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S SO AMAZING ABOUT GRACE? · PHILIP YANCEY · 1997
[목사님추천]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필립 얀시가 "그리스도인들은 왜 그렇게 미워합니까?"라는 물음 앞에서 쓴 책입니다. 은혜가 무엇인지, 왜 용서해야 하는지, 은혜는 누구에게까지 미치는지, 교회는 세상에 무엇을 내놓아야 하는지를 이야기와 비유로 풀어 갑니다. 책의 짜임과 내용을 부별로 정리했고, 설교에 나온 일화가 책의 어디에 있는지도 찾아 적었습니다.
정리 2026-10-11 · 책 본문은 읽지 못함 · 목차와 책 소개는 서점 자료로, 줄거리는 백과사전, 출판사 견본, 구글 도서의 책 안 검색에 나오는 본문 조각, 저자의 잡지 글과 블로그, 영어권 서평, 한국어·영어 독자 서평으로 확인 · 자료로 확인하지 못한 내용은 [확인필요]로 표시함
은혜비은혜용서은혜의 스캔들
한눈에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원제 What's So Amazing About Grace?)는 미국의 기독교 저술가 필립 얀시가 1997년에 낸 책이다. 사람은 누구나 은혜에 목말라 있고 은혜는 복음의 중심인데, 교회가 부도덕을 없애는 데 힘을 쏟느라 정작 은혜를 놓치고 있다는 것이 책의 중심 주장이다.
영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저자는 책을 준비하면서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느냐고 물었다. 은혜를 말한 사람은 없었다. 저자가 처음 붙이려던 제목은 "은혜가 뭐가 그리 놀라운가, 그리고 왜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를 더 보여 주지 않는가"였으나 출판사가 줄였다. 저자는 2023년 개정판 서문에서도 이 일을 적었다.
책은 설명보다 이야기로 은혜를 전한다. 저자는 프롤로그 끝에서 은혜를 풀이하기보다 전하고 싶다고 쓴다. 그래서 소설과 영화, 역사 속 사건, 저자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장마다 이어진다.
책을 쓰게 한 두 장면. 하나는 빌 클린턴 대통령이 저자에게 던진 물음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왜 그렇게 미워합니까?" 다른 하나는 저자의 친구가 전해 준 이야기다. 시카고의 한 노숙 매춘 여성에게 교회에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했느냐고 묻자, 그 여성은 교회에 가면 더 비참해질 것이라고 답했다.
책 정보
항목
내용
원제
What's So Amazing About Grace?
저자
필립 얀시(Philip Yancey). 미국의 기독교 저술가이며 잡지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의 편집인을 지냈다.
원서
1997년, 미국 존더반(Zondervan) 출판사, 292쪽. 2023년에 같은 출판사에서 개정판(Revised and Updated)이 나왔다.
한국어판
윤종석 옮김, IVP. 1999년 8월 첫 출간. 2009년 2월 한국어판 출간 10주년 기념판(368쪽). 2020년 2월 20주년 기념 개정판(제목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376쪽)
평가
1998년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 출판협회(ECPA) "올해의 책". 2006년 《크리스채너티 투데이》가 꼽은 "복음주의를 빚은 책 50권" 가운데 17위
책의 뿌리가 된 글
용서를 다룬 2부의 여러 대목은 저자가 1991년 4월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에 실은 글 "An Unnatural Act"(본성을 거스르는 행위)에 먼저 나온다. 영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1997년 2월 같은 잡지에 실린 글 "A State of Ungrace"(비은혜의 상태)도 이 책 두 장의 바탕이 되었다.
책의 열쇠 말
말
뜻
비은혜(ungrace)
저자가 만든 말. 은혜를 보여 주지 못하는 태도와 행동을 가리킨다. 한국어판은 "비은혜"로 옮겼다. 세상은 주고받는 계산과 자격으로 굴러가므로 비은혜가 기본이라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은혜의 스캔들
하나님이 아주 악한 사람까지 용서하신다는 사실이 사람에게는 걸림돌이 된다는 뜻. 저자는 바울의 회심을 예로 든다.
은혜는 교회만의 선물
저자는 은혜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므로 교회가 세상에 줄 수 있는 고유한 선물이라고 말한다. 프롤로그에서 고든 맥도널드의 말을 빌려, 세상은 교회가 하는 일을 거의 다 할 수 있으나 은혜를 베푸는 일만은 할 수 없다고 적는다.
은혜의 뜻매김
저자가 3장에서 내놓는 말. 하나님이 우리를 더 사랑하시게 하려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덜 사랑하시게 할 수 있는 일도 없다는 것이다.
책의 짜임
프롤로그 뒤에 네 부가 이어진다. 부마다 이야기 한 편으로 문을 열고, 그 뒤에 서너 장이 따라온다. 이야기 넷과 열다섯 장이다. 아래 목차는 한국어판 20주년 기념 개정판(IVP, 2020)의 것이며, 영어 제목은 원서의 것이다.
영어 전자책판과 2023년 개정판은 프롤로그와 이야기 네 편에도 번호를 매겨 모두 20장으로 센다. 그래서 영어권 글에서 "8장"이라고 하는 '왜 용서인가?'가 한국어판에서는 5장이다. 이 쪽의 장 번호는 한국어판을 따른다.
부
한국어판 제목
원서 제목
머리
프롤로그: 마지막 최고의 단어
The Last Best Word
1부 주 은혜 놀라워 (How Sweet the Sound)
이야기 하나: 바베트의 만찬
Babette's Feast: A Story
1부
1. 은혜 없는 세상
A World Without Grace
1부
2. 사랑에 애타는 아버지
Lovesick Father
1부
3. 은혜의 색다른 계산법
The New Math of Grace
2부 비은혜의 사슬 끊기 (Breaking the Cycle of Ungrace)
이야기 둘: 끊지 못한 사슬
Unbroken Chain: A Story
2부
4. 비본성적 행위
An Unnatural Act
2부
5. 왜 용서인가?
Why Forgive?
2부
6. 복수
Getting Even
2부
7. 은혜의 무기고
The Arsenal of Grace
3부 파문의 향기 (Scent of Scandal)
이야기 셋: 사생아의 집
A Home for Bastards: A Story
3부
8. 불량품 사절
No Oddballs Allowed
3부
9. 은혜로 치유된 눈
Grace-Healed Eyes
3부
10. 허점
Loopholes
3부
11. 은혜 기피증
Grace Avoidance
4부 귀머거리 세상을 위한 은혜의 꾸밈음 (Grace Notes for a Deaf World)
이야기 넷: 헤럴드 형
Big Harold: A Story
4부
12. 뒤섞인 향기
Mixed Aroma
4부
13. 뱀 같은 지혜
Serpent Wisdom
4부
14. 한 점 푸르른 땅
Patches of Green
4부
15. 중력과 은혜
Gravity and Grace
표시에 대하여. 이어지는 탭에서 [확인필요] 표시가 붙은 대목은 정리자가 알고 있는 내용을 적은 것으로, 자료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세부가 틀릴 수 있으니 책과 대조하시기 바랍니다. 표시가 없는 대목은 서점의 책 소개나 목차, 백과사전, 기사처럼 실제로 열어 본 자료에 나온 내용입니다.
1부 주 은혜 놀라워: 은혜란 무엇인가
프롤로그는 출판사가 공개한 2023년 개정판 견본에 전문이 실려 있다. 개정판이라 본보기로 든 사람과 사건 몇 가지는 1997년판과 다를 수 있다. 그 밖의 장은 구글 도서의 책 안 검색에 나오는 본문 조각, 백과사전, 독자 서평으로 확인했다. 쪽수를 밝힌 대목은 한 독자가 한국어판(IVP, 2001년에 읽은 판)에서 옮겨 적은 것이다.
프롤로그: 마지막 최고의 단어
저자는 낱말들의 쓰임을 살피면서 "은혜"가 아직 본뜻을 잃지 않은 마지막 좋은 낱말이라고 말한다. 낱말은 세월이 가면 상한다. 한때 가장 높은 사랑을 뜻하던 낱말(charity)이 지금은 "동정은 필요 없다"는 말에나 쓰이는 것이 그 예다. 책 소개에 실린 문장으로 "은혜는 어디에나 있다"가 있다. 이 말은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소설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에서 죽어 가는 신부가 한 말이다.
시카고의 노숙 매춘 여성 이야기가 책의 문제의식을 연다. 저자가 앞선 책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The Jesus I Never Knew)에 실었던 실화로, 시카고에서 밑바닥 사람들을 돕는 친구에게서 들었다. 두 살배기 딸을 둔 이 여성은 교회에 가 볼 생각을 했느냐는 물음에, 이미 충분히 비참한데 거기 가면 더 비참해질 것이라고 답했다. 예수님께는 이런 사람들이 몰려왔는데 지금 교회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고 느낀다는 것이 저자의 물음이다.
