용도 목사는 1930년대 초 전국을 다니며 부흥회를 이끈 감리교 목사입니다. 교단 누리집은 그의 신비주의 신앙이 "일부 교회로부터 견제와 비판을 받았지만" 영성을 되살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하고, 1998년 제23회 총회가 그의 '휴직에 대한 명예 복귀'를 결의했다고 적습니다.
당시 장로교 쪽에서는 그의 집회를 지나친 신비주의로 보아 경계했습니다. 이 글은 두 평가가 있었다는 사실만 적습니다. 그를 한국 오순절 영성이 스스로 일어난 흐름으로 보는 설명은 한국 교회를 만든 일곱 가지 영성의 흐름에 있습니다.
1938년 뒤로 교단은 빠르게 일제의 통제 아래 들어갔습니다. 일본 감리교회와 합치기로 결의했고(1939), 신학교가 문을 닫고 선교사가 모두 떠났으며(1940), 연회를 해산하고 교단을 개편했고(1941), 마침내 장로교, 성결교와 함께 일본기독교조선교단에 흡수되었습니다(1945년 7월).
저항도 있었습니다. 예산제일교회 '학생속회'의 신사참배 거부, 홍천과 춘천의 '십자가당'이 교단 자료에 적혀 있습니다. 철원읍교회의 강종근 목사, 회양읍교회의 권원호 전도사, 천곡교회의 최인규 권사는 옥에서 순교했습니다.
일제 말 교단 개편을 흔히 '혁신교단'이라 부르는데, 교단 누리집에는 '반혁신파'라는 말만 나오고 '혁신교단'이라는 이름과 그 내용은 자세히 나오지 않습니다. 교단이 개편된 해도 누리집 안에서 1941년, 1942년, 1943년으로 다르게 적혀 있어 위 연표는 연도별 약사를 따랐습니다. 정춘수의 행적에 대한 평가는 이번에 따로 조사하지 못했습니다.
해방 뒤 교단을 다시 세우는 과정에서 세 번 갈라지고 세 번 다시 합친 시기입니다. 지금의 이름 '기독교대한감리회'와 감독회장 제도의 틀이 이때 만들어졌습니다.
| 차례 | 갈라짐 | 다시 합침 | 자료가 붙인 이름 |
|---|---|---|---|
| 첫째 | 1946년 6월 | 1949년 4–5월 통합 총회 | 교단 누리집 서술문과 위키백과는 '재건파와 복흥파', 누리집 약사는 '복흥파와 유지파' |
| 둘째 | 1955년 4월 천안 호헌총회 (서술문은 1954년) | 1959년 3월 연합연회 | 호헌파 |
| 셋째 | 1974년 12월 (서술문은 1970년에도 분열이 있었다고 적고, 위키백과는 1971년 경기연회 사건을 듦) | 1978년 10월 합동총회 | 누리집 약사는 '법통과 갱신', 위키백과는 '총리원과 총회(갱신)측' |
첫째 분열에 일제 말 교단 지도부의 책임 문제가 얼마나 걸려 있었는지, 둘째 분열(호헌파)의 쟁점이 무엇이었는지, 셋째 분열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본문 자료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6·25 때 파괴된 예배당과 희생된 사람의 수도 교단 누리집에는 "많은 예배당이 파괴되었고 수많은 인명 피해"라고만 있어 숫자를 적지 않았습니다.
감리교의 원칙은 감독이 목사를 교회로 '파송'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1967년 총회가 이를 '구역 인사 제도'로 바꾸었습니다. 지금은 교회(구역)의 인사위원회가 재적 3분의 2의 찬성으로 담임목사를 정합니다. 말은 여전히 '파송'이라고 쓰지만, 실제로 누구를 모실지는 교회가 정하는 쪽으로 옮겨 간 것입니다. 장로교의 청빙과 얼마나 같은지는 이번에 자세히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하나가 된 교단이 크게 자랐다가, 신학 재판과 긴 감독회장 선거 분쟁을 겪고, 지금은 줄어드는 교세 앞에 서 있는 시기입니다.
| 때 | 제도 |
|---|---|
| 1930–1938 | 총리사 (양주삼) |
| 1938–1976 | 감독 한 사람 (임기 4년) |
| 1976 | 연회마다 감독을 두기 시작함 |
| 1978 | 감독회장제. 처음에는 네 사람이 여섯 달씩, 그 뒤에는 2년. 연회 감독 가운데 한 사람이 감독회장을 겸함 |
| 2003.10 | 입법의회가 '4년제 전임 감독 제도'를 정함 |
| 2004.10 | 첫 4년 전임 감독회장으로 신경하가 뽑힘 |
| 지금 | 감독회장은 4년 단임, 연회 감독은 2년 |
연회의 수는 1980년 5개, 1990년 7개, 1998년 9개, 2002년 10개로 늘었고 지금은 13개입니다.
