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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 章臺峴 · 1866 — 1963

평양 장대현교회 통사

章臺峴敎會 · 널다리골교회 · 板洞敎會 · Pyeng Yang Central Church

한 교회의 시작과 부흥, 그리고 몰락과 소멸까지. 확인된 것과 확인되지 않은 것을 나누어 적었습니다. 이 글은 빈칸을 이야기로 메우지 않습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적혀 있습니다.

자료: 2026년 9월 조사 보고서 PART1_RISE·PART2_FALL 및 선행 사료 소재 조사(PYONGYANG·ACCESS·SOURCES_TEXT)
편집: 2026-09-29 · 본문의 모든 사실에는 출처 등급을 붙였습니다.

읽기 전에이 글을 읽는 법

교회사는 자주 갈립니다. 같은 사건을 두고 연도가 다르고, 사람 이름의 한자가 다르고, 인원수가 두 배 차이 나는 일이 흔합니다. 이 글은 그럴 때 한쪽을 고르지 않습니다. 양쪽을 나란히 놓고 «여기는 갈립니다»라고 알려 드립니다. 그리고 사료가 아예 없는 자리는 억지로 채우지 않고, «여기는 기록이 없습니다»라고 적어 둡니다.

출처 등급 배지

1차
그 시대에 그 자리에서 만들어진 기록 — 선교사 편지·보고서, 당대 신문, 친필 필사본, 당대 간행 사기(史記), 기관 공식 서지
1차·2차경유
1차 사료를 각주로 명시한 2차 서술에서 회수한 것 — 원 문서를 직접 열람하지 않았습니다. 각주 서지는 검증 가능한 형태이나, 독립된 1차가 아닙니다
학술
연구자의 논문·학위논문·연구서
언론
신문·잡지·교계지 보도와 기고문
백과
백과사전·인물사전 항목
단체·증언
선교단체 자료, 개인 증언·회고·설교 발언
추론
증거가 아닙니다. 자료들을 이어 세운 해석입니다
미확인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메우지 않았습니다
▣ 이런 상자 — 여기는 갈립니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통설)와 남아 있는 기록(사료)이 어긋나는 자리입니다. 양쪽을 다 보여 드리고, 어느 쪽도 확정하지 않습니다.

▣ 이런 상자 — 여기는 기록이 없습니다

사료가 0건인 자리입니다. 기록의 부재는 행위의 증거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느 방향으로도 서술하지 않습니다.

▣ 이런 상자 — 가장 단단한 사실

1차 사료나 기관 공식 기록으로 뒷받침되어, 이 글에서 가장 흔들리지 않는 대목입니다.

※ 축자 인용은 원문 표기 그대로 옮겼습니다. 한자·옛 한글·일본어를 현대어로 고치지 않았고, 옆이나 아래에 풀이를 붙였습니다. 한자 간체·오탈자로 보이는 것도 인쇄된 대로 두었습니다.

제 1 부시작

1866년 대동강에서 한 영국인이 죽었습니다. 27년 뒤 그 도시의 널다리골에 기와집 한 채가 예배당이 되었고, 다시 7년 뒤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ㄱ자 모양의 큰 집이 섰습니다.

1. 이 교회는 이름이 여러 개다

먼저 이름부터 정리해야 합니다. 찾으려는 이름이 틀리면 자료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기·문맥표기근거
한자 정식章臺峴敎會『평양노회 지경 각 교회 사기』 목차 「1. 평양부 장대현교회사기(章臺峴敎會史記)」 1차 / 국사편찬위 한국사DB 검색어 章臺峴 1차
창립기 한글널다리교회 / 널다리골교회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장대현교회」 이칭 「널다리교회, 판동」 백과
창립기 한자板洞敎會(판동교회)위 백과; 길선주 친필 추정 『吉靈溪歷史』 16쪽에 「板洞」 실재 1차·2차경유
중간 표기장대재교회 / 평양 장대재예배당국사편찬위 『신편한국사』가 1907년 독노회 창설지를 「평양 장대재예배당」으로 표기 1차
선교사 영문Pyeng Yang Central Church / Central Presbyterian ChurchGraham Lee·Moffett의 1900-1901 스테이션 연례보고 표제 「Pyeng Yang City Church」 1차; Princeton 「Moffett Korea Collection」 소장 사진 「Central Presbyterian Church 1900」 1차
후대 로마자Changdaehyun / Jangdaehyeon—
▣ 실무에 바로 쓰이는 사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한글로 「장대현」을 넣으면 35건, 한자로 「章臺峴」을 넣으면 248건이 나옵니다. 일제강점기 신문기사를 보시려면 반드시 한자로 넣으셔야 합니다. 1차

위치. 평양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장대재 언덕입니다. 선교부가 이 언덕에 2,600여 평 부지를 매입했습니다 언론. 이 자리는 지금의 만수대 일대 — 1972년 김일성 동상이 선 곳입니다 언론. (오늘날 평양에 「장대현교회」라는 교회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19장에서 다룹니다.)

2. 전사(前史) — 토마스 순교(1866)와 널다리골

2-1. 다툼이 없는 뼈대

항목내용등급
인물Robert Jermain Thomas(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영국 웨일스 출신 런던선교회 선교사학술
생년1840. 9. 7 (일부 기술은 1839년생) — 두 갈래로 유통된다언론 미확인
승선1866. 8. 9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로 중국에서 조선을 향해 출발언론
좌초1866. 9. 4 대동강 진흙 바닥에 좌초언론
사망1866. 9. 2 또는 9. 5 — 출처가 갈린다언론 미확인
연구소 연표「1866년 9. 제너럴 셔먼호 대동강에서 소각, 토마스 순교」학술
⚠ 사망일부터 통일되지 않는다

같은 교계 매체 안에서도 「9월 2일」과 「9월 5일」이 함께 쓰이고, 좌초일(9월 4일)보다 사망일(9월 2일)이 앞서는 자기모순 표기까지 유통됩니다. 이 글은 어느 한쪽을 고르지 않습니다. 미확인

2-2. 「순교인가 아닌가」 — 학계가 갈라져 있다

▣ 여기는 갈립니다 ① — 토마스는 순교자인가

(가) 순교 부정·유보론

논자핵심 논지
옥성득
(UCLA)
“1905년 이전 한국이나 중국에서 토마스 목사의 죽음을 순교로 본 선교사는 없었다” — 순교 미화는 1909년 무렵부터, 특히 1915년 존스(G. H. Jones)가 처음 순교로 언급하면서 시작되었다 학술
한규무「오문환의 『도마스牧師傳』과 토마스의 ‘순교’ 문제 검토」,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45호(2016), 51-88쪽. 초록 축자: “순교도 각오했지만 신앙이나 선교가 아닌 다른 이유로 희생되었다면 그는 순교자라 부르기 어렵다” / “토마스와 崔蘭軒이 같은 인물이란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학술
이만열·한규무 등
(1980년대~)
제너럴셔먼호는 선교선이 아닌 중무장 상선이며 입항 불허 명령에 불복한 불법 항해였다. 『고종실록』은 배가 불탄 뒤 성난 군중에게 붙잡혀 죽은 것으로 적을 뿐 순교로 기술하지 않는다 학술 언론

(나) 순교 긍정론

논자핵심 논지
박용규
(총신대)
「토마스, 그는 순교자가 아닌가」. 비판론은 토마스 개인의 선교 의도와 제너럴셔먼호의 상업·군사적 성격을 혼동한다. 1866년 서한에 드러난 전도 의지, 그에게서 성경을 받은 초기 한국인 지도자들의 증언을 근거로 든다. 동시에 양쪽 모두 한국 관찬기록은 무비판 수용하고 선교사 기록은 배척하는 비대칭을 지적한다 학술
이은선「1920년대까지 R. J. 토마스 선교사의 사역에 대한 인식 형성과정 고찰」, 『장신논단』 제48권 제4호(2016), 169-197쪽. 요지: 1890년대 아펜젤러·게일이 셔먼호 사건을 알렸고, 그레이엄 리·언더우드가 “토마스가 조선에 성경을 반포하러 온 첫번째 장로교 선교사”임을 전했으며, 1909년 선교 25주년 기념식에서 마펫이 공식 평가 → 1915년 감리교 존스가 미국에서 순교로 기술 → 오문환이 1926년 『평양양란』으로 대중화 → 1926년 장로교 총회가 수용 → 1932년 순교기념교회 봉헌. 결론: “오문환의 순교 해석은 기존 선교사들의 인식을 계승·대중화한 것이지, 1920년대에 새로이 창조된 것이 아니다” 학술

이 글의 처리: 판정하지 않습니다. 2016년에도 『장신논단』과 『한국기독교와 역사』에서 정면으로 맞붙은 미결 쟁점입니다. 다만 양쪽 모두가 동의하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 “토마스를 순교자로 부르는 담론은 사건 당시가 아니라 40~60년 뒤에 형성되었다”는 것. 옥성득은 이를 ‘만들어진 기억’으로, 이은선은 ‘계승·대중화’로 다르게 해석할 뿐 형성 시점(1909~1926) 자체는 다투지 않습니다. 학술

2-3. 「성경으로 도배한 집」 이야기 — 가장 조심해야 할 대목

교회에서 가장 자주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대목이 사료와 가장 심하게 어긋납니다. 먼저 널리 유통되는 서사를 축자 그대로 옮깁니다.

“셔먼호의 불타는 광경을 목격한 이들 가운데 12세 된 최치량은 토마스가 주는 세 권의 성경을 받고 보관하고 있다 겁에 질려 영문주사(營門主事) 박영식(朴永植)에게 주었다. 박영식은 이것을 뜯어 자기 집 벽지로 발랐고, 최치량은 성경책으로 도배한 박영식의 집에 갔다 벽에 붙여 있는 성경 말씀을 읽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성경을 뜯어 벽지로 바른 이 집은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이 되었다. 널다리골 교회가 장대제 교회가 되었고 후에 장대현 교회가 되었다.”

교계 매체가 반복 서술하는 서사 언론

“토마스는 죽기 전에 박춘권에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면서 성경책을 전해주었다”
“12세의 소년 최치량이 성경책이 금서(禁書)임을 알고 겁이 나서 가지고 온 것”
“박영식이 자신의 집을 예배처소로 내놓아 평양 최초의 교회 창설”

허명섭(시흥제일교회), 「성경으로 도배된 집과 평양 복음화」, 『한국성결신문』 847호, 2012. 4. 4 언론

한국기독교사연구소가 정리한 성경 수령자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학술.

수령자수령 장소이후
홍신길(洪信吉)장사포훗날 강서교회 및 평양 판동(널다리골)교회 설립자의 한 사람
김영섭·김종권석정호교회 설립자가 됨
최치량만경대, 12세성경 3권 수령 → 박영식의 벽지 성경을 읽고 기독교인
박춘권—토마스를 죽인 병사. 후일 회심, 안주교회 영수. 조카 이영태가 성경 번역에 기여

이 이야기의 활자 출처는 오문환 『도마스牧師傳』(1928)과 그 계열 저작(『평양양란』 1926)입니다 학술. 박용규 논문은 “성경 수령 기록은 대체로 오문환의 1928년 『도마스 선교사전』에서 유래하며, 동시대 문서기록이 아니라 구술 증언에 의존한다”고 지적합니다 학술. 또 아펜젤러·언더우드 부부가 남긴 초기 서북 선교여행 기록에 이 일화가 나오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습니다(다만 이 지적 자체는 편집 통제가 없는 매체의 것이라 등급이 낮습니다).

▣ 여기는 갈립니다 ② — 「성경 벽지집」이 곧 널다리골 예배당인가
서술내용등급
통설 A성경으로 도배된 박영식의 집이 그대로 널다리골 예배당이 되었다언론(교계지 다수)
사료 계열 B마펫 일행은 널다리골(板洞)에 있는 홍종대(洪鍾大) 소유의 기와집을 매입하여 예배당으로 썼다학술 언론 (국사편찬위 계열 서술 및 교회사 연재가 일관되게 이 표현을 쓴다)
절충 서술 C박영식의 벽지집은 최치량이 사서 여관(주막)으로 운영한 집이고, 마펫이 그 주막에서 전도를 시작했으며, 예배당은 별도로 홍종대의 기와집을 샀다언론

이 글의 처리: A와 B는 양립하지 않습니다. C가 둘을 봉합하지만, C 자체도 1차 사료로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확정할 수 있는 것은 B의 「홍종대 기와집 매입」이 국사편찬위원회 계열 서술과 교회사 연재에서 일관되게 반복된다는 사실뿐입니다. “성경 벽지집이 곧 교회 건물이 되었다”는 진술은 1차 사료로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미확인. 이야기를 매끄럽게 하려고 A를 채택하지 않습니다.

2-4. 다만, 확실한 연결고리는 따로 있다 — 박춘권의 세례

“1899년 이 교회에서는 병인양요 때 중군(中軍)으로 활약하여 관찰사 박규수(朴珪壽)의 포계(褒啓)로 안주 우후(虞候)라는 직책을 받은 바 있던 박춘곤(朴春坤)이 세례를 받으면서 신도가 급증하여, 교회당을 장대현에 건립하게 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장대현교회」 (집필 1995 민경배, 최종수정 2024. 1. 26) 백과

“1899년 영국인 선교사 토마스 순교 당시 가담자였던 박춘권이 교회를 찾아 회개하고 세례를 받음” — 마펫에게 수세

교회사 연재 언론
▣ 여기는 갈립니다 ③ — 박춘곤(朴春坤)인가 박춘권(朴春權)인가

백과사전은 「박춘곤(朴春坤)」으로, 교계·교회사 서술 다수는 「박춘권(朴春權)」으로 적습니다. 두 기록 모두 ① 1899년 ② 장대현(널다리골)교회에서 세례 ③ 셔먼호 사건 관련 인물 ④ 안주 우후라는 동일한 프로필을 가리키므로 동일인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추론. 그러나 어느 표기가 옳은지는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미확인. 두 표기를 모두 남깁니다.

▣ 이 세례가 중요한 이유

백과사전이 “박춘곤이 세례를 받으면서 신도가 급증하여, 교회당을 장대현에 건립하게 되었다”고, 곧 장대현 이전(移轉)의 직접 계기로 서술하기 때문입니다. 즉 토마스와 장대현교회의 연결은 「성경 벽지집」이 아니라 「토마스를 죽인 자의 세례」를 통해 사료에 남았습니다.

3. 설립 — 널다리골교회(1893~1894)

3-1. 설립 연월일이 최소 다섯 갈래다

▣ 여기는 갈립니다 ④ — 이 교회는 언제 세워졌는가
설날짜내용출처·등급
①1893년 2월마펫이 자신의 널다리골 집에서 평양 첫 교회를 창립원출처 확인 못함 미확인
②1893년 5~6월한석진이 1월부터 상주 → 5월부터 마펫도 함께 머물며 20여 명을 모아 홍종대의 기와집 매입, 예배 = 널다리교회의 시작 (가장 널리 유통)언론 학술
③1893년(월 미상)널다리골에 4~5명이 모여 예배한 것이 시작학술
④1894년 1월 7일마펫이 대동문 안의 널다리골에 교회를 개척강석진(『근현대사로 읽는 북한교회사』), 기독일보 2022. 1. 19 언론
⑤1894년 1월 8일「평양널다리골교회(장대현교회) 설립」한국기독교사연구소 공식 「한국기독교사 연표」 학술

이 글의 정리 추론:

  • 1893년 = 선교 거점 확보·예배 시작 (집회 공동체의 발생)
  • 1894년 1월 7~8일 = 세례 7명 + 첫 성찬식 → 제도적 교회의 성립
    근거 축자: “1894 January 8: Seven baptisms performed; first communion service held”, 그리고 “1894년 1월에 22명의 학습 교인 확보, 7명이 세례 교인 등록” 학술 언론
  • 다만 7일이냐 8일이냐는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미확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아예 연도만 말합니다 — 축자: “1893년 모펫(Moffett, S. A.)이 평양에 선교사업을 위해 정착하면서 한석진(韓錫晉)을 조사(助師)로 삼아 널다리(板洞)에 세웠던 회당으로 처음에는 교회 이름을 ‘판동’ 또는 ‘널다리교회’라고 하였다.” 백과

3-2. 누가 무엇을 했는가

인물한자·원어역할등급
마포삼열Samuel Austin Moffett (1864-1939) / 馬布三悅미 북장로교. 1890년부터 평양 순회 → 1893년 평양 정착. 장대현교회 개척자. 초대 평양신학교 교장. 1907년 독노회 초대 회장학술 백과
한석진韓錫晉 (1868-1939)마펫에게 세례받은 뒤 1893년 1월 마펫이 평양에 데려옴, 조사(助師)로 십수 년 사역. 평양 개척의 실무 주역. 1907년 7인 목사 중 1인, 독노회 서기학술 언론
최치량崔致良 (1854-1930)물상객주. 대동문 안에서 주막·여관 운영. 마펫이 그 주막에서 전도를 시작. 평양 최초로 마펫에게 세례언론
홍종대洪鍾大널다리골 기와집의 소유주 — 이 집을 매입해 예배당으로 삼았다학술 언론
이동승—최초 영수(領袖)로 임명언론
홍신길洪信吉토마스에게 장사포에서 성경 수령 → 훗날 강서교회 및 평양 판동(널다리골)교회 설립자의 한 사람학술
이영언—교사로 임명되어 학생 모집·사숙 운영 → 훗날 숭실학교로 발전언론

3-3. 당사자의 친필이 이 장면을 증언한다

길선주 친필로 추정되는 『吉靈溪歷史』 16쪽입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도서관 소장 필사본이며, 오혁(2025) 논문 69쪽이 인용한 것을 인쇄된 그대로 옮깁니다. 1차·2차경유

一日은 西洋人 馬布三悅 牧師가 板洞 와셔 畄하며 西洋道를 传한다함을 듯고 韓锡晉 助事와 馬布三悅 牧師를 數次 寻访 谈话한 事가 잇고 友의 文洪俊을 引導하여 韓锡晉 助事와 馬布三悅 牧師의게 绍访한 事가 잇ᄯᅡ.

어느 날 서양인 마포삼열 목사가 널다리골(板洞)에 와서 머물며 서양의 도(道)를 전한다는 말을 듣고, 한석진 조사와 마포삼열 목사를 여러 차례 찾아가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고, 벗인 문홍준을 인도하여 한석진 조사와 마포삼열 목사에게 소개한 일이 있다.
※ 板洞=널다리골, 馬布三悅=마포삼열, 韓锡晉=한석진. 한자 간체 표기는 논문 인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이것은 길선주 필사본군 전체에서 장대현교회 계보를 직접 증언하는 유일한 축자 인용입니다.

같은 장면을 아들 길진경이 정리한 전기는 이렇게 적습니다. 학술

“선생은 널다리골에 주재하면서, 새 교를 전한다는 소문을 듣고 마포 삼열 선교사를 방문하고 교리에 대한 담론을 나눈 일이 있었다. 그 후 1893년 봄에 선생은 자기의 친구 문 홍준 씨를 마포 삼열 선교사와 한 석진 씨에게 소개했고, 그 해 여름에 도우(道友) 김 종섭 씨를 소개했다.”

길진경, 『靈溪 吉善宙』(1980), 44쪽

→ 1893년 봄·여름에 이미 널다리골에서 마펫·한석진이 활동 중이었음을 길선주 측 사료가 뒷받침합니다. 1차 학술

3-4. 초기 몇 해의 사건

연월일사건등급
1893. 1.마펫이 한석진을 평양에 데려옴 → 한석진 상주언론
1893. 5.마펫도 함께 머묾. 20여 명을 모아 홍종대 기와집 매입, 예배언론
1893. 10.마펫, 첫 사경회 개설 — 참가자 22명학술
1894. 1. 7
또는 1. 8
세례 7명, 첫 성찬식 → 교회 설립일로 기록됨. 학습교인 22명학술 언론
1894.숭덕학교 설립(평양 관후리, 마펫과 선교사 2인). 널다리골교회 안의 「예수학당」에서 숭덕(남)·숭현(여) 학교가 발전언론
1894.로제타 홀(Rosetta Hall) 여의료선교사 평양 도착학술
1896.교인 300여 명으로 증가언론
1897. 2.배위량(W. M. Baird)이 선교 근거지를 평양으로 옮김 → 자기 사저 사랑방에 학생 13명을 모아 숭실학당 출범언론 학술
1898. 봄여신도 이신행(李信行)·박관선(朴寬善)·김성신(金聖信) 등을 중심으로 부인전도회 조직백과
1899.박춘곤(박춘권) 세례 → 신도 급증 → 장대현 예배당 건립 결정백과 언론

부인전도회에 대하여 — “이것은 한국 근대사에서 어떤 형태로든 여자들만으로 구성된 기독교 이념의 목적적 조직체로는 최초의 것이었다.”

박관선에 대하여 — “박관선은 1909년 제주도에서 선교활동을 벌여 여권 신장에도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장대현교회」 백과

※ 「1898년 2월 20일 최초의 부인전도회 조직」이라는 날짜가 따로 유통되나, 장대현교회 건인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미확인. 백과사전은 「1898년 봄」이라고만 합니다.

4. 장대현 이전과 「ㄱ자 예배당」(1900~1901)

4-1. 왜 옮겼는가

4-2. 건축 경과 — 이 글에서 가장 단단한 대목(단, 등급에 주의)

▣ 선교사 서신·연례보고를 각주로 단 서술 1차·2차경유

미국 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소장 Samuel H. Moffett Manuscript Collection 및 Presbyterian Historical Society 소장 William M. Baird Papers를 각주로 단 서술입니다. 각주 서지를 그대로 옮깁니다.

★ 등급 주의: 아래 항목은 1차·2차경유가 아니라 1차·2차경유입니다. 아카이브 원 문서를 직접 열람한 것이 아니라, 그 각주를 단 2차 서술에서 회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각주 서지는 구체적이고 검증 가능한 형태이지만, 이것이 독립된 1차 사료의 지위를 주지는 않습니다.