영어에서 "은혜"(grace)가 들어간 말들을 하나씩 짚는다. 식사 기도를 한다는 말, 고맙다는 말, 기쁘다는 말, 축하한다는 말, 손님을 너그럽게 대접한다는 말, 팁을 뜻하는 말이 모두 같은 뿌리에서 왔다. 음악의 꾸밈음도 "은혜의 음"이라고 부른다. 없어도 가락은 이어지지만 있으면 맛이 달라지는 음이다.
영국에서는 왕족을 부르는 말, 대학에서 과정을 면제해 주는 일, 의회가 죄인을 사면하는 법에 이 낱말이 쓰인다. 잡지사는 구독이 끝난 뒤에도 몇 부를 거저 더 보내고, 카드사와 대출 회사는 갚을 날을 넘겨도 봐주는 유예 기간을 둔다. 반대말에서도 뜻이 드러난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 수치, "은혜에서 떨어졌다"는 말, 외교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인물을 뜻하는 라틴어 표현이 그렇다.
저자는 자신이 다닌 성경 대학에서 네 해 동안 은혜에 대해 거의 배우지 못했다고 말한다. 뒷날 그 학교 채플에서 이 말을 했다가 교수들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저자는 교회를 한동안 떠났던 까닭이 거기서 은혜를 찾지 못해서였고, 돌아온 까닭은 다른 어디에서도 은혜를 찾지 못해서였다고 쓴다.
프롤로그는 은혜를 해부하듯 설명하지 않겠다는 말로 끝난다. 그래서 논증보다 이야기에 기대겠다고 한다. 미국의 한 서평은 저자가 책 어디에서도 은혜를 한 문장으로 뜻매김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이야기 하나: 바베트의 만찬
카렌 블릭센의 소설 〈바베트의 만찬〉을 간추린다. 신앙을 이유로 모든 즐거움을 멀리하는 어촌 마을이 배경이다. 두 자매가 파리에서 피난 온 바베트를 받아들여 요리를 맡기지만 소박하고 밍밍한 음식만 만들게 한다. 요리사 바베트가 베푸는 호화로운 잔치는, 받으려는 마음도 없는 사람들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의 그림으로 읽힌다.
바베트는 복권에 당첨되어 1만 프랑을 받는다. 자매는 축하하면서도 바베트가 곧 떠날 것이라고 생각해 마음이 내려앉는다. 잔치가 끝난 뒤 바베트는 당첨금을 한 푼도 남기지 않고 그 한 끼에 다 썼다고 밝힌다. 마을 사람들은 먹기는 하되 즐기지는 않기로 미리 다짐하고 식탁에 앉았다. 손님 한 사람이 바베트가 이름난 요리사였음을 알아보고 이 선물을 은혜라고 부른다.
[확인필요] 서로 틈이 벌어져 있던 마을 사람들이 그 식탁에서 화해하게 된다.
1. 은혜 없는 세상
저자는 자신이 자란 교회를 돌아본다. 흑인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조금만 달라도 다른 그리스도인을 배척했으며, 하나님을 벌주시는 분으로만 그렸다.
은혜를 보여 주지 못하는 것을 "비은혜"라 부른다. 가정, 사회, 교회 어디에나 비은혜가 깔려 있다는 진단이다. 서평들이 전하는 본보기로는 "공짜 점심은 없다"는 말처럼 어릴 때부터 듣는 가르침, 시험지를 돌려받을 때 맞은 답은 두고 틀린 답에만 표시가 되어 있는 것이 있다.
헤밍웨이의 단편 〈세계의 수도〉에서 가져온 이야기가 나온다. 한 독자가 한국어판 40쪽에서 옮겨 적은 대로는 이렇다. 스페인의 한 아버지가 집을 나가 마드리드로 간 아들과 화해하기로 하고 신문에 광고를 낸다. "파코, 화요일 정오에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했다. 아빠." 파코는 스페인에서 흔한 이름이다. 아버지가 그곳에 나가 보니 파코라는 이름의 젊은이가 800명이나 나와 저마다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자는 헤밍웨이 자신이 가정의 비은혜를 알았다고 적는다. 독실한 부모는 그의 방탕한 삶을 몹시 싫어했다. 헤밍웨이의 조부모는 복음주의 학교인 휘튼 대학을 다닌 사람들이었다.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는 것도 비은혜의 모습으로 든다. 마크 트웨인의 우스개를 인용하는데, 새와 돼지와 염소를 한 우리에 넣으면 얼마 뒤 잘 어울리지만 교파가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한 방에 넣으면 아무도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독자가 옮겨 적은 대목(43쪽, 45쪽. 쪽 순서로 보아 이 장으로 보인다)에는 한센병을 앓은 피터 그리브의 회고가 있다. 눈 한쪽이 멀고 몸이 일부 마비되어 영국의 한 수녀 공동체에 맡겨진 그는 자살을 생각했다. 어느 이른 아침 수녀들이 환자들의 이름을 벽에 붙여 놓고 기도하는 것을 보았고, 거기에 자기 이름도 있었다. 그는 자신도 필요한 사람임을 느꼈다. 저자는 이것을 은혜를 느낀 일이라고 말한다. 은혜는 안경알과 같아서 그것으로 세상을 보는 동안에는 느끼지 못하지만 어디에나 있다고도 적는다.
2. 사랑에 애타는 아버지
탕자의 비유를 오늘의 이야기로 다시 쓴다. 재산을 탕진한 아들 대신 집을 나간 딸이 주인공이다. 미시간주 트래버스시티 위쪽의 체리 과수원에서 자란 소녀가 부모와 다툰 뒤 디트로이트로 달아난다. 처음에는 호화롭게 지내지만 한 해쯤 지나 병이 들자 거리로 내쫓겨 백화점 앞 쇠 격자 위에서 잠을 잔다.
어느 밤 소녀는 고향의 체리꽃을 떠올리고 집에 전화를 건다. 자동 응답기에 버스가 내일 자정쯤 도착한다는 말만 남긴다. 부모가 없으면 그대로 캐나다까지 가겠다고 한다. 일곱 시간 버스를 타고 터미널에 들어서자 형제와 친척 마흔 명이 고깔모자를 쓰고 "집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현수막을 걸어 놓고 기다리고 있다.
한국어판 책 소개는 이 대목의 요점을 이렇게 전한다. 은혜는 값없이 주어지지만 받으려면 손을 펴야 한다.
저자는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기독교의 고유한 점이 은혜라는 C. S. 루이스의 말을 인용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조건 없는 것으로 말하는 것은 기독교뿐이라고 한다. 탕자의 비유는 잃은 양, 잃은 동전과 함께 세 이야기로 묶여 있고, 셋 다 찾은 이의 기쁨을 말한다. 저자는 잃어버린 줄 알았던 원고를 되찾았을 때의 기쁨을 자기 경험으로 든다.
한 독자가 한국어판 61쪽에서 옮겨 적은 인용문은, 하나님이 팔을 벌리고 서서 기다리기만 하시지 않고 목자가 잃은 양을 찾듯 찾아 나서시며, 하나님 신분에서 사람이 되기까지 한없이 먼 길을 이미 오셨다고 말한다. 은혜는 놀랄 만큼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다는 것이 이 장의 강조점이다. 십자가 위의 강도가 한마디 청으로 구원을 약속받은 일도 본보기로 든다.
3. 은혜의 색다른 계산법
상과 벌의 계산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다룬다. 저자는 마땅히 받아야 할 벌 대신 용서를, 진노 대신 사랑을, 훈계 대신 잔치를 받았다고 말한다. 그 잔치를 바베트의 만찬에 견준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길게 다룬다. 늦게 온 사람도 같은 품삯을 받는다. 종일 일한 품꾼들은 약속한 것을 다 받았으면서도 불평한다. 저자는 이야기의 요점이 하나님은 품삯을 주시는 분이 아니고 선물을 주시는 분이라는 데 있다고 말한다. 공로대로 받는다면 아무도 기준에 닿지 못한다. 늦게 온 사람들이 열심히 일해서 상을 받는다는 유대교의 비슷한 이야기와도 견준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으려고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가는 목자의 셈법도 짚는다. 세상의 셈으로는 맞지 않는 예수님의 비유들을 이렇게 모아 보여 준다.
[확인필요] 일곱 번이면 되겠느냐는 베드로의 물음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예수님의 대답도 같은 셈법의 본보기로 나온다.
호세아의 이야기를 든다.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게 하셨고, 이것은 하나님을 배신한 이스라엘을 다시 받아 주시는 사랑의 그림이었다.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황제가 잘못하면 신하가 대신 벌을 받는 장면도 든다. 예수님은 이 옛 틀을 뒤집으셨다. 종이 잘못하면 왕이 벌을 받는다.
신학자 칼 바르트가 시카고 대학을 찾았을 때 연구로 배운 가장 깊은 진리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어린이 찬송 "예수 사랑하심은"의 가사로 답했다는 일화가 나온다(한 독자의 발췌 76쪽).