감리교신학대학의 변선환 학장과 홍정수 교수가 종교다원주의와 포스트모던 신학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고발되어 출교된 사건입니다. 한국 교회에서 신학의 한계를 교회 재판으로 다툰 대표적인 사례로 꼽힙니다.
재판부와 고발한 쪽. 고발한 쪽은 '교리수호대책위원회'였고 부흥사를 비롯한 보수 목회자들이 앞장섰습니다. 재판부의 판단은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부인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변선환 교수 쪽. 그는 최후 진술에서 "기독교는 더 이상 정복자의 종교가 아니며 … 종교적 다원주의는 감리교의 세계적 추세"라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를 옹호하는 글들은 이 재판을 "그들만의 재판"이라 비판합니다.
백과사전의 정리.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이 사건으로 "한국 교회의 뿌리 깊은 진보와 보수 사이의 신학 갈등이 다시 한 번 드러났다"는 취지로 적습니다.
1991년 특별총회의 결정을 한 자료는 '교리에 어긋난다는 평결'로, 다른 자료는 '목사직 면직'으로 적습니다. 홍정수 교수가 선고받은 날과 그 뒤의 일, 변선환 교수의 복권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2008년 9월 감독회장 선거를 앞두고 한 후보의 자격을 둘러싼 논란이 일었고, 법원이 그 후보의 등록 효력을 정지시켰는데도 선거가 치러졌다고 보도되었습니다. 그 뒤 총회가 무기한 미루어졌고, 직무대행과 임시 감독회장이 번갈아 들어섰습니다. 2010년에는 법원이 정한 변호사가 임시 감독회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2013년, 2016년에 뽑힌 감독회장들도 소송으로 직무가 멈추었다가 돌아오는 일을 겪었습니다. 교단 누리집의 약사에는 2009년부터 2019년 사이에 직무대행이 일곱 번 넘게 적혀 있습니다.
이 분쟁의 자세한 경과(득표, 이른바 '두 개의 총회', 당선 무효와 선거 무효 판결의 내용)는 이번에 본문 자료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발단에 관한 위 서술은 검색 요약으로 본 것입니다.
기독교대한감리회는 2012년 개신교 교단 가운데 처음으로 세습을 막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조문의 뼈대는 '부모가 담임자로 있는 교회에 그의 자녀 또는 자녀의 배우자를 연속하여 같은 교회의 담임자로 파송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법이 통과된 직후 한 큰 교회가 다른 사람을 한 달쯤 세웠다가 아들에게 넘기는 이른바 '징검다리 세습'을 했고, 2015년에 이를 막는 개정이 이루어졌습니다. 부모가 담임한 교회에는 10년 동안 자녀나 자녀의 배우자를 파송할 수 없게 한 것입니다. 개정에 반대한 쪽은 '선의의 피해자', '역차별', '교회 의회의 결정권 박탈'을 이유로 들었고, 표결은 찬성 212 대 반대 189로 팽팽했습니다.
감리교는 감독이 있고, 지역 교회들이 '연회'로 묶이며, 목사가 연회에 속해 교회로 파송되는 교회입니다. 낱말은 장로교와 같아도 뜻이 다른 것이 있습니다.