★ 그리고 이 계열이 지탱하는 범위는 「공정(工程)」뿐입니다 — 착공·정초·트러스·제2 날개·감독 인계까지. 규모(72칸·120평)·수용 인원·건축비·봉헌일은 이 계열에 들어 있지 않고, 전부 백과·언론에서 온 것입니다(4-3·4-4). 두 계열을 하나로 읽지 마십시오.

사실내용각주 원출처
착공1900년 봄에 착수한 것으로 보고됨Graham Lee → 부모, 1900. 5. 27 / 6. 17 서신 (Moffett Manuscript Collection, Princeton)
정초석
(cornerstone)
1900년 6월 25일Samuel A. Moffett, Report for 1899-1900, loose memorandum (동 컬렉션)
설계·감독Graham Lee(이길함). 그의 자평 축자: “a pretty large problem to tackle”, “our carpenters know nothing about framing such a structure and that I know very little about the practical laying out of the work”
꽤 큰 문제를 떠맡았다 / 우리 목수들은 이런 구조의 뼈대를 어떻게 짜는지 전혀 모르고, 나 또한 실제 시공 배치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위 Lee 서신
구조지붕 트러스 36피트 스팬, 데릭(derrick)과 로프로 들어 올림 (삼촌 농장에서 익힌 방법)Lee 서신 1900. 5. 27
실무 목수Dr. Alfred M. Sharrocks — “practical carpenter”로서 “very valuable assistance to Mr. Lee in what has been a truly great undertaking”Moffett → Dr. Ellinwood, 1900. 10. 22
1차 완공 목표1900년 말위
제2 날개1901년 4월 착공, 6월에 지붕을 올림위
감독 교체Lee가 1901년 중반 한국을 떠나자 George Leck이 건축을 인계받아 제2 날개 나머지 공사를 감독In Memory of George Leck(1901) / W. M. Baird, “The Academy,” Annual Report of Pyeng Yang Station, For The Year 1900-1901 (PHS)
갤러리(2층 발코니)1902년에 추가하기를 희망했으나 실제 건축 여부는 불명 미확인Moffett & Graham Lee, “Pyeng Yang City Church,” 동 연례보고 (PHS)

※ 한 가지 밝혀 둡니다. 이 각주들은 아카이브를 직접 조회해 얻은 것이 아니라, 그 각주를 단 2차 서술에서 회수한 것입니다. 각주 서지 자체는 구체적이고 검증 가능한 형태이지만, 원 문서를 직접 본 것은 아닙니다.

4-3. 규모 — 숫자가 갈린다

항목값 A값 B값 C
칸수72칸 백과72간 언론 (동일)—
평수120평 언론——
수용인원약 1,500명 학술약 2,000명 언론2천여 명 언론
봉헌 참석남녀 교인 1,500명 운집 언론——
▣ 해소됨 — 「72칸 = 120평」은 서로 어긋나지 않습니다

두 수치는 서로 다른 출처에서 왔고 한 문헌 안에 함께 제시된 적이 없어, 이 글의 초판은 이것을 미확인으로 남겼습니다. 그러나 계산해 보면 정합합니다.

120평= 396.7㎡
÷ 72칸= 칸당 5.51㎡ (한 변 약 2.35m)
전통 「8자 칸」= 2.42m 사방 = 5.86㎡ — 거의 일치합니다

「칸(間)」은 면적 단위가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의 구획이므로 고정 환산율이 없습니다. 그래서 두 수치를 바로 비교할 수 없었던 것인데, 전통 목조 칸 규모를 넣어 보면 72칸과 120평은 무리 없이 양립합니다. 검증에서 지적받아 미확인에서 내렸습니다.

⚠ 반대로, 「수용 인원」 쪽은 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같은 120평(396.7㎡)을 사람 수로 나누면 이렇게 됩니다. 강단·기둥·통로를 전혀 빼지 않은 총면적 기준입니다.

인원1인당 면적판정
1,200명0.331㎡빽빽하나 가능
1,500명0.264㎡좌식 극한 밀집의 한계선(대략 0.25~0.30㎡/인)
2,000명0.198㎡불가능
3,000명0.132㎡불가능

그러므로 「수용 2,000명」(위 표 값 B·C)과, 뒤에 나오는 「교세 3,000명」은 건물이 한꺼번에 담을 수 있는 인원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이 수치들은 교적부(敎籍簿)에 오른 교인 수이거나, 여러 차례의 예배를 합한 수이거나, 계통 전체를 센 수일 가능성이 큽니다 — 어느 쪽인지는 출처가 밝히지 않습니다 → 미확인. 좌석 수로 인용하시면 안 됩니다.

※ 참고로, 1차 계열이 전한 지붕 트러스 36피트(약 10.97m) 스팬으로 396.7㎡를 나누면 길이 약 36m가 나옵니다 — 두 날개 길이의 합계로는 무리 없는 값입니다 추론. ※ 또 하나: 「1900년 준공 72칸」과 「1901년 4월 제2 날개 착공」이 같은 최종 건물을 가리킨다면 서로 부딪칩니다. 1900년 말에 선 건물은 아직 두 날개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1차 계열 기록에서 곧바로 나옵니다 → 미확인. 즉 「72칸·120평」이 어느 단계의 수치인지도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4-4. 건축비와 헌금 — 두 계열이 정면으로 다르다

▣ 여기는 갈립니다 ⑤ — 누가 얼마를 냈는가
계열서술(축자)합계출처
A“한국인 교인들의 헌금액 5,000여 원과 선교사 보조금 수천 원으로 72칸의 교회당 건립에 착수하여, 1900년 준공하였다.”한국인 5,000여 원 + 선교사 수천 원 ≒ 8,000원 안팎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장대현교회」(민경배). 참고문헌은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1928) 단 1종 백과
B“신자의 증가로 예배당을 신축하기로 하고 광고하자 3000여원이 헌금되어 총공사비 7000여원을 들여 장대현 언덕에 72간의 예배당을 건축했다.”헌금 3,000여 원 / 총공사비 7,000여 원언론

두 계열은 같은 항목을 가리키는지조차 불명입니다. A의 「한국인 5,000여 원」이 한국인 헌금 총액인지 최종 정산인지, B의 「3,000여 원」이 착공 전 약정액인지 알 수 없습니다. 둘 중 하나를 고르지 않고 병기합니다 미확인.

★ 한국인 부담률을 두 계열로 계산하면 이렇게 됩니다.

계열한국인 부담총액부담률
A5,000여 원≒ 8,000원 안팎약 62.5% — 절반을 넘습니다
B3,000여 원7,000여 원약 42.9% — 절반에 못 미칩니다

그러므로 「어느 쪽으로 읽어도 한국인이 절반 이상을 부담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B로 읽으면 3,000 ÷ 7,000 = 42.86%로 절반 미만입니다. 이 글의 초판에는 그 잘못된 단정이 실려 있었고, 검증에서 지적받아 삭제했습니다. 감동적인 문장을 위해 숫자를 굽히지 않습니다.

※ 덧붙여, B의 축자(“신자의 증가로 예배당을 신축하기로 하고 광고하자 3000여원이 헌금되어”)는 헌금 주체가 한국인이라고 명시하지 않습니다. 문맥상 회중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러우나, 그것도 확정은 아닙니다 미확인.

※ A를 「더 믿을 만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백과사전의 참고문헌 목록에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1928)가 있다는 사실은 그 숫자가 그 책에서 나왔다는 증명이 아닙니다. 집필자가 여러 자료를 종합했거나 스스로 계산했을 가능성이 배제되지 않습니다. 확정하려면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권 실물을 확인해야 합니다(→ 부록 ②).

4-5. 「ㄱ자」라고 불리는 평면 — 남녀 분리와의 관계

“예배당은 ㄱ자로 건립되어 한때 남녀가 따로 한쪽 칸을 차지하여 앉도록 한 일도 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장대현교회」 백과

그런데 남녀를 한자리에 앉힐 수 없다는 문제를 건축으로 푼 기록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장대현 이전, 대동문 근처 예배처를 고칠 때의 마펫 보고서입니다. 1차·2차경유

“to floor what is now the kitchen thus joining the two wings of the building so as to place the pulpit at their junction, allowing the preacher to face the men gathered in one part and the women gathered in the other.”

지금의 부엌에 마루를 깔아 건물의 두 날개를 이어 붙이고, 강단을 그 접점에 두어 설교자가 한쪽에 모인 남자들과 다른 쪽에 모인 여자들을 동시에 마주 볼 수 있게 한다.

S. A. Moffett, Evangelistic Work in Pyeng Yang and Vicinity, 1895년 10월, Moffett Manuscript Collection, Princeton
⚠ 이 인용이 말하는 것 / 말하지 않는 것 —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 문장이 말하는 것: 조선 사회의 내외법(남녀유별) 아래 남녀를 한 공간에 앉힐 수 없으므로, 건물의 두 날개(two wings)를 이어 붙이고 그 접점(junction)에 강단을 놓아 한 사람의 설교자가 두 회중을 동시에 대면하게 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 이 문장이 말하지 않는 것: 원문에는 「L-shaped」도, 「right angle」(직각)도, 「ㄱ자」에 해당하는 표현도 하나도 없습니다. 있는 것은 two wings와 junction뿐입니다. 두 날개가 직각으로 만났는지는 이 문장으로 확정되지 않습니다(T자·V자도 같은 문장으로 서술될 수 있습니다). 「ㄱ자」라는 표현은 후대의 한국어 서술이며, 이 글에서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 후대 문헌이 그렇게 적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글은 “ㄱ자는 미적 선택이 아니라 기능적 해법이었다”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이 글의 초판에는 그 단정이 실려 있었고, 검증에서 지적받아 거두었습니다. 1895년 문서가 지탱하는 것은 「두 날개 + 접점의 강단 + 남녀 분리 대면」이라는 설계 의도까지이며, 그것을 넘는 형태 규정은 이 문서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 그리고 이 1895년 기록은 장대현 예배당이 아니라 그 이전 「동문(east gate) 예배처」의 개조에 관한 것입니다. 1900년 장대현 예배당의 평면 형태를 누가 왜 그렇게 결정했는지는 사료로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미확인. 확인되는 것은 남녀 분리라는 같은 과제를 건축으로 푸는 발상이 5년 앞서 같은 선교부에 이미 있었다는 사실뿐입니다.

※ 이 ㄱ자 칸막이는 30년 뒤 1927년 분규의 심층 쟁점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4-6. 준공·개칭 연도 — 가장 심하게 갈리는 대목

▣ 여기는 갈립니다 ⑥ — 언제 완공되었고 언제 「장대현교회」가 되었는가
항목후보출처·등급
준공1900년백과 축자 “1900년 준공하였다”
1900년 6월 정초 → 1901년 6월 봉헌언론
1900년 말 1차 완공 → 1901년 4~6월 제2 날개1차·2차경유 (스테이션 연례보고·Lee 서신 기반)
장대현 이전1901년 (“1901년에는 교회가 크게 부흥되어 평양의 중앙인 장대재로 이전”)언론 강석진
「장대현교회」로 개칭1899년백과 축자 “그 후 1899년 장대현(장대재)교회로 바꾸었다”
1900년 6월언론
1903년 — 가장 널리 반복되는 표현언론 학술 “원래 명칭은 널다리교회였으나 1903년 예배당의 완공과 더불어 교회명을 장대현교회로 개칭했다”

이 글의 정리 추론:

  • 1차 사료(선교사 기록)와 가장 정합적인 서술은 “1900년 6월 25일 정초 → 1900년 말 1차 완공(예배 개시) → 1901년 6월 제2 날개 완공·봉헌”입니다. 「1901년 6월 봉헌 시 1,500명 운집」이 이 정합성과 맞물립니다.
  • 「1903년 완공·개칭」설은 널리 유통되지만 1900-1901년 선교사 1차 기록과 어긋납니다. 다만 갤러리 증축(1902년 희망분)까지 포함한 ‘완전 완공’을 1903년으로 잡았을 가능성은 배제하지 않습니다.
  • 「1899년 개칭」(백과사전)은 건물 준공 이전이므로 지명 이전(移轉) 결정 시점을 개칭으로 잡은 것일 수 있습니다.

→ 어느 것도 확정하지 않습니다. 미확인

제 2 부부흥

1907년 1월, 한겨울 평양에서 열흘 남짓한 사경회가 있었습니다. 이 글의 절정이자, 한국 개신교사가 「오순절 사건」이라 부르는 자리입니다.

5. 교세 — 확인되는 수치 전량

시점수치성격등급
18934~5명널다리골 최초 예배 인원학술
1893. 5.20여 명홍종대 기와집 매입 시 모인 교인언론
1893. 10.22명첫 사경회 참가자학술
1894. 1.세례 7명 / 학습 22명첫 세례·첫 성찬학술 언론
1896300여 명교인언론
1901평양 관하 18개 예배처소 설치모교회로서의 확장언론
1901. 6.1,200~1,400명
축자: “장대현교회로도 불린 널다리골교회는 새 건물 봉헌식을 가진 1901년 6월 당시 벌써 교인 수 1,200-1,400명에 이르는 대형교회였다.”
교인이재근(광신대), 『복음과상황』 395호(2023.10) 학술
1901. 6.1,500명봉헌예배 운집 인원언론
1906. 가을300~500명새벽기도회 상시 참석언론
1907. 1.약 1,000명평안남도 남자 도사경회 참가자 — 인용 축자 “그때까지 열린 어떤 사경회보다 많은 수”.
※ 1차 선교보고 원문에 닿지 않고 교계 매체에서 순환하는 수치입니다 → 등급을 언론으로 내립니다
언론
1907. 1. 6 저녁1,500명저녁집회. 여신도는 자리가 없어 밖에 자리를 만들어 참석언론
1907. 1. 14~15500~600명새벽 2시까지 남은 철야 인원1차(번역) 학술
1906년 이후3,000명
“1906년 1월 장대현교회는 네 번째로 산정현교회를 분립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교세가 3,000명으로 급증했다”
교인
※ 120평 건물에 3,000명은 1인당 0.132㎡로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4-3). 좌석 수가 아니라 교적부상 교인 수 등으로 읽어야 합니다 — 무엇을 센 수인지 출처가 밝히지 않습니다
언론 — 원출처 미확인 미확인
1910년대2,000여 명“부흥을 거듭하여 2천여 명의 성도들이 모였다”언론 강석진
19301,209명→ 14장 참조. 이 시점 서문밖교회는 3,000명선교단체

참고 — 전국 개신교 교세. (장대현교회 수치가 아닙니다. 부흥의 파급을 보는 배경 지표입니다.) 1905년 37,407명 / 1907년 72,968명 커뮤니티 — 재검증 필요  ·  “1907년 3만 7천여 명 → 1911년 14만 4천여 명(4배 이상)” 언론 — 앞 수치와 기점이 어긋납니다  ·  1910년 장로교공의회 소속 선교사 67명·한국인 사역자 36명·예배소 287개소 1차(국사편찬위 『신편한국사』)  ·  1919년 장로교 신자 60,954명 미확인. ⚠ 전국 통계는 출처마다 기점과 값이 어긋납니다. 이 글은 이 수치들로 어떤 결론도 내리지 않습니다.

⚠ 끝내 확보하지 못한 것

장대현교회 자체의 연도별 세례교인·학습인 공식 통계. 이 수치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록』·독노회록·평양노회록 계열 통계표에 있을 것이나, 평양노회록은 남한 공개 목록에 없고, 독노회록은 국립중앙도서관 1개관에서 열람료를 내야 볼 수 있습니다. 미확인

6. 1907년 1월, 평양대부흥

6-1. 예비 단계(1903~1906)

시점사건등급
1903원산에서 하디(R. A. Hardie) 중심의 부흥 발생 → 1906년부터 전국 확대백과
1906. 8.평양 주재 선교사들의 1주일 영적 심화 사경회 개최학술
1906. 가을길선주 장로가 당회 결의를 얻어 전 교인 새벽기도회를 시작, 친구 박치록(朴致祿) 장로와 함께 인도. 상시 300~500명 참석
축자: “1906년 가을 그는 당회의 결의를 얻어 전 교인이 참여하는 새벽기도회를 시작했고, 교회 단위의 정기 집회로 정착시킨 것”
언론
1906. 12. 12
~ 12. 22
재령에서 황해도(재령) 남자 도사경회 — 길선주 인도. 이 자리에서 김익두가 성령 역사를 체험했다.
한국기독교사연구소 공식 연표 원표기: 「1906年 12月 12-22 길선주의 황해도 재령 남자 도사경회, 김익두 성령 역사 체험」 — 12일부터 22일까지의 한 기간입니다.
학술 언론 이재근

※ 정정 기록: 이 글의 초판은 ⌀1906. 12. 12、과 ⌀1906. 12. 22、를 서로 다른 두 설로 적어 「갈립니다」 항목에 올렸습니다. 그러나 연구소 연표의 원표기는 「12月 12-22」라는 하나의 기간이었습니다. 초판이 뒷숫자만 옮겨 존재하지 않는 충돌을 만들어 냈고, 검증에서 지적받아 바로잡았습니다.
※ 다만 1904년경에 새벽기도회를 시작했다는 서술이 일부에 있어 1906년 가을설과 충돌합니다 미확인.

6-2. 당사자 친필 — 길선주 본인은 이 겨울을 어떻게 적었는가

一九0六年 冬期 大査经 ᄯᅢ의 圣神 降临하다

1906년 동기(冬期) 대사경 때에 성신(聖神) 강림하다

『1922년 길선주 수첩』 10쪽 (장로회신학대학교 도서관 소장 친필) — 오혁(2025) 논문 82쪽 인용 1차·2차경유

아들 길진경의 해독: “1922년 일기책을 보면 친필로 ‘1906년 동기 대상경회 때에 성신 강림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靈溪 吉善宙』 183쪽) 학술. 같은 수첩 200쪽에는 찬양대원 명단이 들어 있습니다 1차·2차경유.

⚠ 이 친필을 읽을 때 두 가지
  • 이 문장에 ‘장대현’이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장대현교회 사경회로 읽는 것은 길선주의 시무지와 통설에 근거한 추론이며, 오혁 논문은 그렇게 못 박지 않았습니다 추론.
  • 길선주는 「1907년」이 아니라 「1906년 동기(冬期)」라고 적었습니다. 음력·회기(會期) 기준으로 1906년 겨울 사경회가 양력 1907년 1월에 열린 것이므로 모순은 아닙니다 추론. 그러나 당사자 본인의 표기가 “1907”이 아니라 “1906”이라는 점은 기록해 둘 가치가 있습니다.

6-3. 1907년 1월 — 날짜별 경과

먼저 요일을 고정합니다(양력 계산). 1907년 1월 1일은 화요일입니다. 따라서 6일=주일, 12일=토요일, 13일=주일, 14일=월요일, 15일=화요일, 16일=수요일.

날짜사건등급
1. 2 ~ 1. 15평안남도 (동계) 남자 도사경회 — 장소 평양 장대현교회. 참가 약 1,000명(남자), 당시까지 최대 규모라고 전한다
※ 이 수치도, 아래 1월 6일의 1,500명도 1차 선교보고가 아니라 교계 매체 순환 인용입니다 미확인.
※ 이 도사경회(남자 광역 집회)와 1월 6일 시작된 연합 저녁집회(남녀)는 모집단이 다릅니다. 두 수치를 더하거나 한 곡선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언론
1. 6 (주일)평양 시내 네 장로교회 연합 저녁집회 시작 — 장대현교회. 약 1,500명 참석. 남녀를 분리해 진행
※ 흔히 함께 붙는 「영하 30도」는 1차 근거가 한 건도 없이 교계 매체에서만 순환하는 수치입니다. 참고로 평양의 근대 관측 사상 최저기온은 1973년 1월의 −26.5℃로, −30℃는 이를 넘어섭니다 (1907년은 근대 관측 이전이므로 “틀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 미확인
언론
1. 12 (토)방위량(W. N. Blair) 고린도전서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설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언론 학술
1. 12 저녁Graham Lee 보고 축자: “토요일 저녁집회는 그 때까지 열린 저녁 집회 중에 최고였다”1차(번역)
1. 13 (주일)Graham Lee 보고 축자: “집회는 냉랭했고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떠난 것처럼 보였다”1차(번역)
1. 14 정오정오 기도회1차(번역)
★ 1. 14 (월) 저녁절정. 윌리엄 헌트(William Hunt)가 메시지를 전하고, 이길함(Graham Lee)이 나와 통성기도를 인도했다. Lee 보고 축자: “간단한 설교가 있은 후 우리는 함께 통성기도를 드렸으며” — 수백 명이 죄를 고백하고 울며 통회. 새벽 2시까지 계속1차(번역)
★ 1. 14 (월) 저녁길선주의 공개 자복. 1년 전 세상을 떠난 친구가 맡긴 재산(유산) 일부를 사취한 죄를 회중 앞에서 고백학술 언론
1. 15 (화)Lee 보고: “성령의 현시는 더 강력했음”. 약 600명이 남아 새벽 2시까지. 교인들 사이의 오랜 미움이 풀리는 장면이 목격됨1차(번역)
1. 16 (수)숭현여학교와 남학교·초등학교로 확산 — “똑같은 성령의 현시”1차(번역)
1. 15 이후길선주가 1개월을 더 계속 사경회를 인도, 그 기간에 수천 명이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서술언론 → 원출처 미확인
~1907. 4.부흥이 계속됨언론
1908.만주·중국으로 파급언론

6-4. 길선주가 무엇을 고백했는가 — 판본이 갈린다

▣ 여기는 갈립니다 ⑦ — 길선주의 자복, 네 가지 판본
판본내용등급
A“1년 전 세상을 떠난 친구로부터 재산을 관리하도록 부탁받았으나 그 일부를 사취했던 죄를 고백했다”학술 (한국기독교사연구소)
B“죽은 친구의 아내가 맡긴 돈 100달러를 가로챘다”언론
C“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이올시다”라며 횡령한 100원을 고백커뮤니티
D“끈으로 자기 허리를 묶고” 선교사를 향해 나아가는 행위로 회개의 의미를 전달했다 (이 매체는 1907년 1월 13일 집회로 적는다)언론

금액 단위가 「100원」과 「100달러」로 갈리고, 맡긴 사람이 「친구」인지 「친구의 아내」인지 갈리며, 날짜도 13일/14일로 갈립니다. 원전은 William N. Blair, The Korean Pentecost(블레어의 목격 증언)로 보이나, 조사 과정에서 그 원문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한계 참조). 따라서 어느 판본도 확정하지 않습니다 미확인.