저자는 여기서 은혜를 뜻매김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더 사랑하시게 하려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덜 사랑하시게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하나님은 이미 무한하신 분이 사랑할 수 있는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을 견주는 대목이 이 장에 있다. 유진 피터슨의 글을 빌린 것이다. 펠라기우스는 도시 출신에 점잖고 누구에게나 호감을 샀고, 어거스틴은 젊은 날을 방탕하게 보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는 사람의 노력에서 시작했고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시작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론으로는 어거스틴 편이면서 실제 생활은 펠라기우스처럼 한다는 것이 지적이다. 영어 위키백과는 이것을 평일에는 펠라기우스처럼, 주일에는 어거스틴처럼 산다는 말로 전한다. (전에 이 쪽에서는 이 대목을 11장에 두었으나, 한국어판 80쪽에서 옮겨 적은 독자의 발췌와 원문을 장별로 연재한 독자의 글에 따라 3장으로 옮겼다.)
사회학의 "거울 자아" 이야기도 나온다. 내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내가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을 참으로 믿고 거울을 본다면 삶이 어떻게 달라지겠느냐고 묻는다. 길가에서 기도하던 노인이 신부에게 "그분이 저를 아주 좋아하시는걸요"라고 답했다는 브레넌 매닝의 이야기를 곁들인다(한 독자의 발췌 78쪽).
2부 비은혜의 사슬 끊기: 왜 용서해야 하는가
2부는 이번 정리에서 가장 많이 고친 부분이다. 이야기 둘의 줄거리가 전에 적은 것과 달랐고, 《콜레라 시대의 사랑》의 비누 다툼은 4장이 아니라 5장에, 고든 윌슨의 이야기는 7장이 아니라 6장에 나온다. 설교에 나온 부부 일화도 5장에서 찾았다.
이야기 둘: 끊지 못한 사슬
한 집안의 백 년에 걸친 이야기다. 데이지는 1898년 시카고의 노동자 가정에서 열 남매 가운데 여덟째로 태어났다. 술에 취하면 사나워지는 아버지는 어느 날 아내를 집에서 내쫓았다. 여러 해 뒤 아버지는 구세군 선교관에서 회심하고 술을 끊은 뒤 자녀들을 하나씩 찾아가 용서를 빌었다. 다른 자녀들은 받아들였으나 데이지만은 끝까지 아버지를 보지 않았다. 아버지가 여덟 집 건너에서 마지막 다섯 해를 앓다가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데이지는 아버지처럼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술을 입에 대지 않았으나, 자기 자녀 여섯에게는 소리 지르고 매를 들었다. 사과한 적도 용서한 적도 없었다. 어린 딸 마거릿이 울면서 잘못을 빌자, 정말 미안하다면 처음부터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답했다.
마거릿도 어머니처럼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1960년대에 열여섯 살이 된 아들 마이클이 대마초를 피우다 들키자 집에서 내쫓았고, 화가 나서 죽을 때까지 다시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 뒤 스물여섯 해 동안 아들을 보지 않았다. 저자는 두 사람 모두와 가까운 사이여서 여러 번 화해를 붙여 보려 했으나 되지 않았다.
마이클은 이혼한 아내를 두고 저자에게 똑같은 말을 한다. 죽을 때까지 다시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 말투가 어머니의 것이고 다시 할머니의 것임을 듣는다. 비은혜는 집안의 유전 형질에 새겨진 결함처럼 끊기지 않는 사슬로 대를 이어 내려간다는 말에서 2부의 제목이 나온다. (전에 이 쪽에는 어머니를 용서하지 못한 딸이 자기 자식에게 용서받지 못하는 이야기라고 적었으나, 책을 길게 옮긴 글에 따라 고쳤다.)
날마다 성경을 읽는 마거릿은 탕자의 비유를 두고, 그 아들은 무릎으로 기어 돌아와 회개해야 했다는 것이 요점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세 비유가 모두 찾은 이의 기쁨을 말한다고 답한다. 레바논의 한 선교사가 이 비유를 처음 듣는 마을 사람들에게 읽어 주자, 사람들은 아들이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한 것이 아버지가 죽기를 바란다는 뜻이라는 점과 지체 높은 어른인 아버지가 달려갔다는 점에 놀랐다.
가족에게 참인 것은 부족과 인종과 나라에도 참이라고 한다. 애리조나의 밀폐 실험 시설에 두 해 동안 들어갔던 과학자 여덟 명이 몇 달 만에 두 패로 갈려 끝내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 레바논에 인질로 잡혔던 프랭크 리드가 사소한 다툼 뒤 같은 사슬에 묶인 동료와 몇 달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든다. 이렇게 벌어진 틈을 잇는 길은 용서라는 가느다란 줄다리뿐이라고 한다.
4. 비본성적 행위
저자는 아내와 다투던 중에 들은 말로 장을 연다. 당신이 한 못된 일들을 내가 용서한다는 것이 참 놀랍지 않으냐는 말이었다. 저자는 용서가 뿌리는 방향제 같은 것이 아니며 몹시 어렵고 불공평한 일이라는 것을 그 말에서 본다. 용서는 사람의 본성을 거스르는 행위다.
창세기의 요셉 이야기를 다시 읽는다. 요셉이 형들을 가두었다가 풀고, 자루에 돈을 숨기고, 은잔을 훔쳤다고 몰아세운 긴 과정은 용서하고 싶으나 아직 할 수 없는 사람의 모습이다. 마침내 용서할 때 요셉이 우는 소리가 궁에 울렸다. 저자는 그것을 사람이 용서하는 소리라고 쓴다.
톨스토이 부부의 이야기가 나온다. 톨스토이는 숨김없이 시작하려고 약혼녀 소냐에게 지난 일을 적은 일기를 읽게 했으나, 소냐는 영지에서 일하는 농부 여인 악시냐와의 일을 용서하지 못했다. 반세기 뒤의 일기에도 그 질투가 적혀 있다.
자연의 법칙에는 용서가 없다고 한다. 악을 당한 사람은 악으로 갚는다는 오든의 시구를 인용한다. 1077년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가 교황에게 용서를 빌려고 눈 속에 사흘을 맨발로 서 있었던 일, 영국 바스의 로마 목욕탕 터에서 나온 저주 기도문(장갑 두 짝을 훔친 자가 정신과 눈을 잃게 해 달라는 기도) 같은 본보기를 든다.
주기도문 한가운데에 이 본성을 거스르는 행위가 놓여 있다. 우리가 용서하는 것"같이" 용서해 달라는 기도다. 용서하지 않는 종의 비유에서 저자는 하나님이 남을 용서하는 사람을 용서하신다는 결론을 끌어낸다. 이 말씀이 성경에 없었으면 좋겠다고 솔직히 적으면서, 어떤 신비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에게 달려 있다고 쓴다. 셰익스피어 《베니스의 상인》의 한 줄, 자비를 베풀지 않으면서 어떻게 자비를 바라겠느냐는 말을 인용한다(한 독자의 발췌 99쪽). 한 서평은 저자가 이 대목에서 지나쳤다고 비판한다.
하나님이 왜 이런 일을 요구하시는지에 대한 첫째 답은 신학적이다.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기 때문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악인과 선인에게 해를 비추시는 아버지를 닮으라는 뜻이다. 나치 아래서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명령을 따르려 한 본회퍼, 중국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집과 가까운 벗들을 잃었으나 그들을 용서하지 못하면 전할 말이 없음을 깨달았다는 선교사 샘 모펫의 이야기를 든다. 먼저 용서받은 경험이 있어야 남을 용서할 수 있다.
저자가 유대인, 그리스도인, 이슬람교인 열 명씩과 함께한 주말 모임 이야기도 있다. 화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 유대인 여성이 용서와 정의 사이에 끼어 있다고 말했다. 독일 신학자 헬무트 틸리케는 상대가 먼저 움직이기를 매처럼 지켜보면서 용서하려다 끝내 하지 않는 마음을 적었다. 저자의 결론은 비은혜의 사슬을 끊으려면 먼저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탕자를 맞으러 달려가는 아버지,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하는 주인, 마지막에 온 품꾼에게 같은 삯을 주는 주인처럼 하나님이 먼저 움직이셨다.
장은 로마서 12장의 원수 갚는 것은 주께 있다는 말씀으로 맺는다. 용서는 믿음의 행위다. 용서함으로써 나는 하나님이 나보다 정의를 더 잘 세우시는 분임을 믿고, 갚을 권리를 내려놓는다. 헨리 나우웬은 용서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하는 사랑이라고 뜻매김했다.
5. 왜 용서인가?
미국 한 교회의 책 모임 글에 따르면 이 장은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이 있느냐는 물음으로 시작하고, 감옥에서 회심했다고 알려진 연쇄 살인범 제프리 다머를 본보기로 든다. 이 대목은 그 글 한 편에서만 확인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콜레라 시대의 사랑》에서 가져온 비누 다툼이 이 장에 나온다. 집안을 돌보는 일은 아내의 몫이었는데 어느 날 욕실의 비누를 갈아 놓는 것을 잊었다. 남편은 일주일 가까이 비누 없이 씻었다고 부풀려 말했고, 아내는 잊은 것이 사실인데도 자존심 때문에 강하게 부인했다. 부부는 일곱 달 동안 다른 방에서 자고 말없이 밥을 먹었다. 비누 한 장이 어떻게 결혼을 무너뜨리는가. 누구도 이제 그만하자, 미안하다, 용서해 달라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답한다. (전에 이 쪽에는 4장의 일로, 여러 달이라고 적었다. 책 모임 글과 원문을 장별로 연재한 독자의 글이 모두 '왜 용서인가?' 장의 일로 전한다.)