| 직책 | 맡은 일 | 임기 |
|---|---|---|
| 감독회장 | 교단을 대표하는 영적 지도자이자 행정의 책임자. 총회 실행부위원회와 본부를 이끎 | 4년 단임 |
| 감독 | 연회의 의장. 정회원 11년차 이상 목사와 같은 수의 평신도 대표가 뽑음 | 2년 |
| 감리사 | 지방회의 의장. 선거로 뽑고 감독이 임명함 | 2년 |
| 의회 | 누가 모이나 | 무슨 일을 하나 | 장로교에서 가까운 것 (정리자의 견줌) |
|---|---|---|---|
| 당회 | 세례받은 18세 이상 입교인 전원과 교역자 | 해마다 11–12월에 모여 집사, 권사, 장로 등 임원을 뽑음. 장로는 3분의 2의 찬성이 필요함 | 공동의회 |
| 구역회 | 의장은 감리사(담임자에게 맡길 수 있음) | 해마다 12월–1월에 결산, 재산, 교역자의 오고 감과 생활비를 다룸. 구역 인사위원회가 담임목사 인사를 재적 3분의 2로 정함 | 당회와 제직회의 일 일부 |
| 지방회 | 담임자, 장로, 구역 대표. 의장은 감리사 | 연회마다 12–30개 지방이 있음 | 시찰회 |
| 연회 | 정회원 교역자와 같은 수의 평신도 대표. 의장은 감독 | 지역별로 해마다 여는 회의. 목사 안수가 여기서 이루어짐 | 노회 |
| 총회 | 전국에 하나. 의장은 감독회장 | 2년마다 열림. 홀수 해에는 입법의회로 모여 「교리와 장정」을 고침 | 총회 |
맨 오른쪽 칸은 이해를 돕기 위해 정리자가 견준 것이며 꼭 들어맞지는 않습니다. 감리교의 '구역'은 입교인 12명 이상으로 이루어지는 교회의 단위입니다. 연회가 장로교의 노회에 해당한다는 설명은 언론 보도에도 나옵니다.
목사는 한 교회에 속하지 않고 연회에 속한 '연회원'입니다. 안수받은 목사를 정회원, 수련 과정에 있는 교역자를 준회원(호칭은 전도사)이라 하고, 그 밖에 협동회원, 서리 담임자가 있습니다. 안수받지 않은 교역자는 세례와 성찬을 집례할 수 없습니다. 서리 1년과 준회원 2년을 거쳐 연회에서 안수받는다는 설명이 있으나 지금의 규정과 같은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 직분 | 자격 | 덧붙임 |
|---|---|---|
| 집사 | 입교한 지 2년 이상 | |
| 권사 | 집사 5년 이상, 35세 이상 | 남녀가 모두 맡는 직분. 기도회 인도와 속회 지도를 맡음. 장로교에서 권사가 여성의 직분인 것과 다름 |
| 장로 | 권사 5년 이상, 40–65세, 입교인 30명에 한 사람 | 당회 3분의 2의 찬성과 지방회의 통과가 필요함. 1974년에 장로 안수제가 생김 |
속회. 감리교회의 특징인 작은 모임입니다. 웨슬리 때부터 내려온 것으로, 교인들이 가까운 이웃끼리 묶여 한 주에 한 번 모입니다. 속회를 돌보고 보고하는 사람을 속장이라 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을 속회 인도자라 합니다. 장로교회의 구역 예배와 구역장에 견줄 수 있습니다(정리자의 견줌).
교인의 구분. 원입인, 세례아동, 세례인, 입교인(18세 이상)으로 나눕니다.
감리교는 웨슬리를 따라 은혜로 믿음을 통해 의롭다 함을 얻고, 그 뒤 거룩해져 가는 성화를 힘주어 말합니다. 칼뱅의 예정론은 받지 않습니다.
감리교의 가장 오랜 교리 문서입니다. 1784년 웨슬리가 영국 성공회의 39개조를 25개조로 줄여 미국 감리교회에 주었습니다. 교단 누리집은 이때 "칼뱅의 예정론이 들어간 17조"를 비롯해 14개 조항을 뺐다고 스스로 설명합니다.
| 조항 | 내용 | 장로교와 견주면 (정리자의 설명) |
|---|---|---|
| 제8조 자유의지 | 사람은 은혜 없이는 선을 행할 능력이 없음 | 사람의 무능을 말하는 데서는 같습니다. 감리교는 여기서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먼저 은혜를 베푸신다는 생각으로 나아갑니다 |
| 제9조 | 사람은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음 | 종교개혁의 공통 고백으로 장로교와 같습니다 |
| 제12조 | 의롭다 함을 얻은 뒤에도 은혜를 배반하고 죄에 빠질 수 있으며, 다시 회개할 수 있음 | 장로교가 고백하는 '성도의 견인'(참으로 택함받은 사람은 끝까지 지켜진다)과 갈리는 자리입니다 |
웨슬리는 신학의 기준으로 성경, 전통, 체험, 이성 네 가지를 들었다고 흔히 말합니다. 한국 감리회는 신학 지침에서 여기에 '토착 문화'를 더합니다.