특히 “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이올시다”는 등급이 가장 낮은 출처(커뮤니티)에서만 나왔습니다. 1차 확인 없이 인용해서는 안 됩니다.

6-5. 동시대 선교사들의 보고

“우리가 웨일스·인도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에 대하여 읽었지만, 이번 장대현 교회의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지금까지 읽었던 어떤 것도 능가할 것입니다.”

방위량(William N. Blair)이 미 북장로교 선교부에 보낸 보고 — 2차 문헌 경유 인용. 원 보고서의 날짜·쪽수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미확인
⚠ 위 표의 Graham Lee 인용 4건에 대하여 — 밝혀 둘 것
  • 원전 서지는 확정되어 있습니다: Graham Lee, “How the Spirit Came to Pyeng Yang,” The Korea Mission Field, Vol. 3, No. 3 (March 1907), pp. 33-36 1차
  • 그러나 이 글에 실린 인용은 한국어 번역문(교회와신앙 2007. 1. 17 게재)에서 회수한 것입니다. 해당 게재물은 필자명·원문 서지·쪽수를 명시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번역문의 축자”이지 “원문의 축자”가 아닙니다 미확인.
  • 이 번역문에는 “1월 8일(주일)”로 표기된 대목이 있는데, 1907년 1월 8일은 화요일입니다. 양력상 주일은 6일·13일입니다. 번역 또는 전사(轉寫) 과정의 날짜 오류일 가능성이 있어, 위 표에는 요일 정합성이 맞는 1월 13일(주일) 쪽으로 배치하고 이 사실을 여기 밝혀 둡니다.

6-6. 한국인 당사자의 1차 증언 — 주공삼 장로

▣ 119년 만에 빛을 본 한국인의 목격담
증언자주공삼(朱孔三, 1875~1953), 평양 장대현교회 장로
매체『그리스도신문』
기고2회 — 1907년 1월 31일자, 1907년 2월 28일자
발굴옥성득(UCLA 석좌교수). 발굴처는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게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와 역사』 최근호 (호수·쪽수 미확인)

왜 중요한가: 옥성득의 평가에 따르면, 이 사료는 “평양대부흥이 선교사들에 의해 발명됐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근거가 됩니다 — 한국인의 직접 경험담이 동시대 활자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학술

회수된 축자 인용은 다음 4건이 전부입니다.

① 1907년 1월 31일자 (첫 번째 기고) — 부흥 현장 목격

“성신이 크게 감동함을 입어 지은 죄를 깨달아 밤마다 대성통곡하는 형제들도 많고”

② 1907년 1월 31일자 — 자백 장면(기사가 전한 표현)

“나는 사람을 속이고 재물을 먹었다”
“나는 간음을 하였다”

③ 1907년 2월 28일자 (두 번째 기고) — 자신의 회개

“내 죄가 태산같이 중하고 괴악한 것을 참으로 깊이 깨달았다. 가슴이 답답하고 통곡만 나옵나이다.”

④ 1907년 2월 28일자 — 직분에 대한 부끄러움

“예수를 믿노라고 한 지가 십여 년에…그 직분에 대해 심히 부끄럽다”

옥성득이 덧붙인 것 학술:

⚠ 한계를 밝힙니다

위 4건은 전부 보도가 인용한 것을 재인용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신문』 원지면은 보지 못했습니다. 원문 전문은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자료도서관(서울 마포구 동교로23길 118 열송재)에 『그리스도신문』 원본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인용을 확정하려면 그곳 방문 열람이 유일한 길입니다(→ 부록 ①).

6-7. 1907년이 남긴 것

항목내용등급
교회사적 명명한국교회의 「오순절(五旬節) 사건」으로 불린다언론
지리적 파급Graham Lee → 선천 / 스왈른(Swallen) → 광주 / 윌리엄 헌트(William Hunt) → 대구. 1908년 만주·중국언론
부흥의 성격“대부흥”이 아니라 “대회개(大悔改) 운동”이라는 재명명 논의가 존재한다언론
없었던 것 하나방언 현상은 없었다 (옥성득)학술

7. 분립 — 갈라져 나간 교회들

장대현교회는 자기 몸에서 여러 교회를 떼어 냈습니다. 그 순서를 1925년 간행 사기(史記)의 목차가 그대로 증언합니다.

▣ 『평양노회 지경 각 교회 사기』(1925) 제1장 평양부 목차 — 원문 그대로
1장 평양부(平壤府) 지경 각 교회사기 = 25
 1. 평양부 장대현교회사기(章臺峴敎會史記) = 25   ← pp.25~46 (약 22쪽, 최대 항목)
 2. 평양부 남문외교회사기(南門外敎會史記) = 47   ← pp.47~52 (6쪽)
 3. 평양부 창동교회사기(倉洞敎會史記)   = 53   ← pp.53~55 (3쪽)
 4. 평양부 산정현교회사기(山亭峴敎會史記) = 56   ← pp.56~62 (7쪽)
 5. 평양부 서문외교회사기(西門外敎會史記) = 63   ← pp.63~71 (9쪽)
 6. 평양부 연화동교회사기(蓮花洞敎會史記) = 72   ← pp.72~76 (5쪽)

140개 교회 중 장대현교회가 맨 앞이고, 22쪽으로 가장 깁니다. 1차

“따라서 평양의 모교회인 이 교회로부터 남문밖교회(1903), 창동교회(1905), 산정현교회(1906), 서문밖교회(1909)가 차례로 분립되었다.”

이재근(광신대 교회사 교수) 학술 — 목차 순서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순번교회분립성내 서열근거·비고
—장대현교회(모교회)제1교회『山亭峴史記』의 「平壤城內 第四敎會」 표현이 제1~제3의 존재를 전제한다 추론
1남문외(남문밖)교회 南門外1903제2교회 추론『평양노회사기』 제1장 2번 1차
2창동교회 倉洞1905 (일부 자료 1903)제3교회 추론『평양노회사기』 제1장 3번 1차
3산정현교회 山亭峴1906. 1. 7제4교회 — 문서로 확정전거는 『平壤山亭峴敎會史記』 1쪽(장로회신학대학교 도서관 소장 길선주 관련 미발간 필사본, 오혁 2025 논문 경유) 1차·2차경유 — 아래 별항.
※ 소재 「평양부 계리 55」는 선교단체 기도지도가 전한 것 선교단체
4서문외(서문밖)교회 西門外1909 (1909. 3. 14설)—『평양노회사기』 제1장 5번. 소재 평양부 하수구리 109 1차 선교단체
5연화동교회 蓮花洞연도 미확인—『평양노회사기』 제1장 6번. 1909년 이후로 추정되나 확인 못함 미확인
6신암(新巖)교회1913. 4—평양부 신양리 176-10 선교단체 — 아래 정정 참조
⚠ 널리 유통되는 오류 하나 — 「1926년 250명 신암교회 분립」

블로그·영상 등에 “1926년 분규로 250명이 분립해 신암교회를 세웠다”는 서술이 유통되나, 신암교회 창립은 1913년 4월로 13년이 어긋납니다. 1913년에 이미 존재하던 교회이므로 1920~30년대 분규 때 신암교회로 이적한 교인이 있었을 가능성은 남지만, 그것을 “분립”이라 부를 수는 없습니다. → 현재로서는 성립하지 않는 주장입니다 미확인.

산정현교회 — 「平壤城內 第四敎會」가 문서로 남아 있다

문서 증거장로회신학대학교 도서관 소장 미발간 필사본 『平壤山亭峴敎會史記』 3쪽에 “平壤城內 第四敎會”라는 표현이 있다 1차·2차경유 (오혁 2025, 70쪽·각주 48)
설립일1906년 1월 7일 — 『山亭峴史記』 1쪽이 이 날을 기점으로 삼는다(~1924년까지 연 단위 기록, 총 27쪽) 1차·2차경유
다른 날짜1906년 1월 17일 언론 → 7일 vs 17일 충돌. 필사본 자체가 7일을 가리키므로 7일이 더 강하다 추론
분립 사유“산정현교회는 장대현교회의 신도가 날로 증가하면서 1906년에 「平壤城內 第四敎會」로 설립된 교회이다” 학술
담임편하설(C. F. Bernheisel, 번하이셀) 선교사 언론
예배당1909년 평양 유흥면 산정현에 56평 규모 신축하고 교회명을 「산정현교회」로 확정 언론
분립 후“분립된 후에도 평양연합청년전도회 등에서 함께 활동하기도 했다” (전거: 「聯合靑年傳道會」, 『東亞日報』 1920. 5. 30) 학술 1차
인물 이동조만식이 1904년경부터 장대현교회에 출석하다가 1906년 산정현 분립 때 옮겨갔다 언론

※ 박용규는 장대현교회가 설립 4년 만인 1897년부터 분립을 시작해 1909년까지 11차 분립을 실행했다고 집계합니다. 다만 「1897년 시작」과 「11차」의 원출처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미확인. 이 집계는 성내 5개 교회만이 아니라 성 밖·군 단위 예배처소 분립까지 포함한 수치로 보이며 추론, 「1901년 18개 예배처소」라는 서술과 정합적입니다.

“이 교회로부터 강서의 탄포리교회(灘浦里敎會) · 청산포교회(靑山浦敎會), 대동군의 태평(太平) 외리교회(外里敎會), 중화군의 읍내교회(邑內敎會) 등 여러 교회가 파생, 발전하여 서북계 신앙의 발상지로서 기초적 소임을 다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장대현교회」 백과 — 군 단위 파생 교회

8. 위상 — 왜 「동양의 예루살렘」이었나

8-1. 한국 장로교회라는 제도가 이 예배당 안에서 태어났다

▣ 1907년 9월 17일 — 제1회 독노회 창립

대한(조선)예수교장로회 제1회 독노회가 장대현교회에서 창립되었습니다. 한국인 장로 40명 + 선교사 38명, 합계 78명. 회장 마포삼열, 부회장 방기창, 서기 한석진, 부서기 송인서, 회계 이길함. 같은 자리에서 한국 최초의 목사 7인이 안수받았습니다. 언론 학술

국사편찬위 『신편한국사』 축자: “1907년 평양 장대재예배당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老會를 창설” 1차

→ 이것이 이 교회의 위상을 규정하는 가장 단단한 사실입니다.

8-2. 학교

학교관계등급
숭덕학교(남)
숭현여학교(여)
널다리골교회 안의 「예수학당」에서 발전. 숭덕은 1894년 평양 관후리에 마펫 등 선교사 3인이 설립언론
숭실학당
(→숭실학교·숭실대학)
1897년 배위량(W. M. Baird)이 평양 사저 사랑방에 학생 13명으로 출범. 1900년 수업연한 5년 정식 중학 교과, 1904년 첫 졸업생 3명. 널다리골교회 사숙(이영언 교사)이 그 뿌리로 서술된다언론 학술
1921. 3. 25『매일신보』 「平壤 崇實 졸업, 장대현예배당에서 성대히 거행되었다」 — 국립중앙도서관 제어번호 CNTS-00094123792, 이용조건 [관외이용-무료](집에서 원문 열람 가능)1차

→ 숭실의 졸업식이 장대현 예배당에서 열렸습니다. 평양에서 가장 큰 실내 공간이자 개신교 공동체의 공회당이었다는 뜻입니다 추론.

8-3. 평양신학교

설립1901년 — 마펫이 장대현교회 장로 김종섭·방기창 2인에게 신학교육을 시작한 것이 기원. 연구소 연표는 「1901. 5.」, 다른 서술은 「1901년 가을」 → 5월 vs 가을 충돌 미확인
초대 교장모페트(마포삼열) 백과
학생 성격“초기 신학생은 대개 교회의 지도자로서 장로·조사직에 있었기 때문에 신학교에 와서 학습할 시간이 제한돼 있었” 백과
교사(校舍)정초식 1908년 5월 19일, 같은 해 10월 준공 언론
제1회 졸업1907. 6. 20, 7인 언론
후신1938 신사참배 강요로 폐쇄 → 1939 총회 재설립 결의 → 1940 인가 → 서울 이전 → 1961년 장로회신학대학으로 승격 백과

→ 한국 장로교 목사 양성 제도의 씨앗이 장대현교회 장로 두 사람이었습니다. 학술

8-4. 3·1운동(1919)

준비기독교인 만세시위는 민족대표 33인 중 1인 이승훈의 주도로 준비. 2월 26일 평양의 장로교회 6곳에 「숭덕학교에서 고종 봉도식을 열고 이어 독립선언식을 한다」는 통지 발송 백과 언론
3. 1 당일오후 1시, 장대현교회의 종(鐘)이 신호가 되어 장대재 언덕과 숭덕학교 운동장에 약 2,500명(다른 서술은 약 1,000명)이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침 → 인원 1,000 vs 2,500 충돌 미확인
3개 집회① 장로교 = 장대현교회 앞 숭덕학교 교정(김선두 목사 주도) ② 감리교 = 남산현교회 뜰(박석훈 목사 주도) ③ 천도교 = 설암리 옛 대성학교 뒷자리 천도교구 백과
순서각 집회에서 고종(광무황제) 봉도식 → 독립선언식 백과
규모“시위 인원 1만여 명, 목사만 해도 30여 명이 체포될 정도로 대규모였” 백과
기간3월 2일부터 9일까지 매일, 4월 초순까지 이어짐 백과
전국 맥락3월 1일 당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은 서울·평양·진남포·안주(평남)·선천·의주(평북)·원산(함남) — 서울을 뺀 전부가 북부 1차
⚠ 정확히 해 둘 것

1919년 3월 1일 평양의 장로교 독립선언식은 장대현교회 예배당 안이 아니라 그 앞 숭덕학교 교정에서 열렸습니다. 장대현교회가 한 일은 「종을 울려 신호를 보낸 것」입니다 언론 백과. 그리고 주도자는 길선주가 아니라 김선두(金善斗) 목사입니다 백과. 김선두는 훗날 『평양노회 지경 각 교회 사기』(1925)의 공저자 3인(강규찬·김선두·변인서) 중 1인이기도 합니다 1차.

※ 국립중앙도서관에 「고종황제 추도식이 열린 장대현교회」라는 사진이 소장되어 있습니다(제어번호 CNTS-00059825831, 이용조건 [국립중앙도서관-무료]=관내 열람) 1차. 봉도식이 교회 건물과도 연관됨을 시사하나, 1919년 3월 1일 그날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미확인.

8-5. 「동양의 예루살렘」

평양이 「동양(한국)의 예루살렘」으로 불린 것은 기독교 부흥 + 교육기관 집중 + 신학교 소재의 복합 결과로 서술됩니다 언론. 축자: “장대현교회가 위치한 장대재 언덕은 평양의 중심지에 있어서, 장대현교회는 명실상부하게 평양 주민들의 영적 구심점 역할을 했다.” 언론

⚠ 「동양의 예루살렘」이라는 표현을 누가 언제 처음 썼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미확인. 이 표현의 기원을 마펫의 1893년 신학교 설립에 돌리는 서술도 있으나(평양신학교 설립 연도는 1901년이 통설), 연도가 어긋나므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8-6. 그 밖의 1차 신문 기록 — 집에서 무료로 열람 가능

발행일신문제목(원표기)제어번호
1915. 11. 2每日申報平安南道: 章臺峴會祈禱式CNTS-00094001020
1915. 12. 26每日申報지방통신: 평안남도, 장대현 장로교CNTS-00094004084
1921. 3. 25每日申報平壤 崇實 졸업, 장대현예배당에서 성대히 거행되었다CNTS-00094123792

전부 [관외이용-무료]입니다. 여는 법은 부록 ①에 있습니다. 1차

9. 사람들

9-1. 길선주(吉善宙, 1869~1935) — 「한국의 세례요한」

시점사건등급
1869. 3. 15출생(평안남도 안주). 『吉靈溪歷史』 첫머리 약력에 탄생일 기재1차·2차경유 백과
—선도(仙道)·관성교(觀聖敎) 수련. 게일 역 『천로역정』 접함백과 언론
1896년 겨울극적 회심·개종. 친구 김종섭의 전도로 입문. “자신의 이름을 세 번 부르는 음성을 듣고 회개하며 개종”. 헌신의 징표로 머리를 깎음학술 언론
1897. 8.널다리골교회에서 세례 — 집례자는 그레이엄 리(이길함)학술
1897. 8. 15세례일이 날짜까지 기록된 1차 사료: 『要集』 103-108쪽에 길선주 본인의 이력으로 기재1차·2차경유
1898널다리골교회 영수(領袖) 임명1차 학술
1901장대현교회 장로 장립 — 방기창과 함께 (전거로 『吉靈溪歷史』 2쪽이 지목됨)1차·2차경유 백과
1902조사(助事) 임명백과
1906. 가을당회 결의를 얻어 전 교인 새벽기도회 시작(박치록 장로와 함께)언론
1907. 1. 14평양대부흥의 공개 자복학술 언론
1907. 6. 20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 — 7인: 길선주·양전백·한석진·이기풍·서경조·송인서·방기창언론 학술
1907. 9. 17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제1회 독노회에서 목사 안수 — 한국 최초의 목사 7인언론 학술
★ 1907. 10. 3장대현교회 목사직 시작 — 『要集』 103-108쪽에 길선주 본인의 이력으로 직접 기록. 축자: “그가 1907년 10월 3일에 장대현교회 목사직을 시작한 일까지를 기록하고 있으며”1차
(대안 서술)이재근은 “1907년 9월 17일 … 목사 안수 수세, 널다리골교회 위임목사 취임”으로 안수와 위임을 같은 날로 적는다 → 10월 3일설과 충돌학술
1912105인사건으로 수난 — 백과사전 축자: “1912년 105인사건 때에는 많은 애국지사와 함께 수난당하였고”
※ 사건 자체의 연대는 1911~1913년(1911. 10 선천 검거 개시 → 1912. 9 1심 105명 유죄 → 1913. 3 항소심 99명 무죄). 널리 유통되는 「1910년」은 백과사전에도, 사건 연대에도 없는 숫자입니다.
백과 1차
1919. 3. 1민족대표 33인으로 독립선언서 서명. 2월 28일 오전 8시 사리원에서 기차 → 오후 6시 남대문역 도착, 태화관 모임 불참.
경찰 심문조서 축자: “어제 오전 8시에 사리원에서 기차에 타서 오후 6시에 남대문역에 내려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우리 동지들이 모두 체포되어 갔다고 하였다”
1차 학술
1919~1920서대문형무소 20개월 미결수 복역. “요한계시록을 800독 하면서 고난의 시기를 잘 인내할 수 있었다”학술
1920. 10.경성 복심법원에서 무죄 판결, 출옥학술
1922~장대현교회 사무가 동사(同事)목사 변인서에게 맡겨짐 — NCCK 축자 “길선주 목사와 동사목사로 부임”. 「부목사」가 아닙니다언론 백과
1927 / 1931 / 1933담임 사임 — 세 가지 설 (→ 12장)미확인
1935. 11. 26강서군 고창교회 사경회 인도 중 뇌일혈로 별세, 향년 67세. 12월 3일 숭실대학 강당에서 4,000명 참석, 평양노회장(葬)학술
▣ 여기는 갈립니다 ⑧-2 — 길선주는 몇 해를 시무했는가
수치전제산술
「담임 20년」 언론 / 「19년 재임」 1927년 사임을 전제한 수치입니다1907. 10 취임 ~ 1927 = 약 20년
약 26년1933년 사임(→ 12장의 C설)을 전제하면 이렇게 됩니다1907. 10. 3 취임 ~ 1933 = 약 26년

널리 유통되는 「20년」·「19년」은 그 자체가 중립적 수치가 아니라 1927년 사임설을 이미 전제한 수치입니다. 그러므로 “1933년에 사임했는데 재임은 20년”이라고는 쓸 수 없습니다 — 산술이 맞지 않습니다.

1927년설을 뒷받침하는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 이 글이 여러 곳에서 인용한 이재근(『복음과상황』 395호)의 글에는, 1907년 목사 장립·위임을 적은 바로 다음에 “이때부터 1927년까지 널다리골교회 담임목회자였다”는 문장이 있습니다 언론. 즉 「20년」이라는 수치의 출처가 여기입니다. 이 문장은 12장의 C설(1933년 사임)과 정면으로 부딪칩니다. 이 글은 어느 쪽도 확정하지 않고, 두 수치가 각각 어떤 전제 위에 서 있는지를 밝히는 데서 멈춥니다 미확인.

▣ 여기는 갈립니다 ⑧ — 길선주는 개혁가였는가, 보수파였는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길선주」: 교회 현대화를 위해 남녀 좌석 휘장 제거, 교회음악 도입 등을 추진했다 백과
  • 옥성득 「길선주 목사와 3.1운동」 축자: “그 발단은 정치 문제가 아니라, 장대현교회 내 남녀 간 벽을 허물자는 청년층의 요구를 길 목사 등이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학술

→ 백과사전은 길선주를 ‘휘장을 없앤 사람’으로, 옥성득은 ‘벽 허물기를 거부한 사람’으로 적습니다. 시점이 다를 수 있으나(초기엔 개혁, 후기엔 보수), 이 조사는 이를 해소하지 못했습니다 미확인. 이 충돌은 1927년 분규의 원인 해석과 직결됩니다.