바로 이어서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소설 《The Knot of Vipers》('독사의 매듭'이라는 뜻. 한국어판이 이 제목을 어떻게 옮겼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이야기가 나온다. 결혼 생활의 마지막 수십 년을 아내와 복도 저편 다른 방에서 자며 보내는 노인의 이야기다. 틈은 삼십 년 전, 다섯 살 난 딸이 아팠을 때 남편이 충분히 걱정했느냐를 두고 벌어졌다. 이제 남편도 아내도 먼저 발을 떼려 하지 않는다. 밤마다 남편은 아내가 다가오기를 기다리지만 아내는 오지 않는다. 밤마다 아내는 누워서 남편이 다가오기를 기다리지만 남편은 오지 않는다. 누구도 사슬을 끊으려 하지 않고 누구도 용서하려 하지 않는다. 목사님이 2021년 2월 7일 설교에서 들려주신 일화가 이 대목이다('설교와 이 책' 탭을 볼 것).
저자는 용서해야 하는 실제적인 까닭을 든다. 한 독자의 발췌는 책이 "세 가지"를 든다고 적는다(111쪽). 첫째, 용서만이 비은혜의 사슬을 끊고 비난과 고통의 되풀이를 멈출 수 있다. 신약 성경에서 용서를 뜻하는 헬라어 낱말은 글자 그대로는 풀어 주다, 멀리 놓아 보내다, 자유롭게 하다라는 뜻이다. 용서는 누가 옳은지를 다 가려 주지는 않지만 관계가 다시 시작되게 한다.
용서는 용서하는 사람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대한 처방은 용서뿐이다. 용서하지 않으면 나는 과거에 갇히고 주도권을 원수에게 내주게 된다(한 독자의 발췌 115쪽). 루이스 스미즈는 용서로 가장 먼저 낫는 사람은 용서한 사람이라고 했다.
둘째, 용서는 잘못한 사람을 짓누르는 죄책감을 풀어 줄 수 있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이 본보기다. 열아홉 해 옥살이 끝에 풀려난 장발장이 재워 준 주교의 은그릇을 훔쳐 달아났다가 붙잡혀 오자, 주교는 은촛대까지 준 것을 잊었느냐고 말한다. 뉘우친 적도 없는데 받은 용서 앞에서 장발장의 삶이 바뀐다. 정의밖에 모르는 형사 자베르는 은혜를 감당하지 못하고 센강에 몸을 던진다. 저자는 정의에는 선하고 이치에 맞는 힘이 있으나 은혜의 힘은 세상을 바꾸는 다른 종류의 힘이라고 말한다(한 독자의 발췌 116~120쪽).
셋째 까닭이 무엇인지는 찾아본 글에 뚜렷이 적혀 있지 않아 확인하지 못했다. 책 모임 글은 용서를 해 본 사람은 잘못을 당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알게 된다고 전한다. 용서의 궁극의 근거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데 있다는 것은 4장의 결론이다.
6. 복수
시몬 비젠탈의 책 《해바라기》로 장을 연다. 나치 강제 수용소에 갇혀 있던 비젠탈이 병원으로 불려 가 죽어 가는 독일 친위대원 카를을 만난다. 카를은 유대인들을 집에 몰아넣고 불을 지른 일을 털어놓고, 건물에서 떨어지던 검은 머리의 어린 소년이 눈에 밟힌다며 용서를 청한다. 한 서평에 따르면 그 집에 갇힌 유대인은 삼백 명이었다. 비젠탈은 말없이 듣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을 나왔다.
비젠탈은 미군에게 풀려나 살아남았으나 그 병실의 장면이 떠나지 않았다. 전쟁 뒤에는 슈투트가르트에 사는 그 친위대원의 어머니를 찾아가기도 했다. 책의 뒷부분에는 그가 어떻게 했어야 하느냐는 물음에 여러 사람이 보낸 답이 실려 있다. 내가 당하지 않은 범죄를 내가 용서할 수 있는가, 용서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 남는다. 저자는 답글들을 읽으며 용서하지 않는 쪽의 논리가 무섭도록 또렷하다는 데 놀랐다고 쓴다.
복수는 갚아 주고 싶은 마음이지만 결코 셈을 맞추지 못한다는 루이스 스미즈의 말을 인용한다. 복수는 다친 사람과 다치게 한 사람을 모두 고통의 승강기에 묶어 놓고, 그 승강기는 멈추지 않는다. 르완다, 보스니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처럼 지난 일이 오늘의 싸움을 먹이는 곳들을 든다. 간디는 모두가 눈에는 눈으로 갚으면 세상이 다 눈멀 것이라고 했다(한 독자의 발췌 135~136쪽).
북아일랜드의 고든 윌슨 이야기가 이 장에 나온다. 1987년 전몰 장병 추모 행사에 아일랜드 공화국군의 폭탄이 터져 열한 명이 죽고 예순세 명이 다쳤다. 포목상을 하던 감리교 신자 윌슨은 스무 살 난 딸 마리와 함께 벽돌 더미 1.5미터 아래에 갇혔다. 딸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아빠, 정말 사랑해요"라는 말을 남기고 몇 시간 뒤 병원에서 숨졌다. 윌슨은 병상에서 원한이 없다고 말하고, 밤마다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겠다고 했다(한 독자의 발췌 139쪽). (전에 이 쪽에는 7장의 일로 적었다. 쪽 순서와 책 모임 글에 따라 옮겼다.)
링컨, 간디, 마틴 루터 킹, 라빈, 사다트는 모두 비은혜의 법칙을 거스른 값으로 목숨을 잃었으나 화해의 기운을 만들어 냈다고 저자는 적는다. 사담 대신 사다트 같은 사람이 이라크를 다스렸다면, 유고슬라비아의 폐허에서 링컨 같은 사람이 나왔다면 역사가 어떻게 달라졌겠느냐고 묻는다.
7. 은혜의 무기고
용서가 개인을 넘어 나라와 민족 사이에서 일한 예를 든다. 장은 월터 윙크가 전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십 년 뒤 평화 운동가 두 사람이 폴란드의 그리스도인들을 찾아가 서독의 그리스도인들을 만나 줄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한 서평이 옮긴 대목에 따르면 폴란드 사람들은 사람의 힘으로는 못 하지만 하나님이 힘을 주실 것이라고 답한다. 책 모임 글은 주기도문을 함께 기도한 뒤의 일이라고 전한다.
동독의 본보기가 나온다. 1990년 동독에서 처음으로 자유 선거로 뽑힌 의회는 첫 공식 행위로, 유대인에게 저지른 모욕과 추방과 살해에 대해 국민을 대신해 책임을 인정하고 전 세계 유대인에게 용서를 구하는 성명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의원들은 일어서서 오래 박수를 치고 묵념했다. 서독은 이미 잘못을 인정했고 유대인에게 배상금 600억 달러를 치렀다고 책은 적는다(한 독자의 발췌 147~148쪽). 이 성명 이야기는 1991년의 잡지 글에도 실려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화해가 나온다. 데즈먼드 투투는 화해의 과정이 용서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굽히지 않았다. 데 클레르크는 마침내 사과했다고 책은 적는다. 책 모임 글은 넬슨 만델라의 말도 인용된다고 전한다.
동독의 촛불 행진도 책에 나온다. 촛불 행진은 저녁 뉴스에는 잘 비치지 않았으나 세계의 모습을 바꾸는 데 한몫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몇백 명이던 것이 천 명, 삼만 명, 오만 명으로 불어났다. 이 문장이 7장에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14장에도 동독의 그리스도인들이 촛불을 켜고 기도하며 거리를 걸었고 어느 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는 문장이 있다.
한 독자의 발췌에 따르면 이 장 언저리에 다음이 나온다. 폴 틸리히는 용서를 과거를 잊기 위해 과거를 기억하는 일이라고 뜻매김했다(149쪽). 남북 전쟁 뒤 남부를 엄하게 벌하라는 압력을 받은 링컨은 적을 친구로 만드는 것이 적을 없애는 길이 아니냐고 답했다(154쪽). 마틴 루터 킹은 자유에 대한 목마름을 원한과 미움의 잔으로 풀지 말자고 따르는 이들을 타일렀다(157쪽). 한 서평은 킹이 원수를 용서하는 데 필요한 힘을 얻으려고 며칠씩 금식해야 했다는 대목을 옮긴다.
책은 용서가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므로 어려운 기술을 익히듯 배우고 연습해야 한다고 말한다. 본문 조각의 앞뒤로 보아 이 장의 말로 보인다.