남북 감리회가 합칠 때 채택한 여덟 조항입니다. 요지는 이렇습니다.
| 조 | 요지 |
|---|---|
| 1 | 창조자요 섭리자이시며 온 인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 |
| 2 | 스승이요 모범이시며 대속자요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
| 3 | 성신(성령) |
| 4 | 사랑과 기도의 생활, 죄 용서와 은혜 |
| 5 | 신구약 성경이 신앙과 실행의 충분한 표준 |
| 6 | 교회 |
| 7 |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인류사회가 천국임", 모든 사람이 형제 됨 |
| 8 | 의의 최후 승리와 영생 |
선언의 서문에는 "아무 교리적 시험을 강요하지 않는다 … 입회 조건은 신학적보다 도덕적이요, 신령적"이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교회에 들어오는 데 교리 시험을 내걸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신조에 동의하는 것을 직분과 입교의 조건으로 삼는 장로교의 전통과 뚜렷이 다른 태도입니다. 7조가 천국을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인류사회"로 풀이한 것도 그 시대 신학의 분위기를 보여 줍니다.
여덟 조항으로 되어 있고,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 승천, 성령이 거듭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완전하게 하심,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 은혜로 믿음을 통한 죄 사함, 재림과 심판과 몸의 부활을 고백합니다. 1930년의 선언보다 전통 교리의 표현이 뚜렷합니다. 이것은 두 글을 나란히 읽은 정리자의 관찰입니다.
감리교는 사회 문제에 대한 교회의 뜻을 신경처럼 밝혀 두는 전통이 있습니다. 1930년판은 인종 평등, 일부일처, 여성의 지위 향상, 아동 노동 폐지, 공창과 인신매매 반대, 금주와 금연, 노동 보호, 주일 안식을 담았습니다. 1997년판은 열한 항목으로 생태계, 가정과 성, 인권과 민주주의, 분배 정의, 복지 사회, 생명 공학,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다른 종교와의 공동 노력, 평화 통일, 핵무기 반대를 담았습니다.
1930년 사회신경의 조항 수는 교단 누리집의 한 곳은 16개조라 하고, 실린 본문은 13개 항으로 세어집니다.
감리교는 장로교와 같은 날 한국에 들어와 나란히 자란 교회이지만, 교회를 다스리는 방식과 구원을 설명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성결교와는 같은 웨슬리 전통의 형제입니다.
| 항목 | 감리교 (기독교대한감리회) | 장로교 (고신을 본보기로) |
|---|---|---|
| 한국에 온 때 | 1885년 4월 5일 아펜젤러 |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 |
| 교단의 대표 | 감독회장 (4년 단임) | 총회장 (1년) |
| 지역의 회의 | 연회. 의장은 감독 | 노회. 의장은 노회장 |
| '당회'의 뜻 | 입교인 전원의 모임 | 목사와 장로의 모임(치리회) |
| 목사의 소속과 부임 | 연회에 속하고 '파송'을 받음. 실제로는 1967년부터 교회의 인사위원회가 정함 | 노회에 속하고 교회의 '청빙'을 받음 |
| 권사 | 남녀 모두 | 여성 |
| 표준 문서 | 종교강령 25개조, 교리적 선언, 감리회 신앙고백, 「교리와 장정」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요리문답, 헌법 |
| 예정과 견인 | 예정론을 뺌. 은혜에서 떨어질 수 있다고 봄 | 예정과 성도의 견인을 고백함 |
| 여성 목사 | 1931년(선교사), 1955년(한국인)부터 있음 | 고신은 허락하지 않음 |
| 교회 연합 | NCCK, WCC에 참여 | 고신은 참여하지 않음 |
장로교 칸은 이 사이트의 장로교회의 역사와 체계, 한국교회 4직분론, 고신은 왜 여성 목사 안수를 부정하는가에 정리한 내용을 옮긴 것입니다.
성결교회도 웨슬리의 전통에 서 있습니다. 성결교회의 표어인 사중복음(중생, 성결, 신유, 재림) 가운데 '성결'이 웨슬리가 말한 성화와 닿아 있습니다. 다만 한국 성결교회는 감리교 선교부가 아니라 동양선교회를 통해 따로 들어왔고 교단도 따로입니다. 두 교단의 관계를 직접 다룬 자료는 이번에 읽지 못했습니다. 성결교회의 역사는 한국 성결교회사에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