9-2. 그 밖의 장로·조사·목사

인물장대현교회에서의 위치등급
김종섭
(金鍾燮)
1900년 6월 장로 장립 → 이로써 당회(堂會) 조직. 축자: “그 해 장대현교회는 김종섭(金鍾燮)을 장로로 장립하여 당회(堂會)를 조직하였다.” 1900년 평양 공의회가 김종섭·방기창을 목사후보생으로 선발백과 언론
방기창
(邦基昌)
1901년 장로 장립. 1901년 마펫이 김종섭과 함께 신학교육 시작 → 평양신학교의 기원. 1907년 7인 목사 중 1인, 독노회 부회장언론 학술
박치록
(朴致祿)
장로. 1906년 가을 길선주와 함께 새벽기도회 인도언론
주공삼
(朱孔三, 1875-1953)
장로. 1907년 부흥의 한국인 1차 증언자(→ 6-6)언론
이동승최초 영수(領袖)언론
변인서
(邊麟瑞, 1882. 11. 14~?)
1906년 숭실중학 졸업(제3회) → 1908년 숭실대학 제1회 졸업 → 1911년 1월 장대현교회 장로 장립 — NCCK 아카이브 축자 “1월, 장대현교회 장로로 장립되었다” → 105인사건 연루·투옥 후 무죄 → 1917년 6월 평양 장로회신학교 제10회 졸업·목사안수 → 1917년 7월 10일 장대현교회 동사(同事)목사 취임 → 1919년 3·1운동 때 길선주 수감 중 장대현교회를 이끎 → 1922년부터 교회 사무 위임. 훗날 『평양노회 지경 각 교회 사기』(1925) 공저자 3인 중 1인
★ 「장로」라는 직분이 중요합니다. 장로교 정치에서 장로는 당회(堂會)의 구성원입니다. 즉 변인서는 1911년부터 이미 당회에 속한 사람이었고, 이 사실은 그가 1927·1933년 분규에서 당회 측 인물이었는지를 가리는 11-3의 쟁점과 직결됩니다. (널리 유통되는 「1911년 집사」 표기는 그 쟁점 자체를 흐립니다.)
백과 언론 1차
조만식1904년경 한정교의 권유로 장대현교회 출석 → 1906년 산정현 분립 때 이적언론
방지일
(1911~2014)
1933년부터 장대현교회 전도사 시무. 재직 중 직접 제작·보존한 『장대현교회 주보 1935-1936』이 영인되어 남아 있다(국회도서관 소장)1차 언론
김화식
(金化湜)
해방 후 장대현교회 시무. 1947년 11월 기독교자유당 사건으로 검거(→ 16-3). 부임 시점은 확인되지 않음 미확인언론

9-3. 선교사

인물한국명역할
Samuel A. Moffett (1864-1939)마포삼열(馬布三悅)장대현교회 개척자. 평양신학교 초대 교장. 1907년 독노회 초대 회장
Graham Lee이길함(李吉咸)장대현교회 담임 선교사. 1900-1901 예배당 건축 감독. 1897년 길선주에게 세례. 1907년 1월 14일 밤 통성기도 인도. “How the Spirit Came to Pyeng Yang” 저자. 독노회 회계
William N. Blair방위량(邦緯良)1907. 1. 12 고전 12:27 설교. The Korean Pentecost 저자
William Hunt한위렴(韓緯廉)1907. 1. 14 밤 설교. 대구로 부흥 전파
C. F. Bernheisel편하설(片夏薛)산정현교회(1906) 초대 담임
William M. Baird배위량(裵偉良)1897 숭실학당 창설. 1900-1901 스테이션 연례보고 작성
Alfred M. Sharrocks사락수(謝樂秀)의료선교사이자 “practical carpenter”. 1900년 예배당 건축 실무 지원
George Leck—Lee 출국 후 1901년 예배당 제2 날개 공사 인계
W. L. Swallen소안론(蘇安論)1907 사경회 강사. 광주로 부흥 전파

제 3 부몰락

1927년 3월, 한 신문은 장대현교회 예배당에서 벌어진 일을 「三十年來에 처음되는 일」이라고 적었습니다. 성령이 임했다던 그 강단에서 교인들이 서로를 때렸습니다.

10. 1920년대 — 이미 「가장 큰 교회」가 아니었다

분규를 사건으로만 보면 “청년과 노인이 싸웠다”로 끝납니다. 그러나 왜 하필 장대현교회였는가를 보려면 1920년대의 구조를 먼저 봐야 합니다.

10-1. 총회가 장대현교회에서 열리지 않게 되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통합)가 공식 게시한 역대 총회 개최지 목록입니다. 1차

회연도개최지회연도개최지
11912평양신학교171928대구신정교회당
21913경성승동교회당181929경성새문안교회당
31914재령남산현교회당191930평양서문밖교회당
41915전주서문밖교회당201931금강산수양관
51916평양신학교211932평양창동교회당
61917경성승동교회당221933선천남교회당
71918선천북교회당231934평양서문밖교회당
81919평양신학교241935평양서문밖교회당
91920경성안동교회당251936광주양림교회당
101921평양신학교261937대구제일교회당
111922경성승동교회당271938평양서문밖교회당 ←신사참배 결의
121923신의주교회당281939신의주제2교회당
131924함흥신창리교회당291940평양창동교회당
141925평양서문밖교회당301941평양창동교회당
151926평양서문밖교회당311942평양서문밖교회당
161927원산광석동교회당321946서울승동교회당
▣ 기관 공식 목록이 말하는 것

총회가 평양에서 열린 것은 총 14회(1912·1916·1919·1921·1925·1926·1930·1932·1934·1935·1938·1940·1941·1942)인데, 그 장소는 평양신학교·서문밖교회당·창동교회당뿐이고 장대현교회당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1차

▣ ★ 그러나 이 표만 읽으면 크게 오해합니다 — 반드시 함께 보아야 할 사실

위 표는 1912년 제1회 총회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앞이 있습니다.

1907년 9월 17일, 대한(조선)예수교장로회 제1회 독노회 — 곧 오늘날 총회의 전신이자 한국 장로교회의 출범 — 가 바로 이 장대현교회 예배당에서 창립되었습니다. 언론 학술
국사편찬위 『신편한국사』 축자: “1907년 평양 장대재예배당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老會를 창설” 1차 (자세히는 8-1)

그러므로 「총회 개최지 14회 중 장대현 0회」를 “장대현은 원래 큰 모임을 치르지 않던 교회”로 읽으면 정반대로 틀립니다. 한국 장로교회라는 제도 자체가 그 예배당 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표가 보여 주는 것은 “한때 제도의 산실이었던 교회가, 1912년 이후의 총회 개최지 목록에서는 사라졌다”는 변화이지, 애초의 위상이 아닙니다.

그 변화를 놓고 이 표는 두 가지를 시사합니다.

⚠ 단, 반대 증거도 있다

中外日報 1929년 10월 11일자 기사 제목은 이렇습니다 1차:

「半萬使徒一堂會集 主日校大會開幕 壯重殷賑한 聖夜景 : 평양성 장대현교회당에 넘치는 오천여명의 수마흔 대회참짐자」

※ “수마흔 대회참짐자”는 OCR/식자 오류로 보이나 원표기 그대로 옮겼습니다.

즉 기사 제목은 1929년 10월 장대현교회당에서 열린 대회에 5,000여 명이 모였다고 보도합니다(전원이 건물 내부에 들어갔는지는 제목만으로 알 수 없습니다). 2차 문헌(박용규)은 제3회 조선주일학교대회(1929.10.9~16) 회장을 남산현교회·서문밖교회·숭전대학강당으로 적고 장대현교회를 들지 않는데 학술, 위 신문 제목은 개막(開幕)이 장대현교회당에서 있었음을 명시합니다. 이 불일치는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미확인.

다만 장대현교회당이 1929년까지도 대규모 집회의 회집 장소로 쓰였다는 것은 이 제목으로 확인됩니다(그것이 평양 “최대급” 공간이었는지는 별도 근거가 없습니다 추론).

10-2. 담임목사가 교회에 없었다

11. 제1차 분규 — 1927년 2~3월

▣ 여기는 갈립니다 ⑨ — 분규는 1926년인가 1927년인가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 신문에 남아 있는 제1차 분규 기사는 전부 1927년 2~3월자입니다. 옥성득 교수도 “1927년부터 청년들로부터 배척받는 보수적인 인물”이라고 씁니다 학술.

반면 2차 문헌 다수는 「1926년」이라고 씁니다.

「1926년」이라 쓴 문헌표현
NCCK 아카이브 「변인서」 백과“1926년 장대현교회 내에 박윤근 등 청년층에서 길선주 목사 배척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재근, 『복음과상황』 395호(2023.10) 학술“1926년 2월에 길선주와 당회에 불만을 가진 청년 및 교인 일부가 일으킨 널다리골교회 분규는 신문에도 보도되고, 노회의 관여가 필요할 만큼 주목을 받은 사건이었다”
김요셉(평택 사랑의교회), 한국NGO신문 2026.7.24 언론“1926년 장대현교회에서는 당회원 가운데 기생집에 출입하거나 부동산 투기와 고리대금업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습니다”

이 글의 처리:

  • 신문 서지는 물증이고, 연도가 틀릴 수 없습니다. 每日申報 1927-02-17, 朝鮮新聞 1927-02-17, 中外日報 1927-02-26 이후가 제1차 분규 보도의 시작입니다 1차.
  • 이재근의 “1926년 2월”은 신문 보도보다 정확히 1년 앞섭니다. 단순 오기일 가능성이 가장 크나 추론, 1926년에 교회 내부 절차(청년 진정·당회 대응)가 선행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습니다 미확인.
  • 그러므로 이 글은 “신문에 잡히는 제1차 분규는 1927년 2월부터”라고만 쓰고, 「1926년설」을 폐기하지도 채택하지도 않습니다.

11-1. 남아 있는 신문 10건 — 제목이 그대로 말해 주는 것

아래 10건은 전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디지털 신문이며, 이용조건은 [관외이용-무료](집에서 열람 가능)입니다. 1차

#발행일신문기사 제목(원표기)제어번호
11927-02-17每日申報長老選擧問題로 章臺峴敎會紛糾 役員과 靑年派가CNTS-00094308034
21927-02-17朝鮮新聞紛擾を惹超した平壤章臺峴敎會, 牧師が長老選擧の投票を誤魔化す
(분요를 야기한 평양 장대현교회, 목사가 장로선거 투표를 속이다)
CNTS-00099089299
31927-02-26中外日報地方時論 : 章臺峴敎會紛糾에 對하야 平壤支局 一記者CNTS-00093418113
41927-03-08中外日報肉迫戰이 닐어난 章臺峴敎會紛糾 : 청년파와 로인파의 란투 靑年間毆打, 婦人痛哭CNTS-00093419079
51927-03-08中外日報肉迫戰이 닐어난 章臺峴敎會紛糾 : 原因은 責罰問題 목사선언과 청년파의 불법반대CNTS-00093419080
61927-03-08中外日報肉迫戰이 닐어난 章臺峴敎會紛糾 : 三十年來에 처음되는 일CNTS-00093419082
71927-03-08中外日報肉迫戰이 닐어난 章臺峴敎會紛糾 : 六百男女敎徒늘어서 서대혼잡CNTS-00093419081
81927-03-10朝鮮新聞紛擾擴大の平壤章臺峴敎會, 禮拜席上で毆打騷ぎ
(예배 석상에서 구타 소동)
CNTS-00099094707
91927-03-18中外日報老年派가 靑年派毆打 평양장대현 교회분규속보CNTS-00093420102
101927-03-30中外日報老年派排斥 第二回宣言 평양장대현 교회분규속보CNTS-00093421479
⚠ 읽는 방법에 대한 경고

아래는 기사 제목이 말하는 것이지 사건 그 자체가 아닙니다. 이 조사는 기사 본문을 읽지 못했습니다(국중도 신문 원문은 지면 스캔 이미지 + 브라우저 전용 뷰어). 그러므로 “최초로 / 누가 / 언제 정확히”를 제목에서 끌어내면 과확대가 됩니다.

  1. 현존 기사 중 가장 이른 두 건(1927.2.17)이 내세운 쟁점은 장로 선거입니다. 每日申報는 「長老選擧問題로」, 朝鮮新聞은 「牧師가 長老選擧의 投票를 속이다(誤魔化す)」라고 제목에 박았습니다. 즉 투표 부정 의혹이 현존 최초 보도의 표제 쟁점입니다. (이것이 분규의 “발단”인지, 그 이전에 다른 발단이 있었는지는 제목으로 확정되지 않습니다 미확인)
  2. 中外日報 3월 8일자 제목은 원인을 「責罰問題」(책벌 = 권징·치리)로 적습니다 — 「原因은 責罰問題 목사선언과 청년파의 불법반대」. 책벌 문제와 청년파의 “불법” 반대가 병기되어 있습니다. 누가 누구를 책벌했는지는 제목에 없습니다 미확인.
  3. 1927년 3월 8일자 보도에 따르면, 그 이전 시점에 예배당 안에서 물리적 충돌이 있었습니다. 「肉迫戰」(육박전), 「靑年間毆打」, 「婦人痛哭」, 「禮拜席上で毆打騷ぎ」. 600명 남녀 교인이 몰려 극도로 혼잡했습니다. 3월 8일은 발행일이지 사건 발생일이 아니며, 정확한 발생일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미확인.
  4. 中外日報는 이를 「三十年來에 처음되는 일」이라 평했습니다. 1893/94년 창립을 기점으로 하면 30여 년 — 장대현교회 역사상 초유의 사태라는 뜻입니다.
  5. 3월 18일에는 노년파가 청년파를 구타, 3월 30일에는 「老年派排斥 第二回宣言」. 즉 청년파의 성명이 최소 2회 이상 연속으로 나왔습니다. “第二回”라는 표기는 제1회 선언이 그 전에 있었다는 뜻인데, 그 제1회 선언 기사는 남아 있는 16건 중에 없습니다 미확인.

제목으로는 확정되지 않는 것(전부 미확인): 장로 선거의 구체적 부정 내용, 책벌 대상자의 이름과 죄목, 청년파·노년파 각각의 지도부 명단, 부상자 유무, 경찰 개입 여부, 평양노회가 이때 어떤 처결을 했는지.

11-2. 무엇이 쟁점이었나 — 2차 문헌이 말하는 세 갈래

(가) 예배당 남녀 분리(ㄱ자 칸막이) 철폐 요구 — 가장 출처가 단단한 설명 학술

“그 발단은 정치 문제가 아니라, 장대현교회 내 남녀 간 벽을 허물자는 청년층의 요구를 길 목사 등이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옥성득, 「길선주 목사와 3.1운동」,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좋은나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도 예배당 구조를 이렇게 적습니다 — “예배당은 ㄱ자로 건립되어 한때 남녀가 따로 한쪽 칸을 차지하여 앉도록 한 일도 있었다.” 백과

→ 즉 1927년 분규의 표층은 장로 선거지만, 심층에는 “교회를 근대화하라”는 세대 요구가 있었습니다 학술. 이는 1920년대 사회주의계 청년운동·반기독교운동의 자장 안에서 벌어진 일입니다(옥성득은 “1926년은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이 가장 맹렬하던 때”라고 씁니다) 학술. 26년 전 선교사가 “남자와 여자를 동시에 마주 보기 위해” 궁리한 그 분리 구조가, 이제 갈등의 자리가 된 것입니다.

(나) 당회원 비위 — 기생집 출입·고리대금·부동산 투기 언론

“1926년 장대현교회에서는 당회원 가운데 기생집에 출입하거나 부동산 투기와 고리대금업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습니다.”
(이어) 당회는 청년들의 항의를 수용하지 않고 비판자들을 억압했으며, 찬양대원과 주일학교 교사들이 집단 사임했다. 이후 강단 점거, 폭력 사건, 경찰 출동이 이어졌다.
“1907년 대부흥의 바로 그 현장, 성령께서 임하셨던 장대현교회의 강단은 교인들간의 난투극 현장이 되었습니다.”

김요셉(평택 사랑의교회 담임), 한국NGO신문 기고문(2026. 7. 24)
⚠ 여기가 이 글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대목입니다
  • 이 기고문은 참고문헌을 명시하지 않습니다. 필자가 밝힌 유일한 전거는 “옥성득의 연구”입니다. 당회록을 봤다는 언급은 없습니다.
  • 같은 내용을 “당회록에 이름까지 다 적혀 있습니다”라고 말한 구술(블로그·영상)이 있으나, 장대현교회 당회록은 국내외 어느 공개 목록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당회록에 적혀 있다”는 진술은 1차 사료 근거로 쓸 수 없습니다.
  • 한편 김요셉이 서술한 사건 전개(찬양대·주일학교 교사 집단 사임 → 강단 점거 → 폭력 → 경찰)는 1927년 3월 8일자 中外日報 4건의 제목(責罰問題·靑年間毆打·婦人痛哭·六百男女敎徒)과 놀랍도록 정합합니다. 즉 사건 서술 자체는 신문과 어긋나지 않습니다. 어긋나는 것은 연도(1926 vs 1927)와 “당회록”이라는 전거 주장뿐입니다.

→ 판정: 「기생집·고리대금·부동산 투기」는 당시 청년파가 제기한 비판의 내용으로는 2차 문헌에 유통되나, 그 비판을 기록한 1차 사료(신문 본문·노회록·당회록)는 한 건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사실로 단정하지 않습니다 미확인.

(다) 세대·노선 갈등 — 「노년파 vs 청년파」의 실체

쪽신문 표기2차 문헌이 말하는 실체
노년파 / 役員老年派당회(목사·장로·집사·권사 등 현직 제직). 길선주가 그 상징 학술
청년파靑年派박윤근(朴潤根) 등 청년층 백과. 찬양대·주일학교 교사층을 포함 언론

박윤근이 청년파 지도자로 지목된 것은 NCCK 아카이브 「변인서」 항목에서 확인됩니다. 그 이상의 인적 정보(생몰·직업·이후 행적)는 찾지 못했습니다 미확인.

11-3. 배척 대상으로 지목된 변인서 — 자료가 서로 어긋난다

▣ 여기는 갈립니다 ⑩ — 변인서는 어느 편이었는가

계열 A — 변인서는 1926/27년에 “반대 세력의 대표”로 몰려 교회를 떠났다 백과

“1926년 장대현교회 내에 박윤근 등 청년층에서 길선주 목사 배척운동이 일어났을 때 여기에 휩쓸려 반대 세력의 대표적 인물로 등장하였고 결국 장대현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NCCK 아카이브 「변인서」 — 이후 행적: 동대원교회 담임 → 세평교회 → 오촌리교회. 1945년 해방 후 월남하지 못하고 별세한 것으로 추정

계열 B — 변인서는 1933년에 길선주와 함께 배척당했다 학술

“1933년 4월 장대현교회에서 다시 신구파 분쟁이 일어나 길선주 목사와 변인서 목사 배척 운동이 일어났다.”

옥성득

충돌 지점: 계열 A는 변인서를 길선주 배척운동 쪽에 “휩쓸린” 인물(=반(反)길선주 진영의 대표)로 읽게 만들고, 계열 B는 변인서를 길선주와 나란히 배척당한 인물(=친(親)길선주 진영)로 놓습니다. 두 서술은 변인서의 진영 소속을 정반대로 함의합니다.

이 글의 처리: NCCK 항목의 “여기에 휩쓸려 반대 세력의 대표적 인물로 등장하였고”라는 문장은 한국어로 중의적입니다. ① “(청년층의) 반대 세력 = 청년층에 반대하는 세력의 대표”로도, ② “(길선주에 대한) 반대 세력의 대표”로도 읽힙니다. ①로 읽으면 계열 B와 모순되지 않습니다(변인서 = 당회 편 = 청년파의 반대 세력 → 1933년에 길선주와 함께 배척). ①이 문맥상 더 자연스러워 보이나 이것은 문장 해석이지 사료가 아닙니다 추론. 확정하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 하나: 朝鮮新聞 1933년 4월 13일자 기사 「平安南道, 北長派への反旗と判明, 李應三は告訴の模樣, 章臺峴敎會の亂鬪事件」(CNTS-00109043092)이 옥성득이 말한 “1933년 4월”과 정확히 같은 달입니다 1차. 즉 계열 B의 시점은 신문으로 뒷받침됩니다.

12. 길선주의 퇴장 — 1927? 1931? 1933?

▣ 여기는 갈립니다 ⑪ — 길선주는 언제 물러났는가
설시점전거
A설1927년
널다리골교회 목회 25주년을 기념하며 스스로 담임목사직을 사임, 이후 순회 부흥사로 여생
이재근, 『복음과상황』 395호(2023.10) 축자: “이듬해 1927년은 길선주가 널다리골교회에서 조사로 목회를 시작한 지 25주년 되는 해였다. 25주년을 기념하며 길선주는 담임목사직을 사임하고 여생을 순회 부흥사로 보냈다” 언론
★ 같은 글에 이 문장도 있습니다: “이때부터 1927년까지 널다리골교회 담임목회자였다.” (1907년 목사 장립·위임을 적은 바로 다음 문장. 즉 널리 유통되는 「담임 20년」이라는 수치의 출처가 여기입니다 — 9-1 참조. A설은 지나가는 언급이 아니라 이 글이 명시적으로 세운 서술입니다.)
※ 기산점 주의: 이재근의 「25주년」은 1902년 조사(助事) 임명이 기점입니다(1902 + 25 = 1927). 목사 25주년이 아닙니다.
B설1931년
평양노회가 길선주의 사직을 처리
통설 계열. 전거 불명 미확인
C설1933년
6월에 사임이 보도되고, 10월 평양노회 정기회에서 처리
① 朝鮮中央日報 1933-06-15 「章臺峴敎會 紛糾依然繼續 길목사는 사임」(CNTS-00095761870) 1차
② 박용규, 『한국교회와 민족을 살린 평양산정현교회』: “1933년 10월 3일부터 7일까지 산정현교회에서 열린 정기 가을 평양노회(제25회)에서 오랫동안 분규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던 장대현교회 담임 길선주가 사임했다” 학술

이 글의 정리: C설(1933년)을 사실 관계의 축으로 삼고, A설(1927년)을 “실질적 이선 후퇴”로, B설(1931년)을 “전거를 찾지 못한 서술”로 정리합니다.