3부 파문의 향기: 은혜는 누구에게까지 미치는가
3부의 내용은 구글 도서의 책 안 검색에 나오는 본문 조각, 저자가 자기 블로그에 다시 쓴 윌 캠벨 이야기, 영어 원문을 장별로 연재한 한국 독자의 글, 오스트레일리아와 영국 독자의 서평으로 확인했다.
이야기 셋: 사생아의 집
미국 남부의 목사 윌 캠벨의 이야기다. 캠벨은 미시시피의 가난한 농가에서 자랐고 인권 운동의 지도자들과 함께 일했다. 불가지론자 친구 P. D. 이스트가 기독교의 메시지를 열 낱말 안으로 말해 보라고 하자 캠벨은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모두 사생아지만 하나님은 그래도 우리를 사랑하신다. 영어로 여덟 낱말이어서 이스트는 두 낱말이 남았다고 했다. 저자는 캠벨이 충격을 주려고만 이 말을 고른 것이 아니며, 우리가 영적으로는 자격 없이 하나님의 가족에 초대받은 자녀라는 신학적 뜻이 있다고 풀이한다.
얼마 뒤 캠벨의 스물여섯 살 친구 조너선 대니얼스가 앨라배마에서 토머스 콜먼의 총에 죽었다. 대니얼스는 백인 가게 앞에서 시위하다 붙잡혔고, 풀려나 차편을 구하려고 전화를 걸러 식료품 가게로 가던 길이었다. 그날 밤 이스트는 캠벨의 뜻매김을 시험했다. 대니얼스도 사생아냐, 콜먼도 사생아냐고 차례로 묻고는, 그러면 하나님은 그 둘 가운데 누구를 더 사랑하시느냐고 물었다.
캠벨은 은혜가 죽은 친구뿐 아니라 죽인 사람에게도 미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저자는 이것을 은혜의 지진이라고 부른다. 캠벨은 전국 교회 협의회의 자리를 내놓고, 스스로 비꼬아 부른 대로 "촌뜨기 백인들의 사도"가 되어 인종 차별 단체 사람들에게까지 다가갔다. 이 이야기의 출처는 캠벨의 회고록 《잠자리의 형제》(Brother to a Dragonfly, 1977)다.
8. 불량품 사절
저자는 하나님이 왜 바닷가재를 먹지 말라고 하셨느냐는 물음에서 시작해 레위기의 정결 규정을 살핀다. 레위기 11장은 돼지, 낙타, 토끼, 독수리, 박쥐, 도마뱀, 쥐, 뱀 같은 짐승을 부정하다고 한다. 인류학자 메리 더글러스의 풀이를 따르면 금지된 것은 저마다 제 갈래에서 벗어난 데가 있는 짐승이다. 물고기라면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어야 한다는 식이다.
사람에게도 같은 가름이 있었다. 월경 중인 여인, 아이를 낳은 여인, 피부병이나 고름이 있는 사람, 주검을 만진 사람은 성전에 나아갈 수 없었다. 장애가 있는 사람과 사생아도 자격이 없었다. 흠 있는 것은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 장 제목의 뜻이다. 원문을 연재한 독자는 유대인 남자가 아침마다 이방인이나 종이나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했다는 기도도 책에 나온다고 전한다.
예수님은 이 가름을 넘으셨다. 세리와 함께 드셨고, 정결 예법과 안식일 규정에 느슨하다는 말을 들으셨으며, 이방인의 땅으로 일부러 건너가셨다.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도 잡수셨다. 예수님께는 어떤 갈래나 딱지보다 사람이 더 중요했다고 저자는 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도 같은 뜻으로 읽는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부정한 짐승을 먹으라는 환상을 본다. 저자는 어린 베드로가 어머니에게서 그건 더러운 것이니 만지지도 말라는 꾸중을 들으며 자랐을 것이라고 그린다. 레위기를 읽고 사도행전을 읽으면 땅이 흔들린 듯한 변화가 느껴진다. 은혜의 혁명은 두 가지를 바꾸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모두에게 열렸고, 나와 "다른"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병든 사람과 장애가 있는 사람은 옮을까 피할 대상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비가 흘러갈 자리다.
한 영국 독자의 서평은 이 장에 물음을 단다. 예수님이 정함과 부정함의 가름을 뒤집으셨다면 그 규정들은 왜 있었느냐는 것이다.
9. 은혜로 치유된 눈
저자는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힌 목사 멜 화이트와의 우정을 이야기한다. 화이트는 목사이자 풀러 신학교 강사였고 결혼한 사람이었다. 저자는 2024년의 한 인터뷰에서 화이트가 빌리 그레이엄, 팻 로버트슨, 제리 폴웰 같은 사람들의 책을 대신 써 준 작가였으며, 어느 날 그동안 이중생활을 해 왔다고 털어놓았다고 말했다.
화이트가 《문 앞의 낯선 사람》(Stranger at the Gate)이라는 책을 내자 그가 함께 일했던 그리스도인들이 등을 돌렸다. 잘 알던 한 기독교계 지도자는 내민 손을 보고 얼굴을 찌푸리며 돌아섰다. 그 책에 이름이 나왔다는 까닭만으로 저자도 편지를 받았다. 레위기를 들어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쓴 사람도 있었다. 화이트가 받은 편지의 대부분은 동성애자들이 자기 이야기를 적은 것이었고, 많은 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 적이 있었으며 교회에서 거절만 당했다고 했다.
저자는 화이트 이야기를 쓰는 까닭이 하나뿐이라고 밝힌다. 이 우정이, 나와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은혜가 어떤 영향을 미쳐야 하는가에 대한 자기 생각을 크게 흔들었기 때문이다. 그 다름이 심각하고 어쩌면 풀리지 않는 것일 때에도 그렇다. 영어 위키백과는 저자가 화이트의 선택에 동의할 수는 없었으나 우정은 이어 갔다고 간추린다. 저자는 동성애자 권리 행진에 가 본 일도 적는데, 행진하던 사람들이 어린이 찬송 "예수 사랑하심은"을 불렀다고 한다.
한 독자의 발췌(207쪽, 211쪽. 쪽 순서로 보아 이 장으로 보인다)에는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하나님이 뜻하신 모습으로 보는 것이라는 말, 그리고 칼 바르트가 히틀러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을 묻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고 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미국의 한 목회자가 쓴 서평은 이 장을 두고, 저자가 동성애를 죄라고 부르지 않으려 한다고 비판한다.
10. 허점
"은혜가 그렇게 값없다면 죄를 지어도 되는가"라는 물음을 다룬다. 친구 대니얼의 이야기가 나온다. 대니얼에게는 아내와 세 자녀가 있었다. 그런데도 젊은 여자에게 끌리는 힘이 자석처럼 강해서 버틸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물었다. 내가 이제 하려는 이런 끔찍한 일도 하나님이 용서하실 수 있겠느냐. 저자는 그 물음이 살아 있는 뱀처럼 식탁 위에 놓였고, 커피를 석 잔 마신 뒤에야 답을 시도했다고 쓴다. (전에 이 쪽에는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겠지요?"라고 묻는 친구라고만 적었다.)
저자는 로마서 6장과 7장을 따라 답한다. 은혜가 넘치게 하려고 죄에 머물겠느냐는 물음에 바울은 그럴 수 없다고 답한다. 죄에 대해 죽은 사람이 어떻게 그 가운데 살겠느냐는 것이다. 미리 용서받을 줄 알고 짓는 죄, 곧 은혜를 함부로 쓰는 일은 은혜를 부도덕의 허가증으로 만든다.
저자가 드는 비유는 결혼이다. 신랑이 신부에게 당신을 사랑하지만 결혼한 뒤 다른 여자와 어디까지 지내도 되는지 정해 두자고 말한다면, 그는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어떻게 하면 벌받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느냐는 태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도 같다. 독일어만 하는 여인을 사랑하게 되면 독일어를 배우게 된다는 비유도 든다.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어 한다. 신약 성경이 말하는 선하게 사는 까닭을 한 낱말로 줄이면 감사라고 한다.
회개도 이 장의 큰 줄기다. 요한복음 8장의 간음하다 잡힌 여인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사람을 의인과 죄인으로 가르지 않으시고, 죄를 인정하는 죄인과 부인하는 죄인으로 가르셨다. 한 독자의 발췌(213~218쪽)에는 하나님은 빈손인 사람에게 주신다는 어거스틴의 말, 죄가 많으면서 인정하지 않는 것이 더 큰 악이라는 파스칼의 말, 회개는 돌아가는 일이라는 C. S. 루이스의 말, 그리스도는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으시지만 받으신 뒤에는 그대로 둘 수 없다는 발터 트로비슈의 말이 실려 있다.
11. 은혜 기피증
교회 안의 율법주의를 날카롭게 분석한다(한국어판 출판사 소개).