  1. C설만 동시대 신문 서지를 갖습니다. 朝鮮中央日報 1933년 6월 15일자 기사 제목에 「길목사는 사임」이 박혀 있습니다 1차(서지).
    ★ 다만 정확히 말해야 합니다. 이 글은 기사 본문을 읽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제목이 증명하는 것은 「1933년 6월에 길선주의 사임이 보도되었다」까지이지, 「그때 사임했다」가 아닙니다. 제목은 사건의 물증이 아니라 보도의 물증입니다. 이 글의 초판은 이 구분을 11-1에서 세워 놓고 여기서 지키지 않았고, 검증에서 지적받아 바로잡았습니다.
  2. C설은 별개의 축을 하나 더 갖습니다 — 박용규의 「1933년 10월 제25회 평양노회」 서술입니다. 즉 C설은 신문 보도(6월)와 연구서(10월 노회)라는 서로 다른 두 계열이 모순 없이 맞물립니다. 6월 = 사임 의사 표명·보도, 10월 = 평양노회 정기회의 공식 처리. 한국 장로교 제도상 목사의 사임은 노회가 처리해야 효력이 생기므로 이 순서는 제도적으로 정합적입니다 추론.
  3. A설은 “담임목사직 사임”이라는 표현을 썼으나, 박용규는 1933년 시점에도 길선주를 “장대현교회 담임”이라 부릅니다. 즉 1927년에 실질적으로 순회 부흥사로 나갔더라도 공식 직명은 1933년까지 유지되었다고 보는 편이 두 서술을 모두 살립니다 추론. 실제로 1922년부터 교회 실무는 동사목사 변인서가 맡고 있었습니다 — “25주년 사임”은 실무 이양의 완성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추론.
  4. B설(1931년)은 전거를 찾지 못했습니다. 1931년 평양노회 회의록에 해당 처결이 있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 (평양노회록은 남한 공개 목록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폐기하지는 않되, 근거 없는 서술로 표시합니다 미확인.

★ 잔여 위험: A·B·C 세 설의 조화는 추론이지 사료가 아닙니다. 결정적 확인은 朝鮮中央日報 1933-06-15 기사 본문(CNTS-00095761870)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열어 보는 것으로 가능합니다. 그 기사는 [관외이용-무료]이므로 브라우저에서 클릭 한 번으로 열어 보실 수 있습니다(→ 부록 ②).

12-1. 길선주의 그 후(1933~1935)

→ 즉 길선주는 장대현교회에서는 밀려났으나, 평양노회와는 단절되지 않았습니다. 「몰락」은 길선주 개인의 몰락이 아니라 장대현교회라는 공동체의 몰락입니다 추론.

13. 제2차 파동 — 1933~1934년

13-1. 신문 6건

#발행일신문기사 제목(원표기)제어번호
111933-04-13朝鮮新聞平安南道, 北長派への反旗と判明, 李應三は告訴の模樣, 章臺峴敎會の亂鬪事件
(평안남도, 북장파(北長派)에 대한 반기로 판명, 이응삼(李應三)은 고소할 모양, 장대현교회 난투사건)
CNTS-00109043092
121933-05-05朝鮮中央日報八名處分으로 又復肉彈戰 : 平壤章臺峴敎會紛糾 警察出動煽動者檢擧CNTS-00095754821
131933-06-15朝鮮中央日報章臺峴敎會 紛糾依然繼續 길목사는 사임CNTS-00095761870
141933-09-07朝鮮新聞平安南道, 敎會堂で亂鬪騷ぎ, 章臺峴基督敎會で擁護派と反對派が
(교회당에서 난투 소동, 장대현기독교회에서 옹호파와 반대파가)
CNTS-00109502811
151933-09-08朝鮮中央日報敎徙三百餘名이 敎會堂에서 亂鬪 平壤章臺峴敎會에 又復血戰 反對派側三名負傷CNTS-00095777284
161934-05-31京城日報基督敎改革の烽火, 傳統敎理を血に染めて排擊, 長老派章臺峴敎會の新人派遂に離脫, 新敎樹立を目指す
(기독교 개혁의 봉화, 전통교리를 피로 물들여 배격, 장로파 장대현교회의 신인파(新人派) 마침내 이탈, 신교(新敎) 수립을 목표로)
CNTS-00126295375

13-2. 제목으로 확정되는 경과

  1. 1933년 4월 — 난투사건 발생. 朝鮮新聞은 이를 「北長派에 대한 반기」로 규정했습니다. 「北長派」는 북장로회(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계열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히며, 즉 선교부 노선에 대한 반발이라는 프레임입니다 추론. 이응삼(李應三)이라는 실명이 등장하고 「고소할 모양(告訴の模樣)」이라는 전망이 제목에 실립니다. 이는 고소 가능성에 대한 기자의 전망이지 고소 접수·사법절차 개시의 증거가 아닙니다. 실제 고소 여부와 그 결말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미확인.
  2. 1933년 5월 — 「八名處分」(8명에 대한 징계 처분)이 재충돌의 방아쇠가 되어 「又復肉彈戰」(또다시 육탄전). 경찰이 출동해 선동자를 검거했습니다. → 치리 처분 → 충돌 → 공권력 개입의 순서가 1927년과 동일하게 반복됩니다. (처분 대상자 8명이 누구인지는 미확인)
  3. 1933년 6월 15일 — 「紛糾依然繼續」(분규 여전히 계속) + 「길목사는 사임」.
  4. 1933년 9월 7~8일 — 다시 난투. 교인 300여 명이 예배당 안에서 충돌, 반대파 3명 부상. 일본어 신문은 진영을 「擁護派 : 反對派」로 적습니다.
  5. 1934년 5월 31일 — 京城日報가 「新人派 마침내 이탈, 新敎 수립을 목표로」라고 보도. 분립이 새 교파 수립 차원으로까지 언급되었습니다.

13-3. 노회가 개입한 방식 — 「현직 전부 사직」이라는 초강수

“장현교회 분규문제 처리키 위하야 회집한 평양임시노회는 五月 三十日 야 산정현예배당에 개회하고 다수 남녀방청하에 장현교회 현직 목사 장로 집사 권사의 총사표 전부를 접수하는 동시 사표제출치 아니한 제직급반장에 지하기까지 현직전부를 사직식히기로 만장일치가결”

1933년 5월 30일 밤, 장대현교회 분규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모인 평양임시노회가 산정현예배당에서 개회하여, 많은 남녀가 방청하는 가운데 장대현교회 현직 목사·장로·집사·권사의 총사표 전부를 접수하는 동시에, 사표를 제출하지 않은 제직 및 반장에 이르기까지 현직 전부를 사직시키기로 만장일치 가결했다.

박용규 『한국교회와 민족을 살린 평양산정현교회』가 인용한 동시대 기록 학술
※ 그 원 출처가 『기독신보』인지 노회록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미확인

같은 글은 분규의 원인을 이렇게 진단하고 — “근인 중 제1인은 교회의 냉각과 평신도의 영적기갈” — 교회 내부 진영을 「당회파 : 항의파」로 적습니다 학술.

▣ 이 결의의 무게

한 교회의 모든 직분자를 노회가 일괄 해임한 것입니다. 이는 정상적 교회 운영이 불가능하다는 상급 치리회의 판단이며, 1933년 5월 시점에 장대현교회는 사실상 제도적으로 해체 상태에 들어갔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추론.

13-4. 분립 — 숫자와 날짜가 자료마다 다르다

▣ 여기는 갈립니다 ⑫ — 몇 명이, 언제 나갔는가
항목박용규 『평양산정현교회』 학술이재근 『복음과상황』 학술모퉁이돌선교회 기도지도 선교단체
분립 승인1934년 5월 24일 평양특별노회 만장일치 승인——
분립예배1934년 5월 27일, 여자 90여 명·남자 130여 명 = 약 220명 참석——
창립일——1934년 5월 22일
교회명(명시 없음)이향리교회(신현교회)신현교회(新峴敎會)
소재——평양부 장별리 48
담임—이유택—
이동 교인—널다리골교회에서 이동한 교인 500여 명—
시점1934년1933년1934년
  • 날짜(5.22 / 5.24 / 5.27)는 서로 다른 절차 단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 창립 결의(22) → 노회 승인(24) → 분립예배(27) 추론. 다만 세 날짜를 한 문헌이 함께 적은 것을 보지 못했으므로 확정하지 않습니다.
  • “1933년”(이재근) vs “1934년”(박용규·모퉁이돌) — 1933년은 이탈이 시작된 해, 1934년 5월은 제도적 분립이 완성된 시점으로 읽는 것이 세 자료를 모두 살립니다 추론.
  • “500여 명”(이동 교인) vs “220명”(분립예배 참석자) — 측정 대상이 달랐을 가능성이 있습니다(이명(移名)한 교인 수 ≠ 분립예배 실참 인원). 그러나 두 수치를 함께 설명한 문헌을 보지 못했으므로 이 해석은 추론이며, 어느 쪽이 맞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미확인. 두 숫자를 병기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길선주가 500명을 데리고 나갔다”는 통속적 서술은 주의를 요합니다. 박용규는 “평양노회가 길선주를 따르는 신도들을 별도 교회로 분립시키기로 결정했다”고 씁니다. 즉 길선주가 주도해 데리고 나간 것이 아니라, 노회가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분리시킨 것이라는 서술입니다 학술. 두 프레임은 사건의 도덕적 함의가 크게 다르므로 양쪽을 다 적어 둡니다.

13-5. 「신인파(新人派)」와 「길선주파」는 같은 집단인가 — 미해결

▣ 여기는 갈립니다 ⑬ — 1934년 5월에 나간 사람들은 누구인가
  • 京城日報 1934년 5월 31일자는 「新人派가 마침내 이탈」했다고 씁니다. 그런데 박용규는 「길선주를 따르는 신도들」이 분립했다고 씁니다.
  • 新人派(새 사람들 = 청년·개혁파)와 길선주파(노년·전통파)는 정반대 진영입니다.
  • 京城日報의 「傳統敎理を血に染めて排擊」(전통교리를 피로 물들여 배격), 「新敎樹立を目指す」(새 교파 수립을 목표로)라는 표현은 명백히 개혁파의 이탈을 가리킵니다.
  • 그렇다면 1934년 5월에 장대현교회를 떠난 집단은 둘일 수 있습니다 — ① 노회 승인 아래 분립한 길선주계(→신현교회), ② 전통교리 배격을 내걸고 이탈한 신인파. 두 사건이 같은 달에 겹쳤을 가능성 추론.

이 문제는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미확인. 京城日報 1934-05-31 기사 본문(CNTS-00126295375)을 열어야 확정됩니다.

“성장에 따른 교회 분립이 아닌 분규에 의한 교회 분립”이며 “장대현교회의 리더십이 이제 끝났음을 의미한다”

박용규의 총평 학술 — 한국교회사에서 「몰락」의 분기점으로 통상 지목되는 지점이 여기입니다.

14. 배경 — 평양은 몰락하지 않았다

수치로 보면 평양 장로교 자체는 몰락하지 않았습니다. 몰락한 것은 장대현교회입니다.

시점수치출처
1934“평양노회와 황해노회가 합계 6만 명 이상으로 두 노회만 해도 전체 28만 장로교회 교인의 22%가 넘었다”옥성득, 「통계로 보는 1930년대 조선예수교장로회 교세」(2021) 학술
1939미국 북장로회 선교부 관할 평양 지역 교인 50,717명동상 학술
1930장대현교회 교인 1,209명모퉁이돌선교회 기도지도(2023.5), 근거: 이용민(연세대) 세미나(2022.1.19) 선교단체
1929서문밖교회 교인 3,000명『잊혀진 북한교회』 연재 (8) — 서문밖교회는 1909년 장대현교회에서 분립 언론
▣ 어머니교회가 딸교회의 40% 규모가 되었다

1930년 시점에 장대현교회(1,209명)는 자기가 낳은 서문밖교회(3,000명)의 40% 규모였습니다. 「평양의 어머니교회」라는 상징은 남았으나 실체는 이미 뒤집혀 있었습니다 추론.

※ 1,209명이라는 수치는 선교단체 기도지도가 전한 것으로, 원 통계표(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록 등)를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미확인.

15. 신사참배기(1938~1945) — 기록이 없다

15-1. 확인된 사실 — 총회 차원

총회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 1938년 9월 9~15일(일부 자료 9~16일) 1차
장소평양 서문밖(서문외)교회당 —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공식 역대총회 목록으로 확인 1차
참석조선·만주 27개 노회 총대 193명(목사 86·장로 85·선교사 22) 언론
총회장평북노회 홍택기 목사 언론
결의1938년 9월 10일 오전 10시 50분경, 평양노회장 박영률(또는 박응률) 목사가 평양·평서·안주 3개 노회 연합대표로 신사참배 결의를 긴급 제안 → 즉시 가결. 결의문 요지 “신사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다” 언론
직후결의 당일 부총회장 이하 총대 20여 명(자료에 따라 23명)이 평양신사에 가서 참배 언론
선행1938년 2월 9일 평북노회를 시작으로 8월 평양노회, 9월 경안노회 등 전국 23개 노회 중 17개 노회가 총회 이전에 이미 신사참배를 결의 언론

→ 확정되는 것: 신사참배 결의는 평양에서, 평양노회장의 제안으로, 서문밖교회당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장대현교회는 평양노회 소속 교회였습니다. 즉 장대현교회는 신사참배를 결의한 그 노회의 구성 교회였습니다 — 이것은 소속 관계에서 도출되는 사실입니다.

15-2. 대조군 — 산정현교회

15-3. 그러면 장대현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 여기는 기록이 없습니다

이 조사는 다음을 모두 시도했으나 전부 빈손이었습니다.

시도한 질의결과
“장대현교회” 신사참배 시기 1938 1939 교인 목사 태도 평양 교회 굴복관련 문헌 0건
“장대현교회” 1938 1940 목사 시무 김화식 이인식 평양노회 신사참배 거부담임 승계·대응 서술 0건
“장대현교회” 1940 1941 1942 일제 말 폐쇄 통폐합 평양 교회 징발해당 서술 0건
국립중앙도서관 통합검색 章臺峴 248건 전수 확인1934년 5월 31일 이후 1979년까지 장대현교회 관련 신문·기사 항목 0건
한국기독교사연구소 「한국기독교사 연표」 1938년 항목“9월 9. 장로교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정” — 장대현교회 언급 없음

그러므로 이 글은 다음과 같이만 씁니다:

「1938년 신사참배 결의 국면에서 장대현교회가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는, 확인되는 사료가 한 건도 없다. 저항했다는 기록도, 앞장섰다는 기록도 없다.」 미확인

이것을 “침묵했다” 또는 “순응했다”로 바꿔 쓰지 않습니다. 기록의 부재는 행위의 증거가 아닙니다.

정황으로만 말할 수 있는 것 추론 — 증거가 아님을 명시합니다:

▣ 다만, 이 시기의 물증이 하나 남아 있다

방지일 목사(1911~2014)는 1933년부터 장대현교회 전도사로 시무했습니다. 그가 재직 중 직접 제작·보존한 『장대현교회 주보 1935-1936』이 영인되어 남아 있습니다 (방지일목사기념사업회 2010 / 홍성사 2011, 국회도서관 소장) 1차. 이 주보 영인본은 1935~36년 장대현교회의 실상을 보여 줄 수 있는 유일한 현존 1차 사료로 보입니다 추론. 이 조사에서는 그 내용을 열람하지 못했습니다 미확인 — 부록 ②의 후속 과업 1순위입니다.

제 4 부소멸

이 교회가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 — 정설이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두 점뿐이고, 그 사이 16년 반은 비어 있습니다. 이 장은 그 빈칸을 메우지 않습니다.

16. 해방과 분단(1945~1950) — 마지막 기록들

1934년 5월 이후 1945년까지 사료가 비는 데 반해, 1946~47년에는 장대현교회를 무대로 한 사건이 세 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래 서술은 전부 남한 측 자료에 근거하며, 북한 측 기록으로 교차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16-1. 1946년 3월 1일 — 「장대현교회 사건」

서술자내용
박명수(서울신대 명예교수)
「한국전쟁 전후 개신교 탄압과 학살 연구②」, 교회와신앙 2022.10.19 학술
“기독교인들은 여기에 응하지 않았다. 이들은 장대현교회에서 따로 모여 예배를 드리고, 예배 후 조만식의 석방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참고문헌으로 박명수, 『조만식과 해방 후 한국정치』(북코리아, 2015) 제시)
권성아(기독교통일교육학회 부회장)
기독일보 2016.6.29 언론
“교회에는 만 명 가까운 교인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고 무장 적위대가 난입했으며 “그 결과 50여명이 잡혀갔다”

경위(두 서술을 합하면): 북한 인민위원회가 3·1절 기념식을 평양역전에서 열기로 하고 교회의 참석을 요구했으나, 교회들이 이를 거부하고 장대현교회에서 따로 3·1절 기념예배를 드렸습니다. 무장 적위대가 예배당에 난입해 해산시켰고, 교인들은 평양역~화신백화점 구간에서 찬송을 부르며 시위했으며, 50여 명이 연행되었습니다.

“광복 후인 1946년 3월에는 3·1절 기념예배를 둘러싸고 신도들이 공산정권에 항거한 사건이 일어나 큰 피해를 받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장대현교회」 백과
⚠ 근거의 성격을 밝힌다
  • 이 사건은 남한의 기독교계·연구자들이 반복해 서술하는 사건입니다. 박명수는 학술 연구자이고 저서를 전거로 제시합니다.
  • “만 명 가까운 교인”이라는 숫자는 권성아의 칼럼에만 나오며 출처가 명시돼 있지 않습니다. 장대현교회 예배당은 72칸·약 120평(396.7㎡)이고, 좌식 극한 밀집으로도 1,500명 안팎이 한계선입니다(4-3). “만 명”은 1인당 0.04㎡로, 건물 수용 능력을 압도적으로 초과합니다. 교회 안팎을 합한 군중 규모이거나 과장일 수 있습니다 → 숫자는 확정하지 않습니다 미확인.
  • 북한 당국의 공식 서술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미확인.
  • 이 사건은 일본어 잡지에도 「章臺峴敎會事件」이라는 이름으로 연재되었습니다: 『北韓反共鬪争記/平壊「章臺峴教会事件」: 基督教청년연합회의 反共闘争』(編輯部, 서울: 時事通信社, 1979.3.1, 국중도 제어번호 CNTS-00130953819, 이용조건 [국립중앙도서관,협약도서관-열람,인쇄시 과금]). 본문은 방문 열람이 필요해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미확인.
    ※ 등급 주의: 1979년 간행물은 1946년 사건의 동시대 기록이 아니라 33년 뒤의 회고·편집물이므로, 사건에 대해서는 회고 자료이고 1차로 볼 수 있는 것은 「그런 제목의 간행물이 1979년에 존재했다」는 서지 사실뿐입니다.

16-2. 1947년 4월 — 평양시내연합신도대회

“1947년 4월 27일부터 장대현교회에서 2,000여 명이 모여 평양시내연합신도대회가 열렸다.”
4월 28일 장로교청년면려회 지도자 김두영이 기독교면려청년회를 해산시킨 것을 비판했고, 이후 북한 당국은 오도연합회장 김진수 목사 등 지도부를 체포하고 기독교 청년단체를 해산시켰다.

박명수 학술
▣ 이 날짜가 「소멸」 논의의 하한선이다

1947년 4월 시점에 장대현교회가 2,000여 명 규모 대회의 회집 장소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즉 교회 시설은 사용 가능한 상태였습니다. (전원이 예배당 실내에 들어갔는지, 건물이 온전했는지는 이 문장으로 확정되지 않습니다 미확인)

16-3. 1947년 11월 — 담임목사 김화식의 체포

인물김화식(金化湜) 목사 — 평양 장대현교회 시무
정당기독교자유당. 1945년 11월 초 정주에서 뜻을 같이한 교회 지도자들과 정강 작성. 1947년 9월 유엔총회의 한국 문제 논의를 앞두고 김관주·황봉찬 목사 등과 결당 추진
결당식 예정1947년 11월 19일
체포결당식 하루 전인 1947년 11월 18일, 창당 작업이 누설되어 김화식 목사를 비롯한 교회 지도자 40여 명이 북한 내무서에 일제히 검거·투옥
최후김화식은 18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사망. 다른 지도자들도 대부분 옥사 또는 행방불명

출처: 주간기독신문 「기독교자유당사건」(2005.11.17) 언론

⚠ 출처가 말하는 범위를 넘지 않는다
  • 장대현교회를 시무하던 김화식을 포함해 교계 지도자 40여 명이 검거되었고, 김화식은 18년형을 받고 복역 중 사망했으며, 보도에 따르면 다른 지도자들도 “대부분” 옥사 또는 행방불명되었습니다. (40여 명이 모두 장대현교회 소속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 출처는 “교회 지도자 40여 명”이라고만 적습니다.)
  • 이 사건을 「장대현교회 몰락의 실질적 종점」으로 보는 것은 평가입니다 추론. 확정된 사실은 “담임목사가 1947년 11월에 검거되어 복역 중 사망했다”까지입니다.
  • 김화식이 언제 장대현교회에 부임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미확인. 일부 웹 서술에 “2대 담임목사”라는 표현이 보이나 전거를 찾지 못했습니다 (길선주 이후 1933~1945년 사이의 담임 승계가 공백이므로 “2대”라는 서수는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미확인.

16-4. 북한의 기독교 통제 제도화

시기사건
1945. 9신의주에서 한경직·윤하영 목사가 기독교사회민주당 결성
1945. 12. 27모스크바 3상회의 신탁통치에 반대하던 조만식 장로 제거(연금)
1946. 2. 8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구성(위원장 김일성)
1946. 3. 1장대현교회 3·1절 기념예배 사건
1946. 11평양에서 기독교자유당 결성(당수 고한규 장로)
1946. 11. 3주일에 실시되는 선거 공포 → 북녘 교회들이 “주일에는 예배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강경 대응 → 탄압 본격화
1946. 11. 28북조선기독교도연맹 창립. 위원장 강양욱 목사(김일성의 친척,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서기장)
1947. 4. 27~장대현교회 평양시내연합신도대회(2,000여 명)
1947. 11. 18기독교자유당 사건 — 김화식 등 40여 명 검거
1949. 4평양 연화동교회 노회에서 기독교도연맹 비가입자 제명 결정

출처: 김동춘 목사, 「해방 이후의 북한교회사」, 고신뉴스 2023.2.15 등 언론

→ 1949년 4월의 「비가입자 제명」은 결정적입니다. 이 시점 이후 조선(북조선)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은 교회는 제도적으로 존립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언론. 장대현교회가 이 연맹에 가입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미확인.