저자가 다닌 성경 대학의 세세한 생활 규칙이 본보기로 나온다. 규칙집은 예순여섯 쪽이었고, 학생들은 성경 한 권에 한 쪽씩이라고 농담했다. 학장과 교수들은 규칙 하나하나를 성경의 원리에 꿰어 맞추려 애썼다. 미니스커트가 유행하던 때에 치마 길이를 정했고, 남학생은 머리가 귀를 덮으면 안 되었으며 수염도 금지였다. 이성 교제도 엄격히 다스려서, 저자는 약혼한 뒤에도 저녁 식사 시간에만 약혼녀를 볼 수 있었고 손도 잡을 수 없었다.
저자가 자란 교회에서는 춤, 볼링, 주일에 신문 읽는 일이 죄였다. 저자는 이런 애매한 규칙을 얼마나 지키느냐가 영성의 높낮이라는 인상을 받으며 자랐다고 쓴다. 엄한 훈계를 듣는 가운데 도리어 반항을 배웠다고도 한다. 규칙으로 의로워지려는 마음이 은혜를 밀어낸다는 것이 이 장의 요지다. 저자는 율법주의를 은혜를 피하려고 공들여 짠 틀이라고 부른다. 율법을 외우고도 율법의 마음은 모를 수 있다.
율법주의는 아무도 자기를 율법주의자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알아채기 어려운 위험이다. 남의 규칙은 지나치게 엄해 보이고 내 규칙은 꼭 필요해 보인다. 율법주의는 겉의 행동 목록으로 속을 가릴 수 있게 하므로 위선을 부추긴다. 위선의 해결책은 완벽함과 정직함 둘뿐인데 완벽함은 현실의 길이 아니므로 남는 것은 회개에 이르는 정직함이다. 은혜로 들어가는 문은 바른 행동이 아니라 회개이며, 죄의 반대말은 덕이 아니라 은혜라고 한다(한 독자의 발췌 238~246쪽).
톨스토이의 견해도 빌린다. 종교의 틀은 겉으로 지킬 규칙을 늘리는 쪽으로 흐르지만, 예수님은 지키고서 만족할 수 있는 규칙 묶음을 주기를 거절하셨다는 것이다. 한 독자의 발췌에는 개미가 냄새로 죽음을 알아본다는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의 실험 이야기도 실려 있다(221쪽). 살아 있는 개미에게 죽은 개미의 냄새를 묻히자 동료들이 무덤으로 끌어냈다.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을 견주는 대목은 3장으로 옮겼다(3장 항목을 볼 것).
4부 귀머거리 세상을 위한 은혜의 꾸밈음: 교회는 세상에 무엇을 내놓는가
4부의 내용은 구글 도서의 책 안 검색에 나오는 본문 조각, 한국어판에서 쪽수와 함께 옮겨 적은 독자의 발췌, 영어 원문을 장별로 연재한 독자의 글, 영어권 서평으로 확인했다. 12장과 13장은 둘 다 신앙과 정치를 다루어서, 어느 대목이 어느 장에 있는지 가르지 못한 것이 있다.
이야기 넷: 헤럴드 형
저자가 어릴 때 따랐던 한 어른의 이야기다. 저자의 아버지는 저자가 돌을 지난 지 한 달 만에 소아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교회의 한 남자가 아버지 없는 형제를 돌보아 주었고 사람들은 그를 '헤럴드 형'이라고 불렀다. 놀이터에서 형제를 지켜보았고, 체스를 가르쳐 주었으며, 손수레 경주차를 함께 만들었다.
헤럴드는 도덕과 정치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 교회가 너무 자유롭다며 떠났고, 미국이 방종 때문에 곧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믿었다. 흑인을 미워했고 인종 통합을 공산주의의 음모로 보았다. 애틀랜타의 학교에 강제 버스 통학이 시행되자 그는 나라를 떠나기로 한다. 백인이 다스리면서 도덕도 엄한 나라를 찾아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골랐다. 아내와 어린 두 자녀를 데리고, 직장도 친구도 살 집도 없이 떠났다.
헤럴드는 작은 교회의 설교자가 되었고 편지를 꾸준히 보냈다. 편지는 공산주의와 거짓 종교, 젊은이들의 부도덕, 자기와 조금이라도 생각이 다른 교회와 사람들을 꾸짖는 말로 가득했다. 저자가 쓴 책도 제목만 보고 석 장짜리 편지로 정죄했다. 가족 이야기를 쓸 때조차 못마땅해하는 말투였다.
1993년 저자가 남아프리카로 그를 찾아가 보니 헤럴드는 감옥에 있었다. 주일에는 불과 유황의 설교를 하면서, 집에서는 금지된 외국 음란물을 들여와 사진을 오려 유명한 여성들에게 음란한 쪽지와 함께 보내 왔던 것이다. 경찰 특공대가 집을 둘러쌌고 저녁 뉴스에 났다. 면회에서 본 헤럴드는 유령 같았다. 풀려난 뒤 편지는 잠시 겸손해졌다가 다시 굳어졌다. 저자는 그의 편지에서 끝내 은혜의 흔적을 보지 못했다고 쓴다.
저자의 맺음말은 이렇다. 헤럴드는 도덕을 잘 배운 사람이었다. 그에게 세상은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으로 반듯하게 나뉘었다. 그는 그 원을 좁히고 좁히다가 마침내 자기 말고는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되었고, 그다음에는 자기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은혜 없는 도덕이 어디에 이르는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다.
12. 뒤섞인 향기
"그리스도인들은 왜 그렇게 미워합니까?"라는 클린턴 대통령의 물음이 책을 쓰게 한 계기였다. 저자는 클린턴의 첫 임기 때 백악관에 초대받았고, 그 뒤 클린턴의 신앙을 다룬 글을 잡지에 실었다. 그 글 때문에 독설이 담긴 편지 더미를 받았다. 저자는 개정판 서문에서 이 책에 빌 클린턴에 관한 장이 있다고 밝힌다.
교회가 정치의 힘으로 도덕을 세우려 할 때 세상은 교회에서 은혜의 향기와 다른 냄새를 맡게 된다는 것이 이 장의 문제의식이다. 저자는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의 인상이 예수님이 입에 올리지도 않으신 두 가지 문제, 곧 낙태와 동성애에 대한 태도로 굳어졌다고 지적한다. 뒷날의 역사가가 1990년대의 복음주의 교회를 이 두 문제로만 기억하고, 세상에 은혜의 향기를 퍼뜨리는 일은 거의 하지 않았다고 적는다면 어떻겠느냐고 묻는다.
은혜가 권력에 자리를 내준 역사의 본보기로 칼뱅이 다스리던 제네바의 엄한 규제를 든다. 원문을 연재한 독자는 이 대목에서, 저자가 낙태와 동성애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며 교회가 더 힘써야 할 일을 말하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저자는 그리스도인이 정치에 참여할 권리와 책임을 온전히 인정한다고 밝힌다. 노예제 폐지, 민권 운동, 낙태 반대 같은 도덕 운동을 그리스도인들이 이끌어 왔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방식이다.
13. 뱀 같은 지혜
원수를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무기는 정치적 승리가 아니라 사랑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낙태를 반대할 수 있으나, 그 일에 관련된 여성과 의사를 은혜로 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클린턴이 재임 중에 들은 연설 가운데 낙태를 두고 한 테레사 수녀의 말이 가장 깊이 박혔을 것이라고 적는다.
저자는 신앙과 나라를 함께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결론 세 가지를 내놓는다(한 독자의 발췌 282~293쪽). 첫째,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이바지할 주된 몫은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는 일이다. 잘못된 생각은 물리치되 그 생각을 품은 사람을 물리쳐서는 안 된다고 한 마틴 루터 킹이 본보기다. 둘째, 은혜의 방식을 따른다고 교회가 정부와 온전히 어울려 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잠비아의 전 대통령 카운다는 나라에 필요한 것은 왕궁의 그리스도인 왕보다 들리는 곳에 있는 그리스도인 선지자라고 했다. 셋째, 체스터턴에게서 빌린 원리로, 교회와 정부가 가까워지면 정부에는 좋고 교회에는 나쁘다.
교회는 정부의 주인도 종도 아니고 양심이라는 말이 나온다. 교회는 국가의 힘에 맞서는 균형추일 때 가장 제 구실을 한다. 히틀러 정권을 처음에 환영했던 독일 교회가 본보기다. 정부는 주일에 가게를 닫게 할 수 있으나 예배하게 할 수는 없고, 살인자를 벌할 수 있으나 미움을 고칠 수는 없으며, 간음을 금할 수 있으나 욕망을 금할 수는 없다. 정부는 도덕을 북돋울 수는 있어도 거룩함을 만들 수는 없다.