⚠ 출처의 성격 고지

위 서술은 전부 남한 기독교계 인사·연구자의 서술입니다. 북한 당국의 공식 발표나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측 기록으로 교차 확인한 것이 아닙니다. 탈북민 증언에 직접 의존한 대목은 없으나, 1990년대 이후 북한교회사 연구 자체가 월남 교인 증언을 주요 저본으로 구축되었다는 점은 선행 조사가 이미 지적한 바입니다 추론.

17. 소멸 — 정설이 없다

17-1. 확실한 것은 두 점뿐이다

1947년 4월 27일2,000여 명 규모 대회의 회집 장소로 쓰였다 — 시설이 사용 가능한 상태 학술

약 16년 5개월 — 이 구간의 기록이 없다
건물이 언제·어떻게·누구에 의해 없어졌는지를 말한 사료는 한 건도 확인되지 않았다

1963년 9월 30일장대재(장대현) 언덕에 평양학생소년궁전 개관식 북한공식(간접)

▣ 여기는 기록이 없습니다

예배당이 없어진 시점은 1947년 4월 이후 어딘가입니다. 그 이상으로 좁힐 근거를 찾지 못했습니다.

★ 1963년을 「확정 상한」으로 쓸 수 없는 이유: 학생소년궁전이 장대현교회 예배당이 서 있던 바로 그 지점에 세워졌는지는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18-3). 같은 언덕(장대재)이라는 것과 같은 필지라는 것은 다릅니다. 따라서 “1963년 9월 30일 이전에는 반드시 없어져 있었다”는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 위 16년 5개월은 「소멸의 확정 범위」가 아니라 「관련 사실이 기록된 두 시점 사이의 공백」으로만 읽어야 합니다.

17-2. 상충하는 두 서술

▣ 여기는 갈립니다 ⑭ — 예배당은 폭격으로 사라졌는가

설 ① — 「6·25 폭격으로 소실·파괴됐다」

  • 대한예수교장로회 영은교회 소식지 『동행』: “1950년 6·25 전쟁 중 폭격을 맞아 완전히 파괴되었다” 언론
    ※ 이 조사에서 해당 페이지를 열려 했으나 SSL 인증서 검증 실패로 접속하지 못했고, 인증서 검증 무시 옵션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위 문장은 검색엔진이 반환한 요약문에서 확인한 것이며 원문을 직접 읽지 못했습니다 미확인.
  • 일반론으로서 평양 시가지가 6·25 기간 유엔군 폭격으로 극심하게 파괴된 것은 사실입니다. 김동춘 목사는 “유엔군이 평양 시가지를 폭격하기 시작하고 교회와 학교들도 폭격을 맞아 파괴되는 것을 보면서”라고 씁니다 언론. 관련 학술 연구로 김태윤, 「6·25전쟁기 평양의 전시폭격과 도시방공정책(1950~1953)」, 『현대북한연구』 25권 2호가 있습니다 학술 (서지만 확인, 본문 미열람 미확인).

설 ② — 「전쟁 후에도 상당 기간 그대로 서 있었다」

전쟁으로 평양의 교회 건물이 “많이 파괴된 것은 사실이지만 다 파괴된 것은 아니라”
“평양의 장대현교회도 전쟁 후 상당 기간 그대로 서 있었다.”
“장대현교회가 있던 자리에는 평양학생소년궁전이 세워졌고, 2012년 4월에는 김일성 부자의 대형 태양상(모자이크 벽화)이 건립되었다.”
전통교회가 지상에서 자취를 감춘 이유로 “중앙당집중지도, 주민재분류 등록 등 여러 이유”를 든다.

유관지 목사(북한교회연구원 원장), 「평양 장대현교회 자리에 들어선 김일성 부자 태양상」, 크리스천투데이 2019.1.2 언론

설②를 조금 더 무겁게 보는 이유 추론 — 증거가 아니라 평가입니다:

  1. 유관지는 북한교회사 전공 연구자이고, 이 문장은 “다 파괴된 것은 아니다”라는 그의 명시적 주장의 일부입니다. 즉 지나가는 말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통념을 반박하는 서술입니다.
  2. 설①의 출처(교회 소식지 기고문)는 전거를 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원문을 직접 읽지도 못했습니다.
  3. 북한 측 서술이 설②와 정합적입니다. 모퉁이돌선교회 기도지도가 전하는 김일성의 발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북한공식(간접):
    “전후의 그 어려운 형편에서도 평양시에서 제일 좋은 명당자리인 장대재에 우리 아이들의 궁전을 짓도록”
    → 이 문장은 “전후에 장대재를 골라서 새로 지었다”는 뜻이지, “폭격으로 비어 있던 터를 썼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어느 쪽도 배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설②도 채택할 수 없습니다:

  • 유관지도 근거를 대지 않습니다. “상당 기간”이 몇 년인지, 무엇으로 아는지(사진? 증언? 북한 문헌?) 밝히지 않습니다.
  • 철거 시점·주체·방식을 말한 사료가 한 건도 없습니다.
  • 1953년 이후 장대현교회 건물이 찍힌 사진·항공사진·문헌을 한 건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미확인.

그러므로 이 글의 판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평양 장대현교회 예배당이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다.」

· 6·25 폭격 소실설과 전후 존속 후 철거설이 병존하며, 양쪽 모두 1차 근거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 확실한 것은 두 가지뿐입니다: ① 1947년 4월에는 2,000여 명 규모 대회의 회집 장소로 쓰일 만큼 사용 가능한 상태였다. ② 1963년 9월에는 같은 언덕(장대재)에 평양학생소년궁전이 개관했다 — 다만 정확히 같은 필지인지는 확정되지 않았다.
·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17-3. 왜 확정되지 않는가 — 세 겹의 구조적 원인

  1. 문서 생산자가 사라졌습니다. 1947년 11월 담임목사 김화식을 포함한 교계 지도자 40여 명이 검거되었고 (40여 명 전원이 장대현교회 소속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교회 자체 기록(당회록)은 국내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선행 조사의 확정 결론).
  2. 1953년 이후 평양은 남측 연구자가 접근할 수 없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사진·항공사진·현장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3. 북한 당국은 “없어진 교회”를 기록할 동기가 없습니다. 북한 매체는 장대재에 궁전을 지었다고만 말하지, 거기 무엇이 있었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 즉 이것은 “아직 못 찾은 것”이 아니라 “사료가 생산되지 않았거나 소멸한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추론.

17-4. 그 밖에 유통되는 주장 — 근거 없음으로 분류

⚠ 사실 서술로 채택하지 않은 것
  • 김진홍 목사(2019년 8월 18일 사랑의교회 주일예배 설교, 기독일보 2019.8.20 보도) 증언·주장: “그 자리가 장대현교회가 있던 자리이기 때문” / “장대현교회를 헐어내고 김일성 동상을 세운 것이다” / “그 뜻깊은 교회를 헐어버리고 김일성 동상을 세웠으니 (동상을) 헐어야 되지 않겠나?”
    → 설교 중 발언이며 전거 없음. 그리고 사실 관계상 그 자리에 세워진 것은 1963년 평양학생소년궁전이고, 만수대 김일성 동상(1972년)은 인근의 별개 구조물입니다. “교회를 헐고 동상을 세웠다”는 서술은 지리적으로 인접하나 동일 부지가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추론.
  • 임창호 목사(부산 장대현학교 초대 교장)도 유사한 취지로 “김일성이 장대현교회를 무너뜨리고 자기 동상을 세웠다”고 말한 것이 보도되었습니다 증언·주장. 같은 이유로 사실 서술로 채택하지 않습니다.

18. 지금 그 자리에는 무엇이 있는가

18-1. 평양학생소년궁전(1963)

개관1963년 9월 30일, 평양 중구역 장대재(장대현) — “평양의 명당자리 장대재에서 평양학생소년궁전 개관식이 진행되었다” 북한공식(간접)
※ 북한 매체 원문에 접속하지 못했고(접속 오류), 검색 결과 요약·통일뉴스·선교단체 자료로 간접 확인한 것입니다.
입지대동강을 내려다보며, 마주 보아 왼쪽에 인민대학습당, 오른쪽에 만수대의사당
김일성 발언
(간접 인용)
“전후의 그 어려운 형편에서도 평양시에서 제일 좋은 명당자리인 장대재에 우리 아이들의 궁전을 짓도록”
규모200여 개 소조실·활동실, 500여 개 방, 1,100석 극장, 체육관, 도서관 등
학술 연구박동민, 「평양학생소년궁전의 건설 과정과 구성 전략 — 권력의 표상과 탈기념비성의 공존, 1950-1963」, 『대한건축학회논문집』 41권 12호(통권 446호), 2025, 209-220쪽, DOI 10.5659/JAIK.2025.41.12.209. 초록: “1963년 평양의 중심에 완성”되었으며 “강력한 국가 권력을 표현하며 동시에 인민을 위한 건축임을 보여주려” 했고, “대칭과 비대칭의 결합, 수직 타워와 수평적 구성의 병치, 소비에트 신고전주의와 기능적 미학의 혼용”을 시도 학술
※ 본문은 열람하지 못했습니다(KCI 초록만 확인). 논문 제목이 “1950-1963”을 범위로 잡고 있으므로 부지 선정·전후 정리 과정에 대한 서술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후속 확인 대상 미확인.
▣ 여기는 갈립니다 ⑮ — 개관은 1963년인가 1967년인가

위키백과(한국어) 「평양학생소년궁전」 항목은 “중구역 종로동 소재, 1967년 4월 15일 개관”이라 적습니다 백과. 1963년설(북한 매체·2023년 “창립 60돐” 보도)과 4년 차이가 납니다. 증축·재건축 시점일 가능성이 있으나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미확인. 이 글은 북한 매체가 “창립 60돐”을 2023년에 기념한 사실을 근거로 1963년을 우선 채택하되, 1967년설을 병기합니다.

18-2. 2012년 태양상(모자이크 벽화)

유관지: “2012년 4월에는 김일성 부자의 대형 태양상(모자이크 벽화)이 건립되었다.” 언론 → 이 벽화가 궁전 건물의 일부인지 인접 부지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미확인.

18-3. 위치 비정이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다

▣ 여기는 갈립니다 ⑯ — 예배당은 정확히 어느 건물 밑인가
서술자현재 그 자리
유관지(2019) 언론평양학생소년궁전 → 2012년 태양상
권성아(2016) 언론“이 장대현교회 자리에는 1963년 평양학생소년궁전이 세워졌다”
모퉁이돌선교회(2023) 선교단체“1963년에 설립되었고 장대현교회가 있었던 곳”
최재영, 「북한교회를 가다⑧ 평양장대현교회」, 통일뉴스 2016.7.25 언론 “현재 그곳은 남산현감리교회가 있던 자리였다. 장대현교회는 실제 만수대언덕 인근에 있던 것으로 확인됐다” — 김일성·김정일 동상과 만수대의사당이 그 일대를 차지

→ 장대재(장대현) 언덕 = 만수대 언덕 일대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고, 그 언덕이 지금 평양의 정치적 성소(만수대의사당·인민대학습당·김일성김정일 동상·평양학생소년궁전)로 전면 재편되었다는 점에도 이견이 없습니다. 다만 예배당의 정확한 지점이 어느 건물 밑인지는 서술자마다 다릅니다 미확인.

※ 최재영 기사의 “남산현감리교회가 있던 자리” 서술은 주의를 요합니다. 남산현교회는 감리교 측 평양 모교회로 장대현교회와 별개의 교회이며, 두 교회는 “평양의 쌍벽”으로 불렸습니다. 한 지점을 두고 두 교회를 동시에 비정할 수는 없으므로, 이 문장은 취재 과정의 혼선이거나 인접 부지를 가리킨 것으로 보입니다 추론.

19. 그 이후 — 세 갈래의 후신(後身)

19-1. 현재 평양에 「장대현교회」라는 교회가 있는가 — 확인되지 않는다

북한에 현존이 확인되는 개신교 예배당은 두 곳뿐입니다 언론.

교회완공첫 예배비고
봉수교회1988년 봄1988년 11월 6일6·25 이후 북한 땅에 최초로 세워진 예배당을 가진 교회
칠골교회1989년 착공 → 1992년 완공1992년 11월 29일두 번째

제3의 교회 논의 경과 언론:

시기내용결과
2003. 11예장 통합총회가 북 조선그리스도교련맹과 평양시 대동강구역 청류동 대동강변에 제3의 교회 설립 합의(한국일보 2003.11.28 보도)이후 실현 여부 미확인
2005. 11
~2006. 2
예장 합동 측이 「평양장대현교회 복원사업」 추진. 북측 조그련은 “이미 칠골교회와 봉수교회가 있어 독자적인 장대현교회 설립이 어렵다”는 입장 명칭 협상 결렬 — 북측이 “장대현교회봉사센터”가 아니라 「장대현봉사센터」로 종교색을 뺄 것을 요구. 사업명이 「장대현봉사센터 건립사업」으로 변경
⚠ “없다”가 아니라 “확인되지 않는다”

“평양의 장대현교회”에 해당하는 것으로 확인되는 것은 2005~06년의 추진 계획뿐이며, 그 계획에서 「교회」라는 명칭은 북측 요구로 빠졌습니다. 다만 사업명 변경이 사업 전체의 무산을 입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 2006년 이후 「장대현봉사센터」가 실제로 건립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미확인.
→ 판정: 현재 평양에 「장대현교회」라는 교회가 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한 건도 찾지 못했습니다. “없다”고 단정하지는 않습니다 —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이 공개하지 않은 시설이 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습니다.

19-2. 경기 이천의 1/5 축소 복원 예배당(2007) — 실물로 볼 수 있는 유일한 장대현교회

완공·헌당2007년 9월 20일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 기념)
규모원 120평 → 1/5인 24평. 외부 ‘ㄱ’자 형태와 내부 구조 모두 당시와 동일하게 복원
복원 책임자이덕주 박물관 부관장(감신대 교수): “1백년 전 당시 장대현교회의 모습 그대로 복원하려고 노력했다”, “크기만 120평에서 5분의 1 크기인 24평으로 축소했다”
복원 근거원본은 현존하지 않으며 “빛 바랜 사진만이 남아있을 뿐” → 사진 자료 기반 복원
전시2018년 개보수 완료. 1900년대 예배 재현을 위해 주보·찬송가·풍금 배치. 당대의 성경책, 제임스 게일 선교사 편찬 한영사전, 『그리스도신문』 등 전시
소재경기 이천시 대월면 대평로214번길 10-13 (지번: 대월면 초지리 474-2) —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출처: 최재영(통일뉴스 2016.7.25), 노컷뉴스(2007.9.21), 데일리굿뉴스(2018.6.7), 경기일보(2024.11.14) 언론
관련 간행물: 『평양 장대현교회 예배당 : 1907년 대부흥운동 100주년 기념』(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편, 2007)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확인 1차.
방문 정보는 부록 ①에 있습니다.

“2007년 ‘평양 대부흥 운동 1백주년’을 기념해 장대현교회를 축소 복원한 건물이 서 있다. 초기 기독교의 건강한 정신을 회복하자는 뜻이 담긴 건물이다.”

경기일보, 2024. 11. 14 언론

19-3. 월남·탈북 교인들의 흔적

(가) 이름을 계승한 남한 교회 — 부산 장대현교회 / 장대현학교 언론

부산 장대현교회2007년 7월 설립, 설립자 임창호 목사(전 고신대 기독교교육학 교수·교학부총장).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교단 유일의 탈북민 교회로 소개된다
장대현학교부산 소재 탈북청소년 대안학교(영호남 최초). 중등 2학급·고등 2학급, 정원 20명으로 출발. 설립 10년 만에 부산시교육청 인가
교명의 유래임창호 발언: “앞으로 평양 그곳에 장대현학교가 세워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또 북한의 재건에 여기서 배운 학생들이 큰 일군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학교 이름을 장대현으로 지었다” 증언

→ 평양 장대현교회와 법적·조직적 계승 관계는 없습니다. 이름과 지향을 물려받은 것입니다. 추론

(나) 월남 교인의 회고 — 존재는 확인, 내용은 미확인

이희철, 「특별기고 : ‘평양 대각성운동’ 장대현교회의 추억」, 영락교회, 2007

국립중앙도서관 서지로 존재 확인 1차

→ 장대현교회를 직접 기억하는 월남 교인의 회고 기고문이 실재합니다. 영락교회는 1945년 12월 한경직 목사가 월남 피난민 27명으로 세운 교회입니다 백과. 이 조사에서 이 기고문의 본문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미확인 — 부록 ②의 후속 과업 2순위입니다.

(다) 1935~36년 주보를 보존해 남한으로 가져온 방지일 목사 — 장대현교회의 물증을 남한에 남긴 실물 경로입니다 1차. (→ 부록 ① 국회도서관)

모아 보기 1연표 — 1866부터 지금까지

범례. ★ = 이 글에서 가장 단단한 사실. ⚔ = 자료 간 불일치가 있어 후보를 병기한 항목. 연·월·일이 하나로 확정된 것만 굵게 표시했습니다.

연·월·일사건등급
1866. 8. 9토마스, 제너럴셔먼호로 중국에서 조선 향발언론
1866. 9. 4제너럴셔먼호 대동강 좌초언론
⚔ 1866. 9. 2
또는 9. 5
토마스 사망미확인
1866. 9.「제너럴 셔먼호 대동강에서 소각, 토마스 순교」(연구소 연표)학술
1890~1892마포삼열, 평양 순회 선교학술
1893. 1.마펫이 한석진을 평양에 데려옴 → 한석진 상주언론
⚔ 1893. 2. /
1893. 5.
마펫 합류. 20여 명 모아 홍종대 소유 널다리골 기와집 매입, 예배 시작언론
1893. 10.첫 사경회, 참가 22명학술
⚔ 1894. 1. 7 /
1894. 1. 8
세례 7명·첫 성찬식 → 널다리골교회(=장대현교회) 설립일로 기록학술 언론
1894.숭덕학교 설립(평양 관후리). 교회 내 「예수학당」에서 숭덕·숭현 발전언론
1894.로제타 홀 평양 도착학술
1895. 10.Moffett, Evangelistic Work in Pyeng Yang and Vicinity — 남녀 분리를 위한 두 날개 + 접점 강단 설계 원리를 문서화1차·2차경유
1896.교인 300여 명언론
1897. 2.배위량 평양 이거 → 사랑방 13명으로 숭실학당 출범언론
⚔ 1897. 8. /
1897. 8. 15
길선주, 널다리골교회에서 그레이엄 리에게 세례 (8.15는 『要集』 103-108쪽)학술 1차·2차경유
1898. 봄이신행·박관선·김성신 중심 부인전도회 조직 — “여자들만으로 구성된 최초의 조직체”백과
1898.길선주, 널다리골교회 영수1차 학술
1899.박춘곤(박춘권) 세례 → 신도 급증 → 장대현 예배당 건립 결정백과 언론
⚔ 1899 / 1900.6 /
1901 / 1903
「장대현교회」로 개칭미확인
1900. 봄장대현 예배당 착공1차·2차경유
★ 1900. 6. 25정초석(cornerstone) 놓음1차·2차경유
1900. 6.김종섭 장로 장립 → 당회(堂會) 조직백과 언론
1900.평양 공의회, 김종섭·방기창을 목사후보생으로 선발언론
1900. 10. 22Moffett→Ellinwood 서신: Sharrocks가 “truly great undertaking”에 결정적 도움1차·2차경유
1900. 말1차 완공 목표1차·2차경유
⚔ 1900. /
1901. 6.
예배당 준공/봉헌 (백과=1900 준공 / 언론=1901.6 봉헌, 남녀 1,500명 운집)백과 언론
1901.길선주·방기창 장로 장립백과 언론
1901. 4.예배당 제2 날개 착공, 6월 지붕 완료1차·2차경유
1901. 중반Graham Lee 출국 → George Leck이 건축 인계1차·2차경유
1901. 6.교인 1,200~1,400명학술
1901.평양 관하 18개 예배처소언론
⚔ 1901. 5. /
1901. 가을
평양장로회신학교 설립 — 김종섭·방기창 2인, 마펫 교장학술 언론
1902.길선주 조사(助事) 임명백과
(1902)갤러리 증축 희망 — 실제 건축 여부 미확인1차·2차경유
1903.남문외(남문밖)교회 분립 (제2교회)1차 학술
1903.원산 부흥(하디)백과
1904년경조만식, 장대현교회 출석 시작언론
1905.창동교회 분립 (제3교회)1차 학술
⚔ 1906. 1. 7 /
1906. 1. 17
산정현교회 분립 — 「平壤城內 第四敎會」. 담임 편하설. 1.7이 『平壤山亭峴敎會史記』 1쪽의 기점1차·2차경유
1906. 8.평양 선교사들의 1주일 영적 심화 사경회학술
1906. 가을길선주, 당회 결의로 전 교인 새벽기도회 시작(박치록과 함께). 300~500명언론
1906. 12. 12
~ 12. 22
황해도 재령 남자 도사경회 — 길선주 인도, 김익두 성령 체험. 연구소 연표 원표기 「1906年 12月 12-22」(하나의 기간)학술 언론
—길선주 친필: “一九0六年 冬期 大査经 ᄯᅢ의 圣神 降临하다”1차
1907. 1. 2
~ 1. 15
평안남도 (동계) 남자 도사경회 — 장대현교회. 참가 약 1,000명(교계 매체 순환 수치, 1차 근거 미확인)언론
1907. 1. 6 (주일)평양 시내 4개 장로교회 연합 저녁집회 개시 — 1,500명(교계 매체 순환 수치). 남녀 분리. 함께 유통되는 「영하 30도」는 1차 근거 0 미확인언론
1907. 1. 12 (토)방위량(Blair) 고전 12:27 설교. “그때까지 열린 저녁 집회 중에 최고”1차 언론
1907. 1. 13 (주일)“집회는 냉랭했고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떠난 것처럼 보였다”1차
★ 1907. 1. 14 (월) 밤절정. 헌트 설교 → 이길함이 통성기도 인도 → 길선주 공개 자복 → 새벽 2시까지. 500~600명 잔류1차 학술
1907. 1. 15 (화)“성령의 현시는 더 강력했음”. 약 600명. 오랜 미움이 풀림1차
1907. 1. 16 (수)숭현여학교·남학교·초등학교로 확산1차
★ 1907. 1. 31주공삼 장로, 『그리스도신문』 1차 기고(목격담)1차
★ 1907. 2. 28주공삼 장로, 『그리스도신문』 2차 기고(자기 회개)1차
1907. 6. 20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 7인 — 길선주·양전백·한석진·이기풍·서경조·송인서·방기창언론 학술
★ 1907. 9. 17장대현교회에서 대한(조선)예수교장로회 제1회 독노회 창립. 한국인 장로 40 + 선교사 38 = 78명. 회장 마포삼열·부회장 방기창·서기 한석진·부서기 송인서·회계 이길함. 7인 목사 안수언론 학술
★ 1907. 10. 3길선주, 장대현교회 목사직 시작(『要集』 친필 이력) ⚔ 이재근은 9.17 위임설1차·2차경유
1908. 5. 19 / 10.평양신학교 교사 정초식 / 준공언론
1908.부흥이 만주·중국으로 파급언론
1909.서문외(서문밖)교회 분립 (1909. 3. 14설)1차 선교단체
1909.산정현교회, 유흥면 산정현에 56평 예배당 신축·교회명 확정언론
1909.선교 25주년 기념식에서 마펫이 토마스에 대한 공식 평가학술
1911~1913
(길선주 수난
1912)
105인사건. 백과사전 축자 “1912년 105인사건 때에는 많은 애국지사와 함께 수난당하였고”. 사건 연대는 1911. 10 검거 → 1912. 9 1심 105명 유죄 → 1913. 3 항소심 99명 무죄 (널리 유통되는 「1910년」은 근거 없음)백과 1차
1910.장로교공의회 소속 선교사 67 · 한국인 사역자 36 · 예배소 2871차
1911. 1.변인서, 장대현교회 장로 장립 — NCCK 축자 「1월, 장대현교회 장로로 장립되었다」. 장로 = 당회 구성원(유통되는 「집사」는 오기)백과
1913. 4신암교회 분립 (※1930년대 아님 — 통설 정정)선교단체
1915.존스(G. H. Jones), 미국에서 토마스를 순교로 기술학술
1915. 11. 2每日申報 「平安南道: 章臺峴會祈禱式」1차
1915. 12. 26每日申報 「지방통신: 평안남도, 장대현 장로교」1차
1917. 6.변인서, 평양 장로회신학교 제10회 졸업·평남노회 목사안수언론
1917. 7. 10변인서, 장대현교회 동사(同事)목사 취임 — 담임 길선주를 도움언론
1919. 1. 21고종 승하언론
1919. 2. 26평양 장로교회 6곳에 숭덕학교 봉도식+독립선언식 통지 발송언론
★ 1919. 3. 1
오후 1시
장대현교회의 종이 신호 → 숭덕학교 교정(장대현교회 앞)에서 고종 봉도식 + 독립선언식. 주도 김선두 목사. 참가 ⚔1,000명/2,500명백과 언론
1919. 3. 1길선주, 사리원→남대문역 오후 6시 도착, 태화관 불참1차 학술
1919. 3. 2
~ 3. 9
평양 만세시위 매일 계속. 총 1만여 명, 목사 30여 명 체포백과
1919~1920길선주 서대문형무소 20개월 미결수. 변인서가 장대현교회를 이끎학술 백과
1920. 5. 30『東亞日報』 「聯合靑年傳道會」 — 장대현·산정현 등 평양연합청년전도회 활동1차
1920. 10.길선주 경성 복심법원 무죄 판결·출옥학술
1921. 3. 25每日申報 「平壤 崇實 졸업, 장대현예배당에서 성대히 거행되었다」1차
1922.장대현교회 사무가 동사목사 변인서에게 위임됨, 길선주는 순회 부흥집회언론 백과
1924.『平壤山亭峴敎會史記』의 기록 종점1차·2차경유
1925.『平壤老會地境 敎會史記』(평양노회 지경 각 교회 사기) 원간 — 강규찬·김선두·변인서 공저. 140개 교회 수록, 「1. 평양부 장대현교회사기」가 첫 항목이자 최대 분량(pp.25~46)1차
1912~1942★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평양에서 14회 열렸으나 장대현교회당은 한 번도 개최지가 아니었다(서문밖·창동·평양신학교뿐).
※ 이 목록은 1912년 제1회 총회부터 시작합니다. 그 전신인 1907년 제1회 독노회는 장대현교회에서 창립되었습니다(위 1907. 9. 17 항목). 두 줄을 함께 읽어야 합니다.
1차
⚔ 1926. 2길선주·당회에 불만을 가진 청년·교인 일부가 널다리골교회 분규를 일으킴 (신문 보도보다 1년 이르다)학술
★ 1927. 2. 17每日申報 「長老選擧問題로 章臺峴敎會紛糾 役員과 靑年派가」 / 朝鮮新聞 「목사가 장로선거 투표를 속이다」1차
1927. 2. 26中外日報 「地方時論 : 章臺峴敎會紛糾에 對하야」1차
★ 1927. 3. 8예배당 내 육박전. 「原因은 責罰問題」·「靑年間毆打, 婦人痛哭」·「六百男女敎徒늘어서 서대혼잡」·「三十年來에 처음되는 일」(中外日報 4건)1차
1927. 3. 10朝鮮新聞 「분요 확대, 예배 석상에서 구타 소동」1차
1927. 3. 18中外日報 「老年派가 靑年派毆打」1차
1927. 3. 30中外日報 「老年派排斥 第二回宣言」1차
⚔ 1927길선주, 목회 25주년을 기념하며 담임목사직 사임(설 A)학술
1929. 10. 11中外日報 「主日校大會開幕 … 평양성 장대현교회당에 넘치는 오천여명」1차
1930장대현교회 교인 1,209명 (cf. 서문밖교회 1929년 3,000명)선교단체 언론
⚔ 1931평양노회가 길선주 사직 처리(설 B) — 전거 확인 실패미확인
1933. 4. 13朝鮮新聞 「北長派에 대한 반기로 판명, 이응삼(李應三) 고소할 모양, 장대현교회 난투사건」1차
1933. 5. 5朝鮮中央日報 「八名處分으로 又復肉彈戰 … 警察出動煽動者檢擧」1차
★ 1933. 5. 30평양임시노회(산정현예배당) — 장대현교회 목사·장로·집사·권사의 총사표 접수 + 사표 미제출 제직·반장까지 「현직 전부를 사직시키기로 만장일치 가결」학술
★ 1933. 6. 15朝鮮中央日報 「章臺峴敎會 紛糾依然繼續 길목사는 사임」1차
1933. 9. 7~8朝鮮新聞 「교회당에서 난투 소동, 옹호파와 반대파」 / 朝鮮中央日報 「敎徙三百餘名이 교회당에서 난투, 반대파측 3명 부상」1차
★ 1933. 10. 3~7제25회 평양노회 정기회(산정현교회)에서 장대현교회 담임 길선주 사임(설 C)학술
1933~방지일, 장대현교회 전도사 시무. 『장대현교회 주보 1935-1936』 제작·보존 → 영인본 국회도서관 소장1차 언론
⚔ 1934. 5. 22 /
5. 24 / 5. 27
신현교회(=이향리교회) 창립(22) / 평양특별노회 분립 만장일치 승인(24) / 분립예배 — 여자 90여·남자 130여 = 약 220명(27). 소재 평양부 장별리 48. 담임 이유택. 이동 교인 500여 명이라는 서술도 있음선교단체 학술
1934. 5. 31京城日報 「기독교 개혁의 봉화, 전통교리를 피로 물들여 배격, 장로파 장대현교회의 新人派 마침내 이탈, 新敎 수립을 목표로」1차
1934. 5. 31 이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범위에서 장대현교회를 다룬 동시대 신문 기사가 1979년까지 한 건도 없다미확인
1935. 11. 26길선주, 강서군 고창교회 사경회 중 뇌일혈로 별세(67세). 12. 3 숭실대학 강당에서 4,000명 참석 평양노회장(葬)학술
1938. 2. 9평북노회를 시작으로 전국 23개 노회 중 17개가 총회 이전에 신사참배 결의(평양노회는 8월)언론
⚔ 1938. 9. 9~15
(일부 자료 9~16)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 평양 서문밖교회당. 총대 193명. 총회장 홍택기1차 언론
★ 1938. 9. 10평양노회장 박영률(박응률) 목사의 긴급 제안으로 신사참배 결의 가결. “신사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다”. 당일 총대 20여 명이 평양신사 참배언론
1938~1945장대현교회의 신사참배 관련 행보 — 사료 0건미확인
1939. 12. 19평양노회 임시회, 산정현교회 주기철 목사 권고사직(면직)언론
1944주기철 순교언론
1945. 11김화식 목사(장대현교회), 정주에서 기독교자유당 정강 작성언론
1946. 2. 8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구성언론
★ 1946. 3. 1「장대현교회 사건」 — 인민위원회의 평양역전 기념식 참석 요구를 거부하고 장대현교회에서 3·1절 기념예배. 무장 적위대 난입·해산. 조만식 석방 요구 시위. 50여 명 연행 (참석 인원 “만 명 가까이”는 출처 미상)학술 언론 백과
1946. 11. 3주일에 실시되는 선거 → 교회 반발 → 탄압 본격화언론
1946. 11. 28북조선기독교도연맹 창립(위원장 강양욱)언론
★ 1947. 4. 27~28장대현교회에서 「평양시내연합신도대회」 — 2,000여 명 참집. 김두영이 기독교면려청년회 해산을 비판 → 오도연합회장 김진수 목사 등 지도부 체포, 청년단체 해산
→ 장대현교회 시설이 사용 가능했음이 확인되는 마지막 시점
학술
★ 1947. 11. 18기독교자유당 사건 — 결당식(11.19) 하루 전 누설. 장대현교회 목사 김화식 등 교회 지도자 40여 명 일제 검거. 김화식은 18년형, 복역 중 사망. 나머지도 대부분 옥사·행방불명언론
1949. 4평양 연화동교회 노회에서 기독교도연맹 비가입자 제명 결정언론
1950. 6. 25
~1953. 7
6·25 전쟁. 유엔군 폭격으로 평양 시가지 극심하게 파괴. 장대현교회 예배당의 피해 여부는 서술이 상충미확인
1950. 10국군·유엔군 평양 수복 후 약 한 달간 교회 재개(예: 용화동교회 10.22 주일예배). 장대현교회 관련 기록은 확인되지 않음언론 미확인
1963. 9. 30장대재에 평양학생소년궁전 개관식. 김일성: “전후의 그 어려운 형편에서도 평양시에서 제일 좋은 명당자리인 장대재에 우리 아이들의 궁전을 짓도록”
※장대현교회 예배당과 정확히 같은 필지인지는 미확정
북한공식(간접)
⚔ 1967. 4. 15위키백과(ko)는 평양학생소년궁전 개관을 1967년으로 적는다(중구역 종로동)백과 미확인
1972만수대 김일성 동상 건립(장대현교회 터와 인접하나 동일 부지 여부 미확인)미확인
1979. 3. 1時事通信社 일본어 연재 「北韓反共鬪争記/平壊『章臺峴教会事件』」 간행(국중도 CNTS-00130953819)1차(서지)
1988. 11. 6봉수교회 첫 예배언론
1992. 11. 29칠골교회 첫 예배언론
2003. 11예장 통합, 조그련과 평양 청류동 제3의 교회 설립 합의(이후 실현 여부 미확인)언론
2005. 11
~2006. 2
예장 합동의 「평양장대현교회 복원사업」 → 북측 요구로 「장대현봉사센터 건립사업」으로 변경(교회 명칭 삭제)언론
2007. 9. 20경기 이천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에 1/5 축소(24평) 복원 「평양 장대현교회」 예배당 완공. ㄱ자 형태·내부 구조 재현. 복원 근거는 남아 있는 사진언론
2007. 7부산 장대현교회(예장 고신, 탈북민 교회) 설립 — 임창호 목사언론
2012. 4장대현교회 옛 자리(평양학생소년궁전 일대)에 김일성 부자 대형 태양상(모자이크 벽화) 건립언론
2018. 6이천 복원 예배당 개보수 완료, 1900년대 예배 재현 전시언론

↑ 차례로

모아 보기 2갈리는 곳 한눈에

이 글이 한쪽을 고르지 않은 자리를 모았습니다. 인용하실 때 특히 조심해야 할 대목입니다.

#쟁점통설사료·다른 기록이 글의 처리
1토마스는 순교자인가한국교회 전통 = 순교자 옥성득: “1905년 이전 … 순교로 본 선교사는 없었다” / 한규무(2016) / 이은선(2016): 담론은 1909→1915→1926에 걸쳐 형성 판정 보류. 양측 모두 담론 형성이 40~60년 뒤라는 데는 일치한다는 점만 확정
2성경 벽지집 = 널다리골 예배당인가박영식의 성경 도배집이 그대로 평양 최초 교회가 되었다 사료 계열: 홍종대 소유 기와집을 매입해 예배당으로 썼다. 절충설: 벽지집은 최치량이 운영한 주막이고 예배당은 별개 통설 채택 안 함. 「벽지집=교회건물」은 1차 사료 미확인
3그 서사의 출처초기부터 전해진 사실 활자 원전은 오문환 『도마스牧師傳』(1928)·『평양양란』(1926), 동시대 문서가 아닌 구술 증언 기반 출처 등급을 명시하고 통설로만 기재
4박춘곤인가 박춘권인가박춘권(교계 다수)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박춘곤(朴春坤)」두 표기 병기. 동일인 가능성 매우 높음
5설립 연월일1893년 설립 연구소 공식 연표 1894. 1. 8 / 강석진 1894. 1. 7 / 1893.2·1893.5·1893(월미상) 등 최소 5갈래 1893=집회 발생, 1894.1.7~8=세례·성찬으로 제도적 성립이라는 분해로 정리, 7/8일은 미확인
6「장대현교회」 개칭 연도1903년 예배당 완공과 함께 개칭백과 1899년 / 다른 서술 1900. 6 / 강석진 1901년 이전 1900-1901년 선교사 1차 기록과 1903년설이 어긋난다. 확정 안 함
7예배당 준공 연도1900년 준공 1차 기록: 1900.6.25 정초 → 1900년 말 1차 완공 → 1901.4~6 제2 날개 → 1901.6 봉헌(1,500명) 1차 기록 쪽이 정합적이라 보되 백과 표기도 병기
8건축비·헌금한국인 5,000여 원 + 선교사 수천 원헌금 3,000여 원 / 총공사비 7,000여 원 병기. ★한국인 부담률은 A=62.5% / B=42.9%로 갈린다 — B로 읽으면 절반에 못 미친다. 「어느 쪽으로 읽어도 절반 이상」은 산술적으로 거짓이므로 쓰지 않는다
9길선주 목사 취임일1907. 9. 17(안수=위임)『要集』 친필: 1907. 10. 3에 장대현교회 목사직 시작1차 사료를 우선하되 대안 서술도 병기
10길선주와 남녀 분리 휘장백과: 길선주가 휘장을 제거한 개혁가 옥성득: 분규의 발단은 “남녀 간 벽을 허물자는 청년층의 요구를 길 목사 등이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 정면 충돌. 해소 못함
11장로 장립 연도이재근: 1901년에 길선주와 김종섭이 장로백과·다수: 김종섭 1900. 6(→당회 조직), 길선주·방기창 1901 1900/1901 분리 쪽을 채택(당회 조직 시점과 정합)
121907년 사경회 요일 표기번역문에 “1월 8일(주일)”1907. 1. 1은 화요일 → 주일은 6일·13일. 8일은 화요일 요일 정합성이 맞는 13일로 배치하고 불일치를 명시
13분규의 시작 연도2차 문헌 다수 1926년신문(물증)은 1927년 2월 “신문에 잡히는 제1차 분규는 1927년 2월부터”라고만 씀. 1926년설 폐기도 채택도 안 함
14변인서의 진영NCCK: “반대 세력의 대표적 인물”(중의적 문장)옥성득: 1933년 4월에 길선주와 함께 배척당함 확정 안 함. 문장 해석은 추론이지 사료가 아님
15길선주 사임 시점1927 / 1931 / 1933 세 설C설(1933)만 1차 사료(朝鮮中央日報 1933.6.15)가 있다 C설을 축으로, A설=실질 이선, B설=전거 없음
161934년 5월 이탈 집단“길선주가 500명을 데리고 나갔다” 박용규: 노회가 분립시킴 / 京城日報: 新人派(개혁파)의 이탈 — 정반대 진영 두 사건이 겹쳤을 가능성. 미해결
17분립 규모500명분립예배 참석 220명병기. 측정 대상이 달랐을 가능성은 추론
18예배당 소멸“6·25 폭격으로 완전 파괴”유관지: “전쟁 후 상당 기간 그대로 서 있었다” 정설 없음. 양쪽 모두 1차 근거 없음
19현재 평양에 장대현교회가 있는가“원위치가 아닌 곳에 후대 건물이 있다”확인되는 것은 2005~06년 무산된 계획뿐. 현존 예배당은 봉수·칠골 2곳 “확인되지 않는다”(부존재 증명 아님)
20평양학생소년궁전 개관1963년위키백과(ko) 1967. 4. 151963년 우선, 1967년설 병기
21옛 예배당의 정확한 지점“학생소년궁전 자리”최재영(2016): 그곳은 남산현감리교회 자리, 장대현은 만수대언덕 인근 필지 단위로 입증된 적 없음 — 「소멸」 논증 전체가 딛고 선 지반

↑ 차례로

모아 보기 3확인되지 않은 것

이 글이 메우지 않고 비워 둔 자리의 목록입니다. 인용하실 때 “이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시작·부흥 영역

미확인 항목사유
『평양노회 지경 각 교회 사기』 pp.25~46 「장대현교회사기」 본문 — 이 글이 다룬 거의 모든 항목의 최종 확정 근거가 여기 있을 것 국중도 디지털본이 관내/협약도서관 등록 지정 PC 전용(저작권법 §31①③). 실물은 3개관뿐. 책바다 신청이 현실적 경로(→ 부록 ②)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권(1928) 중 장대현교회 대목의 정확한 쪽수제2편 제5장 「교회설립」(pp.64~123) 구간으로 추정되나 교회별 소제목이 목차에 없음
장대현교회 연도별 세례교인·학습인 공식 통계평양노회록은 공개 목록에 없음. 독노회록은 국중도 1개관·열람 과금
William N. Blair, The Korean Pentecost 원문의 1907년 1월 대목도구가 저작권 사유로 추출을 거부 → 다른 도구로 재시도하지 않고 중단
길선주가 자복한 금액·대상의 확정(100원/100달러, 친구/친구의 아내, 13일/14일)원전 미확보(위와 동일 원인)
“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이올시다”의 1차 근거커뮤니티 매체에서만 확인. 1차 대조 못함
Graham Lee, “How the Spirit Came to Pyeng Yang”(KMF 1907.3) 영문 원문한국어 번역문만 확보. 번역 정확성·원문 대조 미검증
주공삼 기고문 전문보도 인용 4건만 확보. 원지면 미열람. 원본은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자료도서관 소장
옥성득의 주공삼 논문 서지(호수·쪽수)보도가 “최근호”로만 적음
토마스 사망일(9.2 vs 9.5) · 생년(1839 vs 1840)출처마다 다름
널다리골교회 설립일 7일 vs 8일 / 「장대현교회」 개칭 연도(1899/1900/1901/1903)서술이 병존
72칸과 120평의 산술 정합성 → 해소됨정합합니다. 칸당 5.51㎡ ≈ 전통 8자 칸 5.86㎡(4-3). 초판의 미확인 표기를 거두었습니다
「72칸·120평」이 어느 단계의 수치인가(1900년 말 1차 완공분인가, 1901년 제2 날개 완공 후인가)「1900년 준공 72칸」과 「1901. 4 제2 날개 착공」이 같은 건물을 가리킨다면 부딪칩니다. 1900년 말의 건물은 아직 두 날개가 아니었을 가능성
「수용 2,000명」·「교세 3,000명」이 무엇을 센 수인가120평 기준 1인당 0.198㎡·0.132㎡로 물리적으로 불가능. 교적부상 교인 수인지, 여러 예배 합계인지, 계통 전체인지 출처가 밝히지 않음
1900년 장대현 예배당의 ㄱ자 설계 결정자 / 갤러리(2층 발코니) 실제 건축 여부1895년 동문 예배처 개조 기록은 확보했으나 1900년 본당 설계 문서는 못 봄
연화동교회 분립 연도목차 순서상 1909년 이후로 보이나 미확인
박용규의 「1897년 분립 시작·1909년까지 11차 분립」 원출처2차 요약에서만 확인
1919. 3. 1 숭덕학교 집회 참가 인원(1,000명 vs 2,500명)출처마다 다름
「동양(한국)의 예루살렘」이라는 표현의 최초 사용자·시점확인 못함
1906년 이후 장대현교회 교세 「3,000명」의 원출처언론 서술의 근거를 못 찾음

몰락·소멸 영역

미확인 항목사유
국중도 신문 16건의 본문 텍스트(1927년 10건 + 1933~34년 6건)지면 스캔 이미지 + 브라우저 전용 뷰어. 뷰어 우회를 시도하지 않음. → 이 글의 1927·1933년 서술은 기사 제목·발행일이라는 서지 정보와 2차 문헌을 결합해 재구성한 것
장대현교회 예배당의 소멸 시점·방식·주체상충하는 두 설 모두 전거 없음
1953~1963년 사이 장대현교회 건물의 사진·항공사진·문헌0건
장대현교회 예배당 부지와 평양학생소년궁전 부지의 동일성(같은 필지인가) 복수의 남측 자료가 “장대현교회 자리에 학생소년궁전”이라 적으나 필지 단위로 입증한 자료가 없고, 최재영(2016)은 그 자리를 남산현감리교회 자리로 적는다. 「소멸」 논증 전체가 딛고 선 지반이며, 미확정이다
1938~1945년 신사참배 국면에서 장대현교회의 행보관련 서술 0건
1934~1945년 장대현교회 담임목사 승계 / 김화식 목사의 부임 시점확인 불가. “2대 담임”이라는 표현의 전거를 찾지 못함
장대현교회의 북조선기독교도연맹 가입 여부확인 불가
1950년 10월 평양 수복기 장대현교회 예배 재개 여부다른 교회(용화동) 사례만 확인됨
1946.3.1 사건 참석 인원 “만 명 가까이”의 출처칼럼에만 등장, 전거 없음. 예배당 수용 능력(1,500~2,000명)과 괴리
1979년 時事通信社 「平壤『章臺峴敎會事件』」 본문(CNTS-00130953819)국중도 관내/협약도서관 전용 + 열람 과금
박동민(2025) 「평양학생소년궁전의 건설 과정과 구성 전략 1950-1963」 본문 / 김태윤 「6·25전쟁기 평양의 전시폭격」 본문초록·서지만 확인
이희철, 「특별기고 : ‘평양 대각성운동’ 장대현교회의 추억」(영락교회, 2007) 본문서지로 존재만 확인
『장대현교회 주보 1935-1936』 영인본 내용국회도서관 소장. 미열람
청년파 지도자 박윤근(朴潤根)의 인적 사항·이후 행적0건
1933년 4월 기사의 「이응삼(李應三)」이 누구인가, 고소의 결말0건
1927년 3월 30일 「第二回宣言」에 앞선 「제1회 선언」 기사 / 1933년 5월 「八名處分」의 대상자 8명0건
박용규가 인용한 1933.5.30 평양임시노회 결의문의 원 출처(『기독신보』인지 노회록인지)확인 불가. 평양노회록은 남한 공개 목록에 부존재
2006년 이후 「장대현봉사센터」의 실제 건립 여부 / 2003년 「제3의 교회」 합의의 이행 여부0건
2012년 태양상이 궁전 건물의 일부인지 별개 부지인지확인 불가
1929.10.11 中外日報 기사와 2차 문헌(제3회 주일학교대회 회장)의 불일치 / 평양학생소년궁전 개관 연도 1963 vs 1967해소 못함
「1926년 250명이 신암교회로 분립」 주장의 근거신암교회 창립이 1913년 4월이므로 성립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나, 1920~30년대 이적 교인 존재 여부는 확인 불가
「당회원의 기생집 출입·고리대금·부동산 투기」 주장의 1차 근거기고문이 전거를 대지 않음. 당회록은 부존재
▣ 그리고 가장 큰 공백 — 당회록

「평양 장대현교회 당회록」은 2026년 9월 현재 국내외 어느 도서관·박물관·아카이브의 공개 목록에도 존재하지 않아 열람할 수 없습니다 (원본·영인본·번역본 모두 미확인, 북한 잔존 근거도 없음). 그러므로 “당회록에 이름까지 다 적혀 있다”는 식의 진술은 어떤 경우에도 1차 근거로 쓸 수 없습니다.