한 영국 독자의 서평은 이 장에서, 정적이었던 사람이 실각한 닉슨을 찾아가 여전히 사랑받고 있음을 보여 준 이야기가 마음에 남았다고 적는다. 한 독자의 발췌에는 용과 싸우다가 스스로 용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니체의 경고도 있다(272쪽). 빌리 그레이엄이 정치적 차이를 넘어 트루먼 이후의 모든 대통령을 섬겼다는 대목도 책에 나오는데, 12장과 13장 가운데 어느 장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14. 한 점 푸르른 땅
교회가 세상 한가운데서 다른 나라의 모습을 보여 주는 작은 땅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키르케고르는 자신을 정탐꾼이라고 불렀다. 그리스도인은 한 세계에 살면서 더 깊은 충성은 다른 세계에 둔 사람들이다. 본회퍼는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을 참된 본향의 거류민이라고 했다. 적대적인 세상 속에 세워진 하늘나라의 거류지, 이것이 신약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모습이라고 저자는 쓴다.
미국의 한 독자는 장 제목의 뜻을 이렇게 전한다. 산불이 지나간 뒤 처음 돋은 푸른 풀밭은 큰 사슴이 죽어 쓰러진 자리였다. 그리스도인이 살다 간 자리에 은혜의 싹이 드러난다는 비유다. 이 풀이는 이 독자의 글 한 편에서만 확인했다.
교회는 다른 길을 보여 주는 창이어야 하는데 너무 자주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고 한다. 여론 조사가 조지 바나의 조사에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이혼율(27%)이 믿지 않는 사람(23%)보다 높았고, 스스로 근본주의자라고 한 사람들이 가장 높았다(30%)는 숫자를 든다. 이 숫자는 원문을 연재한 독자의 글에서 옮겼다.
저자가 러시아에서 보고 들은 일들이 나온다. 솔제니친은 러시아에 닥친 재난의 뿌리를 한마디로 말하라면 사람이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교회를 없애려던 정부도 할머니들은 내버려 두었는데, 지금 교회에 다니는 젊은이들 가운데는 할머니가 잠자리에서 들려준 찬송과 이야기로 하나님을 처음 배웠다는 이가 많다. 중국 교회는 권력에서 완전히 밀려난 가운데 예배와 전도에 힘써 크게 부흥했다. 법을 바꾸는 일보다 삶을 바꾸는 일에 집중했다는 것이다(한 독자의 발췌 300~304쪽).
예수님이 그리신 하나님 나라는 숨은 세력과 같다. 이리 떼 속의 양, 밭에 감추인 보화, 가장 작은 씨앗, 반죽 속의 누룩, 고기에 뿌린 소금처럼 안에서 밖으로 바꾸어 간다. 스탈린은 공산주의의 앞날을 보여 주려고 폴란드에 노바후타라는 새 도시를 지었으나, 이 도시는 뒷날 자유 노조의 본산이 되었다. 동독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촛불을 켜고 기도하며 거리를 걸었고 어느 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권력의 사다리는 위로 오르지만 은혜의 사다리는 아래로 내려간다고 한다. 죽어 가는 환자들이 존엄하게 죽을 곳을 만들려고 의사가 된 시슬리 손더스와 호스피스 운동, 재산을 처분하고 집 없는 이들의 집을 짓는 해비타트 운동을 시작한 밀러드 풀러가 본보기다(한 독자의 발췌 313~314쪽). 한 서평은 책 전체에 알코올 중독자 자조 모임, 구세군, 교도소 선교회 이야기도 나온다고 전한다.
15. 중력과 은혜
제목은 프랑스 사상가 시몬 베유의 책 《중력과 은총》에서 왔다. 영혼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은 모두 물체가 떨어지는 법칙과 닮은 법칙의 다스림을 받고 은혜만이 예외라는 베유의 말이 인용된다. 사람을 끌어내리는 힘(중력)과 그것을 거스르는 은혜를 맞세운다. 남보다 낫다고 느끼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 중력이지 은혜가 아니다.
저자는 은혜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 하면서 불완전함이 은혜의 전제 조건임을 깨닫는다고 쓴다. 빛은 갈라진 틈으로만 들어온다. 우리의 상처와 흠이 은혜가 지나가는 틈이다. 한 강사의 비유도 옮긴다. 하나님은 사람을 저마다 줄로 붙들고 계시는데, 죄를 지으면 줄이 끊어지고, 하나님이 매듭을 지어 다시 이으실 때마다 줄이 짧아져 그 사람은 하나님께 더 가까워진다(한 독자의 발췌 321쪽).
하나님은 이상하게도 "성인"보다 죄인에게 더 가까이 계신다고 한다. 여기서 성인은 경건하다고 이름난 사람을 가리키며, 참된 성인은 자기 죄를 잊지 않는다고 저자는 덧붙인다. 예수님이 죄인들과 오래 지내신 까닭은 그들이 자기에 대해 솔직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알코올 중독자 자조 모임에서는 누구도 지위를 따지지 않는다는 것,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하라는 말을 두고 C. S. 루이스가 평생 그렇게 대해 온 사람이 하나 있으니 곧 자기 자신이었다고 쓴 것을 인용한다.
서평들에 따르면 마지막 장에는 저자가 자기 교회에서 온전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성찬을 나누어 준 이야기가 나온다. 네 번째 결혼을 막 시작한 여인도 그 가운데 있었다.
저자는 많은 사람이 순전한 은혜에 가장 가까이 가 보는 때가 사랑에 빠졌을 때라고 말한다. (영어 위키백과에 나오는 대목이며 어느 장의 말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책은 런던 웸블리 경기장의 장면으로 끝난다. 빌 모이어스가 찬송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다룬 기록 영화에 나오는 장면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변화를 기념하는 공연에서 록 밴드들이 열두 시간 동안 무대를 달군 뒤, 주최 쪽은 마지막 순서로 오페라 가수 제시 노먼을 세웠다(한 글은 1988년의 일이라고 적는다). 반주도 악기도 없이 혼자 무대에 선 노먼에게 관중은 록 음악을 더 내놓으라고 소리쳤다. 노먼이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부르기 시작하자 칠만 명이 조용해졌고, 3절에 이르러서는 수천 명이 따라 불렀다. 노먼은 뒷날 그 밤 경기장에 어떤 힘이 내렸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저자는 알 것 같다고 쓴다. 세상은 은혜에 목말라 있고, 은혜가 내리면 세상은 그 앞에서 잠잠해진다. (전에 이 쪽에는 "수만 명"이라고만 적었다.)
이 마지막 장면에서 저자는 찬송을 지은 존 뉴턴도 말한다. 뉴턴은 거칠고 잔인한 노예 상인이었고, 회심한 뒤에도 한동안 그 일을 계속하다가 뒷날 그만두고 목사가 되어 윌버포스와 함께 노예제에 맞섰다.
한국어판 서문
저자는 한국의 독자에게 쓴 서문에서, 한국 교회의 분열과 학벌·성공을 앞세우는 신분 문화에서 비은혜를 보았다고 적었다(출판사 소개).
책에 대한 비판
평한 곳
내용
《퍼블리셔스 위클리》
일화를 이어 가는 서술 방식이 자주 답답하지만 읽을 만한 책이라고 평했다.
《위니펙 프리 프레스》
그리스도인에게 은혜를 베풀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저자의 견해를 비판하며 그런 은혜를 "값싼" 은혜라고 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
감상적이라고 평했다.
미국 목회자 단체 나인마크스(9Marks)에 실린 서평
그레그 길버트 목사는 저자가 은혜를 끝내 뜻매김하지 않으며, 책에서 은혜가 사실상 친절함이나 상냥함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고 비판했다. 죄를 죄라고 부르는 일과 정의를 가볍게 다룬다는 것이다. 교회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며, 비젠탈이 말없이 방을 나온 것은 옳았을 수 있다고 썼다.
은혜를 강조하는 한 설교자의 서평(Escape to Reality, 2011년)
책을 좋게 평하면서 신학적으로 세 가지를 문제 삼았다.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가 남을 용서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쓴 대목, 거듭난 사람도 여전히 죄인이라고 고백해야 한다는 대목, 용서를 사람의 노력으로 해내야 하는 일처럼 그린 대목이다. 저자는 이 서평을 미리 받아 보고 반박하지 않겠다며 고맙다는 답을 보냈다고 서평자는 적었다.
《북리스트》(반대쪽 평가)
잘 쓴 책이며 〈바베트의 만찬〉과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간추린 솜씨가 좋다고 평했다(영어 위키백과).
설교와 이 책
서울중앙교회 김진영 담임목사는 2021년 2월 7일 주일설교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에서 책 두 권을 소개했다고 하시며, 그 가운데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에 있는 일화 하나를 들려주셨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면 사람과의 관계와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이 온다는 말씀의 예화였다.
설교에서 저자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책 두 권을 소개했다"는 대목은 설교 영상의 자막이 깨져 어디에 소개하셨는지, 다른 한 권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설교노트는 적어 두었다. 그러므로 목사님이 가리킨 책이 필립 얀시의 이 책이라는 것은 제목이 같다는 데서 나온 추정이다.
설교에 나온 일화. 수십 년 동안 아내와 떨어져 마룻바닥에서 자는 남편이 있었다. 틈은 30년 전, 다섯 살짜리 딸이 아팠을 때 남편이 충분히 관심을 보였느냐를 두고 다툰 데서 생겼다. 속이 상한 남편은 마룻바닥에 나와 잤다. 남편은 밤마다 아내가 다가와 주기를, 아내는 남편이 들어와 위로해 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30년 동안 아무도 그 일을 하지 않았고, 딸은 서른다섯 살이 될 때까지 그 모습을 보고 자랐다.