↑ 차례로

부록 ①지금 어디서 무엇을 볼 수 있는가

가장 쉬운 것부터 — 지금 당장, 집에서, 무료로

▣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 신문 — 로그인·결제·방문 전부 불필요

이 글이 인용한 분규 기사 16건(1927년 10건 + 1933~34년 6건)과 1915·1921년 기사가 전부 [관외이용-무료]입니다.

  1. 브라우저에서 https://www.nl.go.kr/NL/contents/search.do?srchTarget=total&kwd=章臺峴 을 엽니다.
    ※ 한글 장대현은 35건, 한자 章臺峴은 248건. 한자로 넣어야 일제강점기 신문기사가 잡힙니다.
  2. 목록에서 제목 아래 [관외이용-무료]라고 붙은 기사의 「원문보기」 버튼을 누릅니다.
  3. 통합뷰어 팝업이 뜨면서 신문 지면 이미지가 열립니다. (최초 1회 뷰어 설치 안내가 나올 수 있습니다.)

먼저 보실 것 두 건:
· 中外日報 1927. 3. 8 「肉迫戰이 닐어난 章臺峴敎會紛糾 : 三十年來에 처음되는 일」 (CNTS-00093419082)
· 朝鮮中央日報 1933. 6. 15 「章臺峴敎會 紛糾依然繼續 길목사는 사임」 (CNTS-00095761870)
두 번째 기사의 본문을 읽으시면 12장의 「길선주 사임 시점」 논쟁에 결정적인 근거가 나올 수 있습니다. (제목만으로는 판정되지 않습니다.)

실물을 보시려면 — 기관별 정리

① 장로회신학대학교 도서관 (이상조기념도서관)

무엇이길선주 친필 필사본군 14종 전량 — 『吉靈溪歷史』(자서전 60쪽, 장대현교회 영수·1901년 장로 기록), 『平壤山亭峴敎會史記』(27쪽, 1906.1.7~1924 연 단위), 『要集』(1907.10.3 장대현교회 목사 취임일), 『1922년 길선주 수첩』(“一九0六年 冬期 大査经 ᄯᅢ의 圣神 降临하다” + 찬양대원 명단), 『末世學 草』(355쪽), 『講臺寶鑑』第二(설교 70편), 『眞道要集』(335쪽), 『眞理要覽』(218쪽) 외
외부인가능 (단 귀중본 별도 절차는 미확인)
절차
(공식 안내 원문)
“일반목사(교인)일 경우 — 출석 교회에서 자료열람 의뢰서를 발급 받으신 후 신분증과 함계 가지고 오시면 열람 가능합니다.”
※ “함계”는 사이트 원문 그대로입니다(오타). 임의로 고치지 않았습니다.
모든 자료의 열람과 복사만 가능하고 대출은 불가능합니다.
열람의뢰서 양식: http://library.puts.ac.kr/WebPCTS/aspx/열람의뢰서.hwp
시간학기중 평일 08:00~22:00 / 방학중 평일 09:00~18:00. 토·일·공휴일은 자료실 전 층 휴관 — 반드시 평일에 가셔야 합니다
위치04965 서울 광진구 광장로 5길 25-1(광장동). 지하철 5호선 광나루(장신대)역 1·2번 출구 도보 약 10분. (학교 안내: “현재 장로회신학대학교 내의 주차난이 심각하오니 가능하시다면 지하철 5호선을 이용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연락대표 02-450-0764~0771 / 참고실 02-450-0767 / 대출실 02-450-0766 / library@puts.ac.kr
복사2F 자료실(월~금 08:20~22:00). A4 복사 70원 / 스캔 100원, A3 복사 140원 / 스캔 100원. 신용·체크카드 결제
⚠ 먼저 전화장신대에는 3F 귀중자료실이 따로 있고 고서는 그곳에 있으며 대출 불가입니다. 그런데 길선주 필사본이 실제로 거기 있는지, 외부인이 귀중자료실 자료를 열람할 수 있는지는 공개 안내문에 적혀 있지 않습니다 미확인. 가시기 전 참고실(02-450-0767)에 확인이 필요합니다.

② 국회도서관 — 가장 쉬움

무엇이『장대현교회 주보 : 1935-1936』 영인본 (방지일목사기념사업회 엮음, 홍성사 2011, 125쪽)
청구기호 262.005 -12-1 / 등록번호 0001741234 / 제어번호 MONO1201236716 / 이용 상태: 이용가능
→ 이 주보 영인본은 사실상 국회도서관이 유일하게 확실한 열람처입니다.
자격“대학생 또는 18세 이상인 자” — 신분증만 있으면 됩니다
절차신분증 지참 → 1층에서 일일 열람증 발급, 또는 모바일 간편열람증(회원가입 없이 당일용).
단 복사·출력하려면 일일/장기 열람증이 필요합니다.
서고 자료이므로 홈페이지에서 열람신청 후 1층 대출대에서 수령합니다. 가방은 물품보관함에.
시간대출대 월~금 09:00~21:00(열람신청 09:00~17:00), 토·일 09:00~17:00(열람신청 ~16:00)
휴관: 매월 둘째·넷째 토요일, 일요일을 제외한 공휴일
위치·연락07233 서울 영등포구 의사당대로 1(여의도동) / 대표 02-6788-4211 / 안내실 02-6788-4178

③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자료도서관 (열송재)

무엇이초기 기독교 신문·잡지 원본 — 『그리스도신문』(1907년 주공삼 장로 목격담 게재지), 『기독신보』, 『신학지남』, The Korea Mission Field 등 /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록』 / 선교부 문서 영인본 / 『북한기독교역사사전』 / 김재준·이덕주·이만열·이성삼 기증문고 — 총 2만여 권
자격“자료도서관의 모든 소장 자료는 누구에게나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 자격 요건 없음, 직접 방문
주의“단, 훼손이 우려되는 귀중본의 경우는 열람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대출 불가(열람·복사만)
복사비회원 A4 100원(귀중자료 200원), 하루 100장 제한, 사진촬영·스캔은 서약서 작성, 전권 복사 불가(부분 복사만)
시간평일 10:00~17:00 (점심 12:30~13:30 폐관). 법정 공휴일·토요일 휴무
※ 같은 안내 페이지에 “오전 10~12시 30분, 오후 2시~5시”라는 표기도 병존합니다(점심 종료가 13:30/14:00로 다름). 원문 그대로 둘 다 옮깁니다. 방문 전 전화 확인을 권합니다.
권장“방문 전 전화로 열람자료를 문의하시면 보다 원활하게 자료를 보실 수 있습니다.”
위치·연락03986 서울 마포구 동교로 23길 118 열송재 / 02-2226-0850 / FAX 02-325-0849 / ikch0102@hanmail.net
자료검색(OPAC): http://www.ikch.org:8088/ · 이용안내: http://www.ikch.org/site/library/library_information-use/

④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경기 이천) — 눈으로 보시려면

무엇이복원 「장대현교회」 예배당(2007, 평양대부흥 100주년, ㄱ자형 1/5 축소 24평) / 길선주 병풍(상설 전시) / 이수정 역본 마태전 / 한국 최초 신약단편성경 / 한국 교회사 자료 10만여 점
※ 2002년 「해방 전 북한교회 자료」 전시에서 『平壤老會地境 敎會史記』(1925) 등 약 400점을 공개한 적이 있습니다.
관람입장료 무료. 절차 없음
휴관매주 일요일·월요일, 설, 추석, 어린이날
⚠ 시간협회 등록 정보에는 관람시간이 “01:00~17:00”으로 적혀 있는데, 새벽 1시 개관은 성립하지 않으므로 “10:00~17:00”의 오기로 보입니다. 원문 그대로 옮기며, 방문 전 031-632-1391로 확인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미확인.
위치·연락경기 이천시 대월면 대평로 214번길 10-13(지번: 대월면 초지리 474-2) / 031-632-1391 / FAX 031-632-1392
※ 박물관 공식 홈페이지는 조사 시점에 접속이 차단(HTTP 403)되어 있었습니다. 위 정보는 (사)한국박물관협회·(사)경기도박물관협회 등록 정보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복원 예배당 내부“복원된 장대현교회에서는 일반인들이 옛날 찬송과 성경책으로 예배를 드릴 수도 있다”는 서술이 유통되나 원문 기사를 직접 검증하지 못했습니다 미확인.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확언하기 전에 박물관에 직접 확인이 필요합니다.

(참고) 독립기념관

길선주 국문 필사본 『산님쳐사춘몽가』 소장(장신대 국한문본과 대조 가능). 이용안내는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미확인.

↑ 차례로

부록 ②더 정확히 하려면

이 글의 「갈리는 곳」과 「확인되지 않은 것」을 실제로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우선순위대로 적습니다.

1순위 — 집 근처 도서관에서 빌려 읽기 (책바다 상호대차)

▣ 「책바다」란

국립중앙도서관이 운영하는 도서관 상호대차 서비스입니다. 집 근처 공공도서관에 신청하면, 다른 지역 도서관이 소장한 책을 그 도서관으로 보내 주어 받아 볼 수 있습니다. 아래 두 책은 소장 기관이 전부 「책바다 참여기관」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실제 신청 가능 여부는 각 도서관 정책에 따르므로, 가까운 공공도서관에 “책바다 신청 가능한가”를 먼저 물어보시면 됩니다.)

(가) 『평양노회 지경 각 교회 사기』 — 이 글의 거의 모든 항목을 확정할 수 있는 책

서지『平壤老會地境 敎會史記』 강규찬·김선두·변인서 공저(1925 원간) / 이교남 역, 한국기독교사연구소(2013 재판 / 2018 개정판), 260쪽, ISBN 9788996781028
왜「1. 평양부 장대현교회사기」가 140개 교회 중 첫 항목이자 최대 분량(pp.25~46, 약 22쪽)입니다. 설립일·건축비·분립·직분자 등 이 글이 “갈린다”고 적은 항목 대부분의 최종 확정 근거가 여기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권말에 박용규의 「[평양노회 지경 각 교회사기]에 대한 평가」(p.259~)도 실려 있습니다.
어디에실물 소장은 전국 3개관 — 국립중앙도서관(청구기호 236.911-14-6) / 경북도서관 / 경상북도교육청 예천도서관. 3개관 모두 책바다 참여기관입니다.
※ 국중도 디지털 원문은 관내/협약도서관의 등록된 지정 PC에서만 열립니다(저작권법 §31①③). 그러므로 책바다로 실물을 받아 보시는 편이 훨씬 현실적입니다.
구입한국기독교사연구소 간행물로 교보문고·알라딘·갓피플 등에서 판매됩니다

(나) 『(朝鮮 예수敎) 長老會史記』 상·하 — 접근성이 훨씬 좋습니다

서지차재명 편저 / 이교남 번역, 한국기독교사연구소 — 상권(2014)·하권(2017)
왜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장대현교회」 항목이 유일하게 인용하는 문헌이며, 노회·총회 공식기록을 저본으로 한 교단 공식 사기(史記)입니다. 건축비 「한국인 5,000여 원」의 근거가 이 책입니다.
장대현교회는 상권 제2편 제5장 「교회설립」(pp.64~123) 구간에, 1907~11년 평양 관련은 제10장 「평남대리회」(pp.293~310)에 있습니다.
어디에경기 보라도서관·청덕도서관·용인기흥도서관, 국립세종도서관, 경북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 전부 책바다 참여기관. 공공도서관에서 바로 대출 가능한 경우가 많습니다.

2순위 — 방문해야만 볼 수 있는 것 (후속 과업 순위)

순위무엇을어디서무엇이 풀리나
1『장대현교회 주보 1935-1936』 영인본국회도서관(→ 부록 ① ②) 1935~36년 장대현교회의 실상을 보여 줄 수 있는 유일한 현존 1차 사료로 보입니다. 분규 이후·신사참배 직전 시기의 공백을 메울 가능성
2이희철, 「특별기고 : ‘평양 대각성운동’ 장대현교회의 추억」(영락교회, 2007)국립중앙도서관 서지로 존재 확인 장대현교회를 직접 기억하는 월남 교인의 회고
3『그리스도신문』 1907년 1월 31일자·2월 28일자 원지면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자료도서관(→ 부록 ① ③) 주공삼 장로 기고문 전문 — 이 글에는 재인용 4건만 실려 있습니다
4『독노회록 및 제1회 총회록』(안광국 편, 1962, 청구기호 1806-55)국립중앙도서관 1개관만 소장. 디지털화본은 열람·인쇄 시 과금 1907년 독노회 관련 공식 기록
51979년 時事通信社 「平壤『章臺峴敎會事件』」(CNTS-00130953819)국중도·협약도서관 방문, 열람·인쇄 시 과금 1946년 3·1절 사건의 상세(단 33년 뒤의 회고·편집물)

3순위 — 클릭 한 번으로 열리는 것

아래 기사 본문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열어 보시면, 이 글이 “갈린다”고 적은 쟁점 중 세 가지에 결정적인 근거가 나올 수 있습니다. 전부 [관외이용-무료]입니다.
※ 이 글이 확보한 것은 기사 제목뿐입니다. 제목은 “무엇이 보도되었는가”까지만 말해 줍니다. 판정은 본문을 읽어야 납니다.

없는 것 — 찾으실 필요가 없는 것

장대현교회 당회록국내외 어느 공개 목록에도 없습니다. 북한 잔존 근거도 없습니다
평양노회록국중도·KOLIS-NET·RISS 어디에도 없습니다. 같은 역자(이교남)가 경상도·경북 노회록은 번역 간행했는데 평양노회록만 없습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록』그 서명의 단행본은 국내 공개 목록에 없습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홈페이지 총회회의록도 제95회~110회만 게시되어 있습니다
『평양노회 지경 각 교회 사기』 장대현교회사기 대목을 축자 인용한 2차 문헌한 건도 찾지 못했습니다 — 즉 그 22쪽을 직접 읽으신 분이 이 주제에서 가장 앞서 계시게 됩니다

↑ 차례로

맺으며이 글의 한계 — 자진신고

교회에서 이 글을 나누시거나 인용하실 수 있으므로, 이 글이 무엇을 하지 못했는지를 먼저 밝힙니다.

1. 1차 사료를 직접 본 것이 아닌 대목

2. 북한 관련 서술의 비대칭

이 글이 인용한 북한 관련 서술은 대부분 남한 기독교계·연구자의 것이며, 북한 당국 공식 발표로 교차 확인한 것은 「장대재 학생소년궁전 건설」 한 건뿐입니다(그것도 간접). 이 비대칭은 자료 접근 구조상 불가피했으나, 해석의 편향 가능성으로 남습니다. 탈북민 증언에 직접 의존한 대목은 없습니다. 정치적 주장(예: “김일성이 교회를 헐고 동상을 세웠다”)은 17-4에 따로 모아 격리하고 사실 서술로 채택하지 않았습니다.

3. 추론임을 밝히는 대목

4. 이 글이 의도적으로 쓰지 않은 것

▣ 메우지 않은 자리
  1. 신사참배 국면에서 장대현교회가 무엇을 했는지 — 사료 0건. 저항했다고도, 굴복했다고도 쓰지 않았습니다.
  2. 예배당이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 — 1947년과 1963년 두 점만 있고 그 사이 약 16년 5개월은 비어 있습니다. 그 공백을 이야기로 메우지 않았습니다.
  3. 1934~1945년 담임목사 승계 — 확인 불가.
  4. “성경으로 도배한 집이 곧 평양 최초의 교회가 되었다” — 널리 사랑받는 이야기지만 1차 사료로 확인되지 않아 통설로만 적고 사실로 채택하지 않았습니다.

5. 이 글은 검증을 한 번 거쳤습니다 — 고친 것

이 글의 초판은 별도 검증을 거쳐 15곳이 수정되었습니다. 본문 곳곳에 “초판에는 … 실려 있었고 검증에서 지적받아 고쳤습니다”라는 문장이 나오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무엇이 어떻게 틀렸는지를 지우지 않고 남겨 둔 이유는, 같은 오류가 다른 글에서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고친 것무엇이 틀렸었나
105인사건 연도「1910년」 → 1912년(사건 연대 1911~1913). 근거로 든 백과사전 자체가 “1912년”이라 적는다
변인서 직분「1911년 집사」 → 1911년 1월 장로 장립. 장로는 당회 구성원이므로 분규의 진영 문제와 직결된다
변인서 직명「부목사」 → 동사(同事)목사
★ 건축비 부담률「어느 쪽으로 읽어도 한국인이 절반 이상 부담」은 산술적으로 거짓이었다(3,000÷7,000 = 42.86%). 단정을 삭제하고 두 계열의 부담률을 병기
길선주 시무 기간「20년/19년」이 1927년 사임을 전제한 수치임을 밝히고, 1933년 사임을 전제하면 약 26년임을 병기
「영하 30도」1차 근거 0건 + 평양 근대 최저기록(−26.5℃)을 넘음 → 미확인으로 강등
1907년 참가 인원1,000명·1,500명이 1차 선교보고가 아니라 교계 매체 순환 인용임을 밝히고 등급 하향
없던 충돌 제거연구소 연표 원표기 「1906年 12月 12-22」는 하나의 기간인데, 초판이 뒷숫자만 옮겨 없는 충돌을 만들었다
★ 「ㄱ자」 단정 완화1895년 마펫 원문에 L-shaped·직각·「ㄱ자」에 해당하는 말이 하나도 없다(two wings·junction뿐). 형태 단정을 거두었다
출처 등급 하향아카이브를 직접 보지 않고 각주를 단 2차 서술을 경유한 것들에 1차·2차경유 등급을 신설해 적용(1900~01 건축 계열, 길선주 필사본 계열)
신문 제목의 지위제목은 「무엇이 보도되었는가」의 물증이지 사건의 물증이 아니다. 길선주 사임 판정의 표현을 그 범위로 되돌렸다
★ 빠진 사실 보강「총회 개최지 14회 중 장대현 0회」 옆에 1907년 독노회 창립지가 장대현교회였음을 병기(그러지 않으면 정반대로 오독된다). 표가 1912년부터 시작한다는 점도 명시
분립 교회합집합 6개로 정리(남문외·창동·산정현·서문외·신암·연화동)
산정현 분립일 전거선교단체 기도지도 → 『平壤山亭峴敎會史記』 1쪽으로 교체
예배당 규모「72칸 = 120평」은 정합함이 확인되어 미확인에서 내렸고, 반대로 「수용 2,000명」·「교세 3,000명」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함을 명시

6. 자료의 출처

이 글은 2026년 9월 29일 작성된 두 조사 보고서 『PART1_RISE.md』(시작과 부흥)·『PART2_FALL.md』(몰락과 소멸)와, 선행 사료 소재 조사 『PYONGYANG.md』(당회록 소재 규명)·『ACCESS.md』(열람 경로)·『SOURCES_TEXT.md』(원문 소재)를 편집·재구성한 것입니다. 이 편집 과정에서 새로 조사한 사실은 한 건도 없습니다. 원 보고서가 [미확인]·[추론]으로 표시한 것은 단정문으로 바꾸지 않았습니다.

↑ 차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