일화를 이 책에서 찾았다. 구글 도서에 올라 있는 이 책의 전자책판을 책 안 검색으로 찾아보면 다음 문장들이 나온다(구글 도서의 책 안 검색).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소설 《The Knot of Vipers》('독사의 매듭'이라는 뜻)는 결혼 생활의 마지막 수십 년을 아내와 복도 저편에서 자며 보내는 노인의 이야기다. 틈은 삼십 년 전, 다섯 살 난 딸이 아팠을 때 남편이 충분히 걱정했느냐를 두고 벌어졌다. 이제 남편도 아내도 먼저 발을 떼려 하지 않는다. 밤마다 남편은 아내가 다가오기를 기다리지만 아내는 오지 않고, 밤마다 아내는 누워서 남편이 다가오기를 기다리지만 남편은 오지 않는다. 누구도 사슬을 끊지 않고 누구도 용서하지 않는다.
설교의 단서와 거의 다 맞는다. 30년, 다섯 살 딸의 병, 남편이 충분히 관심을 보였느냐는 다툼, 밤마다 서로 상대가 먼저 다가오기를 기다림,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음이 모두 책의 문장과 같다. 그러므로 목사님이 말씀하신 책은 필립 얀시의 이 책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만 설교에서 저자를 밝히지 않으셨으므로 확정이라고 적지는 않는다.
어느 장인가. 이 대목은 《콜레라 시대의 사랑》의 비누 다툼 바로 다음에 "비슷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비누 다툼은 미국 한 교회의 책 모임 글과 영어 원문을 장별로 연재한 한국 독자의 글이 모두 '왜 용서인가?' 장의 내용으로 전한다. 그러므로 한국어판으로는 2부 5장 '왜 용서인가?'이다(영어 전자책판의 번호로는 8장). 한국어판의 몇 쪽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설교와 다른 점 하나: 실화가 아니고 소설의 줄거리다. 책은 이것을 모리아크의 소설 이야기로 소개한다. 설교노트에는 소설이라는 말이 없고 "한 남편의 이야기"로 적혀 있다.
설교와 다른 점 둘: "마룻바닥". 책의 영어 문장은 아내와 "복도 저편에서"(down the hall) 잔다고 적는다. 다른 방에서 잔다는 뜻이다. 설교의 "마룻바닥"이 한국어판의 번역에서 온 말인지, 설교에서 풀어 말씀하신 것인지는 한국어판 본문을 보지 못해 확인하지 못했다.
설교에만 있는 말. 딸이 서른다섯 살이 될 때까지 그 모습을 보고 자랐다는 말과 "그 딸은 행복했겠습니까?"라는 물음은 확인한 책의 문장에 없다. 다섯 살에 30년을 더해 목사님이 덧붙이신 말씀으로 보인다.
같은 이야기의 앞선 판. 저자는 1991년 4월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에 실은 글에서도 이 소설을 같은 자리에 썼다(1991년의 글). 거기서는 틈이 생긴 까닭을 딸의 병이 아닌 부부 사이의 다른 일로 적었다. 설교의 내용은 1997년의 책 쪽과 맞는다.
찾아보았으나 없던 곳. 한국어 블로그와 설교문에서 이 대목을 옮긴 글은 찾지 못했다. 쪽수와 함께 한국어판을 길게 옮겨 적은 독자의 글에도 이 대목은 없다.
원서의 출간 정보, 중심 주장, "비은혜"와 "은혜의 스캔들"이라는 말, 수상과 평가, 언론의 비판
백과사전(영어 위키백과)으로 확인
원서의 목차(부와 장의 제목)
미국 대학 서점의 도서 정보로 확인. 2023년 개정판의 목차는 출판사 견본으로 확인(프롤로그와 이야기에도 번호를 매겨 20장).
한국어판의 목차, 판본, 쪽수, 책 소개와 발췌
예스24와 알라딘으로 확인
프롤로그의 내용
출판사가 공개한 2023년 개정판 견본으로 확인. 개정판이어서 본보기로 든 인물과 사건 일부는 1997년판과 다를 수 있다. 낱말 풀이의 뼈대와 맺음말은 1997년판을 인용한 서평과도 맞는다.
장별 내용 가운데 구글 도서의 책 안 검색으로 본 것
바베트의 복권 1만 프랑, 헤밍웨이 집안 이야기, 포도원 품꾼과 잃은 양, 비누 다툼, 모리아크의 소설, 비젠탈, 고든 윌슨, 폴란드와 동독과 투투, 윌 캠벨, 레위기, 멜 화이트, 친구 대니얼, 성경 대학 규칙집, 헤럴드 형, 클린턴, 책의 맺음 문장. 검색 결과로 나오는 짧은 본문 조각을 읽은 것이며 앞뒤 문맥 전체를 본 것은 아니다. 영어 전자책판의 본문이다.
장별 내용 가운데 독자의 글에 기댄 것
한국어판에서 쪽수와 함께 옮겨 적은 티스토리 글 한 편(2001년에 읽은 판), 영어 원문을 장별로 풀이한 네이버 블로그 연재 여덟 편(2025년), 책의 두 장을 길게 옮긴 영어권 블로그 한 편, 미국 한 교회의 책 모임 블로그. 개인의 발췌와 독후감이므로 글 속에 그 성격을 밝혔다. 네이버 연재는 장 번호를 글쓴이 나름으로 매겼으므로 장 제목으로 맞추었다.
어느 내용이 어느 장에 있는가
장 제목과 함께 전해진 것은 그대로 따랐다. 쪽수만 있는 발췌는 쪽 순서로 장을 짐작했고 그런 곳에는 그렇게 적었다. 1장의 피터 그리브 이야기, 9장의 바르트 일화, 7장 언저리의 틸리히·링컨·킹 인용이 그렇다. 동독 촛불 행진 문장 하나, 빌리 그레이엄 대목, 사랑에 빠졌을 때라는 말은 장을 확인하지 못함
이번에 자료에 맞추어 고친 것
이야기 둘의 줄거리(데이지, 마거릿, 마이클), 비누 다툼의 장(4장에서 5장으로)과 기간(일곱 달), 고든 윌슨의 장(7장에서 6장으로),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 대목의 장(11장에서 3장으로), 《베니스의 상인》 인용과 용서하지 않는 종의 비유의 장(4장으로), 탕자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버스 터미널의 친척 마흔 명), 친구 대니얼의 사정, 책의 마지막 장면의 숫자(칠만 명)
[확인필요]로 표시한 것
확인하지 못함. 두 가지가 남았다. 바베트의 만찬에서 마을 사람들이 식탁에서 화해한다는 것, 3장에 일흔 번씩 일곱 번의 용서가 나온다는 것. 정리자가 알고 있는 내용이며 자료에서 찾지 못했다.
5장의 용서해야 하는 "세 가지" 까닭 가운데 셋째
확인하지 못함. 한 독자의 발췌는 세 가지라고 적고 둘만 옮겼다.
헤럴드 형 이야기의 세부
책 안 검색의 본문 조각과, 1998년 2월 미국의 한 침례교 목사가 설교에서 이 이야기를 옮긴 글로 확인. 설교문은 책 제목을 밝히지 않으나 내용이 본문 조각과 맞는다.
윌 캠벨 이야기의 세부
책 안 검색의 본문 조각과 저자가 2013년 자기 블로그에 다시 쓴 글로 확인
설교에 나온 "30년 동안 떨어져 잔 남편" 일화가 이 책에 실려 있는지
구글 도서의 책 안 검색으로 확인. 모리아크의 소설 이야기로 실려 있다. 장은 5장으로 판단했으나 한국어판의 쪽수는 확인하지 못함
설교의 "마룻바닥"이라는 말
확인하지 못함. 영어 문장은 "복도 저편에서" 잔다고 적는다. 한국어판이 이 말을 어떻게 옮겼는지 보지 못했다.
설교에서 말한 책이 필립 얀시의 이 책인지
추정. 설교에서 저자를 밝히지 않으셨다. 일화의 내용이 이 책의 문장과 맞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설교에서 함께 소개했다는 다른 한 권
알 수 없음. 설교노트에 따르면 자막이 깨져 있다.
인터넷 아카이브에 있는 원서와 한국어판(2009)의 본문
열어 보지 못함. 대출용 자료여서 본문과 책 안 검색이 열리지 않았다.
네이버 블로그의 다른 독후감들
몇 편을 열어 보았으나 찾는 대목이 나오지 않아 쓰지 않았다.
읽는 분께. 이 글은 책을 읽고 쓴 독후 정리가 아니라, 공개된 자료로 책의 짜임을 잡고 알려진 내용을 덧붙인 안내입니다. 설교나 교재에 옮기실 때는 반드시 책과 대조하시기 바랍니다.